언어를 배운다. 그것도 셋이나, 한 번에. 다음을 위한 나의 준비다.
두 가지는 사람 말이고, 하나는 사람 말이 아니다.
사람 말 중 하나는 이역만리의 코가 큰 사람들이 쓰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교양 있는 어느 지역 사람들이 쓴다는 우리말이다. 하나는 낯설어서 어렵고, 하나는 교양이 부족해서인지 쉽지 않다.
차라리 사람 말이 아닌 쪽이 더 낫다고 여겨질 정도다.
사람 말이 아닌 쪽은 그나마 깔끔하고 체계적이다. 1을 넣으면 1이 나오고, 0을 넣으면 0이 나온다. 하지만 1을 0으로 착각한다고 해서 친절하게 바로잡아 주는 정은 없다. 1은 1이고, 0은 0이다.
로봇 같다고 곧잘 놀리던 누군가가 떠오른다. 자기 정도면 나름 따뜻한 편이라고 말하던 게 생각난다. 그때는 반발했지만 지금은 얼마든 수긍할 수 있다. 속 깊은 세심함은 쉽게 알아채기 힘들다. 특히 속 좁은 사람의 편협한 시야로는 말이다.
종일 사람이 아닌 것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감정이 아닌 사고로 판단하게 된다. 감정 쪽으로 치우쳐 있던 눈금이 서서히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언어란 건 참 묘하다. 언어가 통하면 마음이 통한다. 물론 마음이 없는 것과는 통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언젠가 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언어가 가진 진정한 힘이라 생각한다.
만약 세상의 모든 존재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갈곳 없이 버려져 떠도는 개나 죽은 새끼를 등에 업고 태평양을 누비는 돌고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세상에는 마음이 없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지만, 언제까지고 우리 곁을 지키진 않는다. 돌보기를 소홀히 하면 언제든지 달아나고 만다. 드넓은 고원에 풀어놓은 양 떼처럼 말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흘러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말이다.
일상은 언제나 바쁘고 정신없고 우리를 끝없이 소진시키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보자. 누군가를 위한다는, 무언가를 위한다는 명분은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나의 마음은 내가 먼저 돌봐주어야 한다. 지쳐 있다면 토닥여주고, 울고 있다면 힘껏 껴안아주자.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을 것이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다. 당분간 차가운 바람이 분다고 한다. 목도리를 잘 싸매고 다녀야 겠다. 누구에게나 작은 위안은 필요한 법이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여린 사람일수록 더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