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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 SEAN Nov 01. 2023

[일상] 제로의 영역

Sleeping Girl, Domenico Fetti, c. 1615

바빴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었다. 눈이랑 코가 어디에 달려 있는지도 모를 만큼.


낯섦과의 투쟁이 한창인데 이때다 싶어 기존 일들이 거리의 은행잎처럼 쌓여갔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땐 잠이 참 만만하게 보인다. 그리고 잠 쪽에서도 나를 꽤 적절히 도발한다.


“날 줄일 각오도 되어 있지 않다고? 그럼 넌 아직 멀었어.”


이런 말을 듣는다면 별 수 없다. 나는 선뜻 잠을 포기한다.


잠탱이가 잠을 줄이다니, 평소 같았으면 정말 큰일이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일상이 됐다. 이 모든 게 사람들이 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들 툭하면 잠부터 줄이고 본다.


유튜브 볼 시간에 잔다고 하면 이상하게 바라본다. 사람들이 좀 더 잠을 사랑하면 좋겠다.


*


달리는 말은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채찍 리듬에 맞춰 몸을 웅크렸다 폈다 반복할 뿐이다. 그에게는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


신경에 날을 세우고 제로의 영역에 들어선 육상선수처럼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낸다. 오직 중요한 것, 필요한 것만을 남긴다.


하지만 인생에서 단시간에 승부가 나는 경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누구든 제로의 영역에서 오랜 시간 머물 수 없다. 말이든 사람이든, 지치기 마련이니까.

가끔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이 망막에 비춰올 때면 아주 작게 긴 한숨을 뽑아낸다.


최선을 다한다는 실감, 열심히 뛰고 있다는 체감을 발판 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그래서 위태롭다. 어쩌다 잠깐 멈춰 섰을 때 그동안 자신이 뛰고 있었던 건지, 멈춰 있었던 건지 좀처럼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럼에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잘 지내는 쪽이 결국에는 승리하기 마련이라 생각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애써 흘려보낼 필요는 없다. 지금을 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잘 지냈으면 좋겠다. 물론 말은 참 쉽다.


행복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멀게 느껴지는 지금, 나는 또 이런 소리나 하고 있다.


이따금 파랑새의 지저귐에 다시 고개를 들 정도면 충분하다.


심지 곧은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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