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부터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기까지
세계 자본시장의 중심지이자 1인당 평균 GDP 7만 4천 달러로 미국 주요 도시별 1인당 GDP 순위 3위(Knoema 통계)를 차지한 도시, 바로 뉴욕(New York)이다. 이처럼 뉴욕이 미국의 최대 도시이자 경제적 수도 역할을 할 수 있는 데에는 맨해튼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월가라고 부르는 월스트리트는 뉴욕 맨해튼 섬 남부에 위치한 거리로 금융 밀집 구역이다. 시간이 지나며 월스트리트라는 명칭은 미국의 '영향력 있는 금융 세력'을 비유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며 주변 지역을 지리적으로 일컫는 이름으로 발전했다. ‘뉴욕 증권거래소(NYSE)’, ‘나스닥(NASDAQ)’, 수많은 금융기관과 세계적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는 월가, 그리고 뉴욕이 미국을 넘어 전 세계 경제의 중추가 되기까지 어떠한 배경들이 존재했는지 알아보자.
원주민들만이 거주하고 있던 맨해튼 섬은 1524년 이탈리아 항해사인 조반니 다 베라치노에 의해 발견되었다.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청탁으로 항로 개척에 나선 영국의 탐험 항해가 헨리 허드슨은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러 탐험을 하며 식민지의 기초를 구축하는데, 그때 맨해튼 섬을 둘러싼 강에 붙여진 이름이 허드슨강이다. 이후 대항해시대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가 아메리카 신대륙에의 무역 · 통상 등을 목적으로 1621년 서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식민지배를 진행하였다. 원주민으로부터 맨해튼 섬을 매입하고 허드슨강 유역에 무역 거점을 구축하며 인근 지방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 총독 피터 미누아트가 맨해튼 섬에 붙인 이름이 지금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인 것이다.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을 식민지로 점령한 후 주거 지역과 식민지 지역의 경계를 구분하는 벽을 쌓는다. 같은 시기, 영국 역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진출 발판을 마련하고자 뉴암스테르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영국은 자국의 산업 보호라는 명목 하에 항해조례(The Navigation Act)를 선포하며 네덜란드를 견제했다. 갈등이 심화된 두 국가는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그런 영국의 공격을 방어하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원주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한 벽(Wall)이 월스트리트의 시초이다.
결국, 뉴암스테르담을 포함한 아메리카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는데 영국군은 뉴암스테르담의 이름을 영국의 도시인 요크(York)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요크라는 뜻의 '뉴욕(New York)'으로 바꿨다. 이후 도시 확장을 위해 네덜란드가 세워놓았던 벽 밖의 습지가 간척되며 벽이 철거되고 도로가 들어서면서 벽의 거리, 월스트리트로 불리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 시절부터 자본 거래가 이루어진 뉴욕은 1783년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후 상공업 발전 촉진을 위한 1791년 '미합중국 제1은행' 설립, 표준화된 증권거래를 위해 맺어진 '버튼 우드 협정'을 토대로 한 1817년 '뉴욕 증권 거래위원회' 설립과 1863년 '뉴욕 증권거래소'로의 승인, 물자 운송과 교통 환경의 개선을 위한 '철도 및 운하 건설' 등의 과정을 거치며 현재 국제적 금융 중심지로서 막대한 규모의 자본이 거래되며 전 세계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