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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용 Jun 18. 2021

고독한 신입일기 04

기회가 없다고 단정하지 말 것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아주 단순하고 알바와도 같은 일이였다. 그래서 가끔은 하다가 졸기도 하는, 뭐 그런 일이였다. 첫 입사날 교육도 2시간 만에 끝냈으니 말 다했지 뭐. 마음 속 한 구석에 아무리 단기 파견계약직라고는 하지만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거고, 뭐 일하다가 이것저것 주워듣다보면 다른 기회가 또 생기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아주 무색한 것이었고, 내가 하는 일의 단순성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여기서는 돈을 버는 알바라는 생각이 강했고, 그랬기에 오히려 단순업무가 잘 맞았다.  



 회사가 금융회사다 보니 동기 중에는 금융회사에 입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취준 기간 중에 단 파견계약직이라는 경력이나마 쌓아놓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 온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은 단순 반복인 업무에 다소 실망한 눈치였다. 그럴만도 한게 하루종일 파티션에 갇혀 자리에 앉아 마우스만 딸깍대는게 일의 전부였다.  애초에 파견직들만 따로 자리가 배정되어있어서 금융과 관련된 그 어떤 지식도 주워들을 수 없었다. 금융회사에 출근을 하게 됐다고 하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어른들이) 기회를 잘 잡아서 아예 눌러앉으라 말했다. 처음부터 그럴 수 없는 자리라는 걸 설명해도 도통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말하자면, 단기 파견계약직으로 들어가서 내부의 어떤 우연한 기회로 '정규직'이 될 수는 없었다.





 변화의 기회가 아예 없는 건 아니였다. 출근한지 한 달 쯤 됐을까, 내 옆자리의 동기언니가 갑작스러운 대리님의 호출로 불려갔다. 각자 맡은 일만 하면 되는 일이다 보니 대리님은 출근 첫날 이후로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언니가 혼나는 건 아닌가, 아니면 일을 못해서 잘리는 건 아닌가(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아예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였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나도 불려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몇 분 후 동기언니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었느냐 묻고 싶었지만 부산스럽게 자리를 정리하는 모습에 선뜻 물어볼 수 없었다. 그만두는건가. 자신의 노트, 펜, 핸드폰을 챙겨들은 언니는 내 옆을 지나가면서 '대표전화 업무 하게 됐어'라고 얘기했다. 그러곤 옆에서 대표전화 업무를 하던 사람 옆에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언니는 출근한지 한 달만에 업무가 변경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 중에 언니가 대표전화 업무를 하게 된 이유는 이전에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지루하던 찰나에 업무 변경이 되었다며 제법 만족스러워했다. 기회가 절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길은 있었다.



 평소와 같이 업무를 하던 어느 날, 공지방에 대리님이 공지를 남기셨다. 다른 층 다른 부서에 서류 정리 작업을 한 사람이 필요한데 자원할 사람이 있냐는 내용이었다. 엉덩이가 세상 무거운 나는 그냥 하던 일이나 편하게 하고 싶어서 그 대화방을 스르르 끄고 못 본 척을 했다. 같이 점심을 먹는 동기 중 한 명이 자원을 했다. 반복 업무만 해서 졸린 김에 몸 움직이는 일이나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동기 외에는 자원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동기는 바로 차출되어서 다른 곳으로 갔다. 이후 얘기를 들어보니 다른 부서에 가서 관련 서류를 순서대로 정리하는 단순한 육체노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기는 나름 만족한 듯 보였다.

 꽤 서류가 쌓여있는 일인건지 그 날 이후에도 종종 자원할 사람을 구한다는 공지가 올라왔고 그 때마다 동기는 누가 채가는 것도 아닌데 재빠르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기는 전에 대표전화 업무로 업무가 변경되었던 언니처럼 대리님과 면담의 시간을 가졌고 서류 정리 작업을 하던 층에 1년 계약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중요한 건 그 동기가 원래부터 금융 쪽으로 진로를 정하고 싶어했단 것이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작은 기회라도 경험해보고자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그 행동이 작은 기회를 가져다 준 셈이었다. 





 이 외에도 다른 분들에게도 업무 변경의 기회가 왔고, 나에게도 비슷한 기회가 찾아왔다. 몇몇 분들은 업무 변경을 하기도 했고, 변경을 했다가 다시 이쪽 일로 돌아온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뚝심있게(?) 자리를 지킨 사람도 있었다. 사실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애초에 금융에 관심도 없었고, 이 쪽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뭐, 돈을 한 달에 4,5백을 준다면야 싫은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굳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내가 세워둔 이후의 계획이 분명히 있었다. 나처럼 자신이 가야할 길을 미리 정해놓은 사람들은 '괜찮은데?' 싶은 기회가 와도 흔들리지 않았다. 평소에 금융에 관심이 있고, 준비하던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 된 일이지 싶다.


 처음 회사에 들어와 업무 교육을 받았을 때, 나는 절대 다른 길로 넘어갈 어떠한 기회도 오지 않을 거라 장담했다. 파견계약이라는 게 그런거지, 뭐 별 수 있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어떻게든 기회는 오기 마련이었고, 평소에 가지던 생각, 다짐에 따라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만약, 내가 일한 곳이 내가 원래부터 일하고 싶어하던 곳이었다면, 박스를 옮기는 육체 노동이건, 포장을 하는 단순 노동이건 나는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자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어디에서나 기회는 오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그런 게 있을 수 없어. 절대 안 돼. 이런 생각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기 파견계약직'이라는 단어에 한계를 정해둔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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