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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용 Oct 12. 2020

고독한 취준일기 02

몇 살이세요?

 나는 올해 8월에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장을 받기까지 일 년의 휴학 기간과 반 년의 졸업보류 기간이 있었다. 일 년의 휴학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유럽여행. 한 달의 여행을 위해 일 년을 바쳤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한 톨의 후회도 없다. 하지만 반 년의 졸업보류 기간에는 미련이 가득하다. 그 기간에 적극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마치 졸업 전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휴식 시간처럼 써버렸다. 드라마나 웹툰 같은 걸 보면 대학교 4학년들이 졸업 하자마자 턱턱 취업도 잘 하길래 나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내가 너무 현실을 몰랐다는 잘못도 있지만, 뭐. 

 8월에 졸업을 하고 이제 2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차근차근 취업 준비를 한다는 것 같다. (사실 정확하게 잘 모른다. 주변에 20살 친구들이 없어서.) 나는 1학년 때 정신 놓고 놀고 술 먹고 놀고,  뭐 그렇게 놀고 먹고 그래도 나는 취업을 잘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취업 준비를 한 기간은 엄연히 따지자면 2개월 남짓이다. 일반적으로 취업 준비 기간이 1-2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 셈이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조급함이 밀려온다. 이제 2020년이 3개월도 안 남았다는 사실이 느껴지면 조급해지고, 이제 내 나이 25살(!)이라는 사실이 느껴지면 조급해진다. 취준 중 가장 중요한 게 멘탈관리라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이제 2개월 됐는데도 멘탈이 조금씩 무너진다니. 내가 유리멘탈인 건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쿠크다스 멘탈인 줄은 몰랐다.



 나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재수 없이 바로 현역으로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내가 원하는 대학교가 아니었다. 나는 수시 전형으로 올인을 했었는데, 과 선택을 잘 못해서 (그 때 유행 탄 과를 선택했었다.) 5개 중 4개에 다 떨어지고 딱 하나 보험용으로 넣은 대학교에 합격을 했다. 합격 통지를 받았는데 기쁘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 잘 한다는 소리를 들어와서, 은연 중에 좋은 대학을 갈거라는 자만이 있었다. 하지만 재수를 할 수는 없었다. 일 년동안 학원이며 인강이며 풍족한 지원을 해줄 수 없는 집안의 경제 사정도 걸림돌이었지만, 정해진 길을 비껴나가면 안된다는 나의 멍청한 생각이 더 큰 걸림돌이었다. 대학에 들어와보니 재수한 동기도 있었고, 삼수한 동기도 있었다. 그 동기들과 친하게 잘 지냈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나는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길을 걷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이 어느정도였냐면, 20살 때 반수를 고민했는데 그냥 포기했다. 만약 반수를 하게 되면 21살에 다시 대학교 1학년이 되는데 그게 남들보다 늦은 출발이 될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이었는지 잘 안다.) 

 나는 유독 그 강박이 심했다. 20살에는 대학을 가고 남들 다 하는 1년 휴학도 한 번은 하고, 24살에 무탈하게 졸업하기. 학겹 통지를 받아도 기쁘지 않은 학교에 갔으니 학벌 콤플렉스가 있는 건 당연했다. 22살에 휴학 후 복학을 할 때는 진지하게 편입을 고민하기도 했다. 1년만 더 휴학해서 편입 공부를 해볼까. 고민의 결과는? 당연히 해보지도 않고 포기였다. 왜냐고? '남들보다 늦어지는 게 무서워서.' 남들보다 1,2년 늦어지는 거 그게 뭐 그렇게 큰 문제라고 그 때는 그렇게 해보지도 않고 포기했다. 지금은 말하기도 우습지만 그때는 23살이라는 나이가 '늙은' 나이라고 여겨졌다. 물론 나의 좁디 좁은 식견과 바보 같은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좀 억울한 게 그 때 복학하려고 하니 새내기의 학번이 18학번이었는데 15학번(나는 15학번이다.)은 화석 중에도 화석인 암모나이트라는 둥, 23살이면 늙었다는 둥, 주변에서 하도 그런 소리를 해대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23. 참 어리고 귀엽고 깜찍한 숫자다. 그런데 나는 그 숫자가 버거웠다. 새로운 시작은 꿈도 못 꿀 그런 나이라고 여겼다. '몇 살이에요?' 물어보면 가끔 스스로 '저 너무 늙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100세 인생에 23살이면 밤톨만한 크기인데. 참.


 내가 나이 강박을 고칠 수 있었던 건 주변 사람 덕분이었다. 나는 대학생 때는 주변 인간관계가 매우 협소했다. (지금도 협소하다.) 친구는 다 또래 뿐이라서 아는 언니나 오빠가 없었다. 그래서 나보다 나이가 3,4살 정도 많은 사람들이 뭐하고 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유투브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보는 게 전부였다. 문제는 그런 SNS를 통해 보는 사람들의 삶은 화려하고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언니를 알 게 되었다. 그 언니는 나보다 3살 많았는데, 그 언니를 통해서 배우게 된 게 아주아주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세상에 늦은 나이란 없다는 것'이다. 언니는 '저 이제 25살이라 늦은 것 같아요.'라는 내 말을 들으면 항상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너 하나도 안 늦었어.'라고 말해주는 언니다. 말만 해주는 게 아니다. 그 언니는 28살에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그 도전 앞에 망설이지도 않았고, 시작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나는 28살이면 '많은' 나이인 줄 알았는데, 그 언니는 자신의 나이를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늦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설레하는 언니를 보고 있으면 고작 숫자에 얽매여 소중한 도전을 시도도 안해보고 포기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얼마 전 자기소개서 관련 강의를 들을 때에도 강사님은 조급함을 드러내는 내게 '하나도 늦지 않은 나이니 조급해하지 마라.'라고 조언해주셨다. 그 말에 내가 얼마나 큰 안도를 느꼈는지 모르겠다. 



  지금 나는 25살이다. 고작 23년 살아놓고 스스로를 '늙었어요'라고 말하던 허무맹랑한 생각에는 벗어났지만, 문득문득 느껴지는 조급함은 감당하기 어렵다. 이제는 내가 '늦은' 나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사회는 자꾸 나보고 늦었다고 말한다. 자꾸 평균 신입 사원의 나이를 들이밀면서 조급함을 강요하고, 정석적인 길을 보여주면서 조금만 비껴가거나 조금만 늦으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런 얘기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또 그런 생각이 든다. '나 나이가 너무 많나.','너무 늦었나.' 

 물론 좋은 직장에 들어가 목표를 이루고 성공을 하려면 느긋해져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의 말에 휘둘리면서 '빨리 해야하는데' 하며 조급해질 필요는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환상일 수도 있다. 어쨌든 평균 신입 사원의 나이란 정해져있고, 지원 공고 중에는 나이 제한을 두는 곳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사회 분위기라는 것도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늦은 나이'라고 이야기하고 직접 해 본 사람은 '늦은 나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나는 어렸을 때 멍청한 생각으로 멍청한 선택을 했었다. 이제 두번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

 취준생이 된 지 2개월이 지났다. 2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가끔 밤에 불안감이 밀려와 잠이 안 오는 순간이 있다. 이대로 영원히 취업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나는 뭐 해먹고 살아야 하지. 그럴 때마다 되새겨야겠다. 천천히 하자. 천천히. 세상에 늦은 건 없으니까.



 언젠간 취뽀했다는 글을 올리는 그날까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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