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평
이어령의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그가 1963년 8월 12일부터 1963년 10월 24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동일 제목의 에세이를 엮어 같은 해에 출판한 것이다. 에세이로 신문에 연재될 당시 독자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이어령의 에세이를 읽고자 신문을 기다리는 독자가 우후죽순 늘었고, 그 덕에 경향신문의 가판 부수도 증가했다. 연재를 거르는 날엔 편집국에 문의 전화가 쇄도하기도 했다고. 이런 폭발적 반응과는 달리 연재를 마친 뒤 책으로 출판되기까지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기도 하였으나, 출판 후 5일 만에 2천 부를 판매하는 등 기하급수적인 판매부수를 달성하면서 작품과 저자 모두 대한민국 문화 비평계에 센세이셔널한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작품을 향한 당시 대중의 우호적인 반응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시대적 상황을 알면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1960년대는 저항의 시대, 혼란의 시대였다. 전쟁의 후폭풍과 가난, 민족의 분단으로 인한 상실을 극복해야 했고, 산업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세대로의 발전을 동시에 해내야 했다. 또, 4·19 혁명의 정신이 그 이듬해 발생한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후퇴하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거나, 본격적인 근대화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뿌리에 대한 고민과 변화의 태동으로 혼란을 겪던 이들 앞에 등장한 것이 바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이다. 이어령의 독창적인 관점과 호소력 짙은 문장으로 기술된 우리 고유의 문화는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독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재고해보게 하였고, 한국인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당시의 대중들에게 민족적 연대를 느끼도록 하고, 격동의 시대를 살아갈 힘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이후로도 세월을 관통하는, 생명력이 긴 책으로 자리하여 꾸준히 새로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약 57년 전에 쓰여 당시의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이 책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우리 민족의 본질이 포착되어있다. 이것은 그가 애정과 함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세심한 관찰력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논하고자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깊이 공감했고, 내 안에 뭉그러진 형태로 잠재해 있던 한국인에 대한 암묵적 지식이 하나둘 선명하게 모습을 갖추어나가는 걸 느끼며 경이로워했다. 2020년의 내가 50년도 더 전에 쓰인 텍스트를 읽고 이토록 깊이 공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인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불쾌감이 자꾸만 나를 자극했다. 분명 그는 한국인이 읽어 기분 좋을 글을 써놓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가림막 하나 없이 우리 민족의 풍토와 직면하기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수긍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가 기술한 것이 그저 우리 역사와 문화의 심층을 대면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프차”(이어령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신판을 내면서, 맞춤법에 맞게 ‘지프’라 표기되어있던 것을 ‘지프차’로 고쳤다.) 안에 앉은 이어령은 마치 우리 민족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서구의 영향을 받아 ‘근대화’ 된 지식인의 입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우리 민족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가 생각하는 근대화가 우리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방향을 모색하는 방식이 아닌, 서구의 문물과 문화를 수용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고는 거부감이 들었다. 6·25 전쟁을 겪었던 인물이기에, 그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근대화의 바람과 밀려들어오는 서구의 것을 받아들여 안정을 꾀하려 했다는 인과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술하면서 은연중에 서양의 것과 우리 것을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는 모습을 보며 배신감과도 같은 불쾌감이 느껴졌다. 나는 동양인, 한국인인 이어령이 서술한 ‘한국인론’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냄새를 맡았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 고정되고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사실 이 개념으로 이어령의 시선을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다. 모든 주제에 나타나는 양상도 아니거니와, 그가 가진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구의 결실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곳곳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나는 서구로부터 도래한 근대에 권태와 불만을 느끼고 있는 현대인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무시하지 못할 만큼 발견되는, 비교의 기준점을 서양에 둔 채 한국의 문화를 비하하는 표현들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서는 이것이 그의 의식 저편 어딘가에 오리엔탈리즘이 스며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까지 보였다.
이어령은 자신이 목격했던 ‘차를 피할 줄 몰라 앞으로만 도망가는 노인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서문의 운을 뗀다. 그에 의하면 이 노인들은 우리 민족의 지난날을 표상하는 인물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어령의 위치이다. 그는 지프차에 올라타 그 바퀴가 헤집고 있는 시골길 위의 노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 이 장면은 이미 근대를 선각하고 지난날에서 벗어난 지식인이 과거의 몽매한 이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탄식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그의 시선은 위치적으로나 가치적으로나 여러모로 하향적이다. 노인들을 “아스팔트 위의 이방인”과 대조하고, 이어서 그 행동을 “가축과도 같은 몸짓”에 비유하며 우리 민족의 지난날들을 뒤처진 것, 우매한 것으로 보이게끔 묘사해놓은 부분은 그가 과거를 우열하게 보고 있다고 확신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을 ‘철저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한국의 상처를 바라보고자 한 의도’가 깃든 표현방식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미군에 의해 개발된, 문명 발달의 상징 중 하나인 지프차 안에 앉아 포장되지 않은 옛 시골길 위에서 펼쳐지는 노인들의 안타까운 몸짓을 내려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서양문명을 선각한 사람의 자리에서 지난날을 바라보고 있음을 명백히 암시한다. 이 자리에서 과연 그는 노인들을 아픈 우리 역사의 자화상으로만 바라봤을까? 서양에 비해 뒤처진, 가축과도 같이 몽매한, 근대와는 동떨어진 문명의 상징으로 본 것은 아닐까?
이후로도 의구심과 불쾌감은 끊이지 않고 내 가슴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몇몇 대목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서양과 비교하며 열등하고 미발달 된 것으로 치부했다. 그 예로 「군자의 싸움」을 들 수 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의 싸움을 함께 논하며 일본인과 서양인의 싸움은 승부가 확실하고 뒤끝이 산뜻한 싸움이라 하고, 한국의 것은 “미지근하다”라고 표현한 대목이다. 그러면서 “보슬비가 내리다 말다 하는 지리한 장마철, 그것이 한국의 분위기다.”라며 한국의 싸움 문화에 대한 그의 비판적 견해를 밝힌다. 이는 한국인과 서양인의 정서가 정반대의 문화에 속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비교에 중점을 둔 탓에 범한 오류로 보인다. 한국인의 정서와 사회는 ‘우리’를 중시하는 집단주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관계 중심적인 인간관을 갖게 되었다. 개인적인 원망과 목표의 추구는 사회의 조화를 해치기 쉬우므로, 가능하면 자기를 억제하여 양보하고 협동할 것을 추구했던 이들의 특성은 싸움의 문화에도 반영되었다. 한국인들은 단칼에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결투가 아닌, 조화와 합의를 도모할 수 있는 긴 언쟁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서양은 이와 반대되는 개인주의 문화, 개인주의 사회이며 개체 중심적인 인간관을 지녔다. 그래서 개인의 안정을 중요시하고, 이들의 안정이 곧 사회의 안정이라 생각했으며 개인에게 위협이 되는 것을 없애고자 했기 때문에 결투의 문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관계의 안정을 통해 사회의 안정을 도모했기에 서양과 같은 결투 문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렇듯 문화권의 차이는, 인간관의 차이는 물론 행위 규범의 근본적인 차이까지도 불러온다. 그러므로 강한 개인적 정체감을 갖고 선명한 승부를 추구하는 서양인과, 겸양과 협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건실한 관계 안에 자리하는 것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싸움 문화를 비교한 것, 한국의 결투 방식을 미지근하다며 비하한 것은 그 의중을 깊이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또, 여기서 그는 일본과 서양의 영향으로 우리의 싸움이 ‘근대화’ 되었다고 말한다. 이어령이 생각한 우리 민족이 본받아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일본과 서양이었음을 다시 한번 알게 되는 대목이다.
완구의 발달과 아이에 대한 관심을 연결 짓고, 완구가 발달한 서양, 일본과 그렇지 못한 한국을 비교하며 우리 민족이 아이에 대한 관심, 즉 미래에 관한 관심이 없었다고 표현한 「완구 없는 역사」는 내게 무엇보다 진한 불쾌감을 안겼다. 서양, 일본과 비교한다면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엄연히 한국에도 완구는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과거는 잃고 투쟁하는 혼란한 역사의 반복이었다. 또,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이어 6·25 전쟁을 거치며 궁핍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겨우 연명하는 힘든 현실 앞에서 “없는 놈에게 자식이 뭐냐”(이는 강경애의 단편소설 <지하촌>에 등장하는 말이다. 최서해의 경험담으로 쓰인 <탈출기>나 강경애의 <지하촌>과 같은 소설에서 가난과 궁핍으로 인해 아이들을 홀대하던 실상을 엿볼 수 있다.)며 아이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하던 것이 당대의 실상이다. 그러나 현재의 송장 같은 삶이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아이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궁핍을 대물림하게 만드는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려 전선으로 나간다. 그들에게 미래란, 싸워서 쟁취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서양과 ‘완구’라는 기준점을 두고 미래의 비전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하며 우열을 비교한 것은 애초부터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어령은 ‘일본은 지금 세계 굴지의 완구 생산국’이라며 한국보다 우월한 이들의 완구 문화를 찬미하듯 기술해놓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완구 문화의 기반이라 볼 수 있는 민속놀이 문화를 억압한 것은 일본이었다. 놀이를 통해 민족의 기개와 민족의식이 강화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결국 우리나라에 완구가 없었다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이어령의 문장은 너무나 섣부른 단언으로 보인다.
사실 비판의 목소리를 낸 위의 몇 가지 부분은, 책에서 공감하고 감동했던 부분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이다. 그렇지만 감동에 취해 무시할 법도 한, 바늘로 찌르는 정도의 이 불쾌감을 중점적으로 다룬 이유는 이것을 현대인인 우리가 재고하고 다루어야 마땅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령이 비하하듯 언급한 ‘호불호의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민족’인 한국인들도 이제는 뚜렷하게 양분된 가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의 연속인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삶, 즉 근대는 병폐가 드러난 지 오래되었고, 그 폐단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우리 민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선각자’의 위치를 선택했던 1960년대의 이어령처럼, 현세대 청년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는 근대의 병폐를 직면하고 탈피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청년들은 우리 민족의 본질과 성격에 다시금 주목하여 근대 너머에 존재하는 우리만의 근대를 새롭게 탐색할 필요가 있다. 서양의 기준이 스민 관점에서 판단되었던 우리 민족의 특성을 좀 더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으로 다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비판적 시각으로 재해석해본 것은 매우 유의미한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 존경을 담아, 탁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