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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an 22. 2021

마음을 다스리는 일의 시작

그것은 곧 내 꿈의 시작.

초등학생 때 가끔 반 대표로 사생대회에 나갔었다.

그것은 그저 선생님이 나가라 하니 나간 거고, 그땐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지 못 그리는지 관심도 없었다.


중학생이 되고 난 뒤 미술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너 그림 배울 생각 없니? 부모님께 가서 한번 말씀드려봐. 하고 싶으면 선생님 찾아오고."

 

그 날...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내가 그림을 조금 잘 그리나 봐. 선생님이 학원 알아보라는데... 다녀도 돼?"

내 말을 들은 아빠는 그 다음날 집 앞에 있는 커다란 미술학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내게 말했다.

"학원 가봤는데... 너 그림을 꼭 그려야겠어? 학원 값이... 아빠가 내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야. 아빠는 니가 미술을 안 했으면 좋겠어.."


사실 그 말은 내게 큰 상처가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림을 전공하니까, 선생님이 얘기하니까 그냥 막연하게 해 볼까 하던 거였다. 절실한 마음이 없었기에 크게 실망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낙담한 것도 없으면서... 그날부터 나는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았다. 어차피 못할 미술... 끄적여본들 무엇하리.


그 후 특별활동수업, 친구들은 미술반에 들었고 나는 배구부에 들어갔다. 친구들과 미술선생님은 운동장에서 배구 연습을 하던 나를 보더니 "하나야~~"하고 불렀다.

"너 왜 미술반 신청 안 했어? 그림 안 그릴 거야?"라는 질문에 나는 "아... 그냥.. 그림은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서요."라고 얘기했다. 




암환자가 되어 신경쇠약과 불안증세를 겪고 나니 마음이 아주 약해졌다. 아이가 조금만 무너져도 나는 와장창 무너져 내리고 남편이 한소리만 해도 내가 아파서 그런 건가 죄책감이 들었다.

오랫동안 그런 시간을 겪어내고 이제 마음을 다잡으려 하니... 공허했다. 가슴은 이미 동그랗게 뻥 뚫렸는데 이제와 막으려 한들 막아지지 않았다. 마치 뚫린 가슴 안으로 찬바람이 휘휘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채우고 싶었다. 의미 없는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꽁꽁 메꾸고 싶었다. 무언가가 필요했다. 시린 가슴을 채워줄 무언가가, 되찾은 내 시간을 따듯하게 해 줄 무언가가.


그러다 갑자기 미술을 전공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때? 미술은 정서적으로도 좋아서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아! 그림... 내가 시작도 못해보고 끝내버린 그거..

지금이라도 취미로 그려볼까, 심신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하니... 근데 내가 잘 그릴 수 있을까. 꽃 한 송이 안 그린 지 20년이 넘었는데... 근데 뭐... 전공할 것도 아니고.. 한번 해볼까나...


하지만 그림을 배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업주부인 내게 십몇만원의 학원 값은 큰돈이었다. 무언가를 배워서 돈벌이를 할 것도 아니고 단순히 취미인데 이렇게까지 돈을 써도 되나 싶었다.

그렇게 계속 고민을 하다가 남편에게 얘기했다. "나 그림 배우고 싶은데... 한 달에 20만 원은 들어갈 것 같아. 재료비랑 그런 것 까지 하면... 해도 되나..? 근데 이걸로 돈 벌 것도 아닌데 고민되네.."

그런데 남편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자기야... 너 상담센터 다닐 때 한 시간에 10만원 썼어. 근데 미술학원은 한 달에 20이라며. 그니까 그냥 다녀~ 심리센터 다니는 것보다 훨씬 낫네."


그 후 나는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인 미술학원인 화실에 등록했다.

첫 번째 수업이 있던 날, 떨리는 기분으로 원장님을 보았다. 

"하나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일단 제가 알아야 하니까요~ 이거 한번 그려보실래요? 잘 그리실 필요 없어요. 그냥 편하게~ 하나님이 그릴 수 있는 정도만 그리시면 돼요~ 못 그려도 전혀 상관없으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원장님은 어떤 도구를 사용하든 상관없다고 했다. 원하는 대로 그려보라고... 하지만 나는 연필 외엔 아는 도구들이 없었다. 심지어 연필에도 그렇게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원장님은 내게 "그 부분은 4B로 그려보세요~"라고 했지만 나는 사비가 뭔지.. 알 길이 없어서 한참 생각해야 했다. 후에 '아~~ 샤프심 앞에 써져있던 그거~'라는 생각이 나 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나는 무지했다. 관심도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화실은 즐거웠다. 사람들은 내게 '정말 그림 처음 접하는 거 맞냐'고 물어보며 칭찬을 해주었다. 화실 안의 작가들은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게다가 대부분 같은 주부들이라 그들은 내가 주눅 들지 않게 옆에서 끊임없이 응원도 해주었다.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이었지만 화실은 늘 설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아서였을까...

'나는 왜 진작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우리 집이 부자였다면 지금쯤 그림으로 뭐라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과 원망이 들었다.

아빠는 왜... 내 재능을 키워주지 않았을까. 


그러나 화실에 다닌 지 두어 달이 지나고, 그 원망은 이해로 바뀌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돈이 꽤 드는 일이었다. 화실 비용만 내는 것이 아니라 연습할 수 있으려면 나만의 붓과 팔레트, 종이 그리고 물감까지 모든 재료가 필요했다. 거기에 자잘한 용품까지 챙기려니 돈이 꽤 들었다. 전문가용이 아닌 초보용으로 샀음에도 그랬다.

그렇게 관련 용품을 사고 나니 아빠가 내게 그리 말한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물며 예전에는 인터넷도 없었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했을까. 아빠는 정말... 할 수 없었겠구나.


아이가 꿈을 시작하기도 전에 짓밟는 것이 부모로서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나는 내 아이를 통해 알고 있다.

아직 작은 아이임에도 나는 아이의 꿈을 포기시킬 생각조차 못하니 말이다.


아빠는 미술학원을 다녀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심정으로 내게 포기라는 말을 내뱉었을까.




그림을 그릴수록 원망은 사라지고 대신 의욕이 남았다.

'그래, 이제 내가 하면 되지.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니까. 아빠를 원망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어.'


그 날, 나는 그림 하나를 아빠에게 사진으로 보냈다.

"아빠, 나 이제 그림 배운다! 그림이 정서에 좋다대~"

곧바로 아빠는 그 그림을 보면서 말했다.

"아니, 우리 딸이 이렇게 그림을 잘 그렸었나? 열심히 배워. 나중에 아빠도 한 개 그려주라~ 벽에 걸어놓게."


나는 아빠에게 "어"라는 짧은 대답을 보냈지만 마음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가슴의 구멍으로 따뜻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화실에서 처음 그린 수채화. 관련 서적을 보고 그렸다. 처음이라 가장 정이 가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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