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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Jul 15. 2020

소설보다 여름 2020 : 강화길 <가원(佳園)>

"다 옛날 일이다."


 * 본 글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 옛날 일이다.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가 선정한 '소설 보다 : 여름 2020'의 주인공이 공개됐다.


 이번 여름 호에는 강화길의 '가원(佳園)', 서이제의 '0%를 향하여', 임솔아의 '희고 둥근 부분' 총 3편이 수록됐다. 그 중에서도 강화길의 '가원'은 어느 날 화자의 할머니가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화자는 할머니를 찾기 위해 길거리를 헤매다 문득 떠올린 '가원'으로 차를 돌린다.


 소설은 화자의 어릴 적 기억을 따라 그려진다. 그의 기억 속에는 두 사람이 있다. 먼저 할머니는 '무서운 인상을 숨길 수 없는 비쩍 마른 중년 여자'이자, 인간이라면 늘 '밥값'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때문에 화자에게 있어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썩 좋지 않다. 할머니는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는 어린 화자에게 매질을 서슴지 않고, 성적을 잘 받아 왔을 때도 어떤 칭찬보다 "유지해"라는 말만 한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인 박윤보는 어떠한가. 박윤보는 화자에게 '최초의 기억'으로 정의되는 사람이다. 때문에 화자는 어른이 된 이후에도 '끝없이 지속되는 충만한 감정'을 선물했던 그의 흔적을 쫓아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말하자면 박윤보처럼 제 밥값 하나 못 하고 사는 남자들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그런 면에서 화자는 할머니와 비슷한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부당한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을 만나고야만 여자들. 그러나 결정적으로 화자가 할머니와 다른 점은 스스로 그들에게서 벗어났다는 점에 있다. 이는 모두 할머니가 이루어낸 결과물과 다름없다.


 "그래. 정말로 안다. 사실 박윤보는 나의 인생, 나의 삶, 나의 미래를 자신의 무엇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래서 나의 웃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었던 거라는 것."


 화자의 인생이 자신과 같지 않길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이 있었기에 화자는 그녀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박윤보와 같은 남자들과 얽혀도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는 결단력이 있고, 훌륭한 직업을 가져 스스로 밥값 정도는 하는 사람이 되었다.


 강화길은 조연정과의 인터뷰에서 "연정은 무능한 외할아버지도 사랑하고, 냉정한 외할머니도 사랑한다. 하지만 지긋지긋해한다. 같이 있을 수는 없고, 그러나 마음은 가고, 그래서 미칠 것 같은. 그런 관계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 화자는 박윤보가 자신의 피아노 학원 가방에서 학원비를 몰래 훔쳐 갔을 때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이 박윤보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왜 어째서.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이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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