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젤리 Feb 20. 2021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외계인과 사랑할 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 본 글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사랑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지구에서 한아뿐' 주인공 한아는 남자친구 경민과의 오랜 연애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한아는 경민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야말로 다정한 남자친구가 되어버린 경민. 그런 경민에게서 한아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바로 자신이 외계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경민은 어디로 가버린걸까?


경민은 인생에서 한아 말고 너무 많은 것들이 중요한 사람이다. 한아를 혼자 두고 훌쩍 여행을 가버리는 것은 물론, 여행이 끝나면 한아의 텅 빈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여행 썰이나 풀어대기 바쁜 사람. 눈치도 없고, 재미도 없고,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


그럼에도 한아는 경민을 사랑한다. 익숙함 때문일까? 하지만 이 사랑을 오직 한 단어로 정의내리긴 쉽지 않은 일이다. 소화불량 같은 서운함의 원인을 찾으려고 해도 답은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에 한아는 이번에도 이렇게 주문을 외운다. '오늘도 금방 갈 거야. 경민이도 금방 돌아올 거야.'


하지만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경민은 한아가 알고 있던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 분리수거를 하다 말고 별안간 입에서 초록색 빛을 뿜어내는가하면, 한아를 해치는 취객을 향해 거대한 빛기둥을 쏘아대기도 한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상황들에 혼란스러운 한아는 경민으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진짜 경민이 자발적으로 외계인과 '우주 자유 여행권'을 바꾸고 우주여행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지금 한아의 앞에 있는 경민은 진짜가 아닌, 오직 한아를 만나기 위해 먼 우주에서부터 날아온 외계인이라는 사실까지도.


"너는 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내가 네 옆에 있는 바보 인간보다 더 가까울 거라고, 그런데 그걸 넌 모르니까, 전혀 모르니까, 도저히 잠들 수 없었어."


외로움에 혼자 슬퍼하는 한아를 지구 밖에서 지켜본 이후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외계인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그렇게 진짜 경민의 탈을 쓴 외계인은 조금 더 다정하고 따듯한 모습으로 한아의 옆에 머문다. 점점 늙어가는 한아를 위해 주기적으로 인간 수트를 바꿔 입으며 지구에 적응하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그렇게 외계인은 한아로부터 진짜 '경민'이 된다.


소설은 완전히 다른 행성으로부터 날아온 외계인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이 모든 건 진짜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까? 살아온 공간도, 시간도 다른 이 생명체를 받아들이는 일련의 모습들은 우리의 사랑과도 다르지 않다. 외모도, 취향도, 살아온 모든 것들 마저 다른 한 사람의 일부와 닮아가는 것. 결국 사랑은 나와 다른 세계 그 자체를 인정하는 과정 그 자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외계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내가 견고하게 일구어놓은 세계 바깥으로부터, 별안간 '뚝' 떨어져버린 어떤 생명체와 관계를 맺고 가까워지는 것이다. 어느 날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살아온 날들을 당신만의 언어로 말하고, 그 재해석된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려보며 당신의 행성을 상상하는 일이다.


정세랑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점점 더 정교해지고 풍부해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과는 별개로, 작은 사랑 이야기들에서 처음 출발했다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다"고 말했다.


작은 사랑 이야기는 아주 거대한 힘을 가진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도 함께할 것을 약속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부터 진짜 사랑의 얼굴은 나타난다. 이 말도 안 되는 외계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어쩐지 로맨틱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껍데기를 뒤집어 쓴 외계인 일지라도, '다시, 다시 태어나줘'라고 말하는 존재가 있기에 한아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우주 가장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러브스토리의 시작이면서, 끝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박민정 <바비의 분위기>, 복제되는 여성혐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