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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Apr 04. 2021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전하영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될 거야."


* 본 글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될 거야.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베일을 벗었다. 특히 이번 수상작들은 모두 여성 작가들로 이루어져 있어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작품집에는 김멜라의 ‘나뭇잎이 마르고’, 김지연의 ‘사랑하는 일’, 김혜진의 ‘목화맨션’, 박서련의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서이제의 ‘0%를 향하여’, 한정현의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등 총 일곱 작품이 수록돼 있다.


그 중 대상을 수상한 전하영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1985년 필립 가렐의 영화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실제로 해당 영화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에 기대어 출발했다고 밝혔다. 전하영은 “다락방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작은 조명등을 켜놓은 채 잠 못 이루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아마 소설 속 화자인 ‘나’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 화자는 연구소에서 ‘그’와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운다. 화자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인문학 책도 좀 읽는 것 같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가끔은 위트 있는 농담도 할 줄 아는, 그런대로 말이 통하는 상대”다. 때문에 화자는 계속해서 그를 주시하다 문득 그가 누군가를 닮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학교 2학년 때 수강했던 교양과목의 강사, ‘장 피에르’ 말이다.


장 피에르는 화자의 친구인 연수가 제 멋대로 붙인 이름이다. 이유는 “그가 항상 입고 다니는 낡디 낡은 코트가 장 피에르 멜빌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들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장 피에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만큼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나’와 연수는 수업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했는데, 어느 날 화자는 연수와 장 피에르가 꽤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파리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장 피에르를 다시 만나면서 더욱 깊어진다.


“스물한 살짜리를 유혹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에요.”


화자가 연구소의 ‘그’에게서 과거 ‘장 피에르’를 떠올리게 된 건, 아마 이 대목에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유부남인 ‘그’에게는 학부생의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늘 뒤따라 다닌다. 장 피에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유독 연수에게 끈적한 스킨십을 하고, 남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함께 블루스를 추고, 파리로 온 연수를 밤마다 불러내는 사람이다. 그렇게 연수는 장 피에르에게 빠져든다. 화자의 말에 따르면 연수는 “어떤 치명적인 일을 겪은 여자라도 된 것처럼” 군다. 마치 장 피에르가 가진 색에 물들어가는 사람처럼, 어딘가 병적인 모습을 띤다. 그리고 어린 날의 화자는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지칭한다. 자신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화자는 이 모든 것이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장 피에르가 술자리에서 어린 제자들을 만지고, 키스를 하거나 집 앞까지 찾아간 사실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유부남이 된 그는 여전히 젊은 여자들의 뒤를 쫓으며 유혹하고 다닌다. 마치 “연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긴 시간이 지나고, 화자와 연수는 과거의 장 피에르 나이쯤이 되어서야 그때의 모든 것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장 피에르는 결코 ‘사랑’ 따위로 죽지 않는다는 것, 온갖 추문을 둘러싸고도 그는 여전히 어떤 권력 속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그 능숙함에 속아 자신을 쉽게 잃는 젊은 여성들이 많다는 것도.


하지만 조금 더 세월을 겪은 연수는 더 이상 장 피에르의 환상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이미 다른 남자와의 결혼 끝에 이혼을 했고, 장 피에르를 ‘해파리’같은 남자라고 말할 수 있다. 투명해서 너무나 신비로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독침에 쏘일지도 모를 만큼 시커먼 존재 말이다.


하지만 장 피에르를 떠올리게끔 하는 남자는 지금 ‘여기’에도 있고, 꽃다발을 들고 밤늦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린 여자도 ‘여기’에 있다. 아마 화자가 그 여자를 보고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일종의 여성 연대가 아닐까. 하지만 화자는 그깟 ‘개수작’에 넘어가지 말라는 말을 마음처럼 할 수 없고, 다만 시트러스 향을 내뿜는 어떤 남자의 품에 안겨 멀어질 뿐이다.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서 머뭇거리는 화자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시대의 여성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라도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혹은 가까이 다가가면 더 멀어질까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저 멀리 사라지는 또 다른 여자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전하영의 이 소설이 세상에 나왔기에 어떤 여성들은 베일에 가린 것들을 보다 분명한 눈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될 거야. 우리가 겪은 것이 무엇이든.”


연수가 화자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고 보내온 문자는 더욱 가슴 깊숙한 곳에 흔적을 남긴다.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라는 구절에 그어진 연두색 밑줄에서 우리는 낡은 과거와 분명한 현재를 동시에 마주한다. 어쩌면 그 문장은 과거엔 중요한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여성들에게는 더 이상 어떤 진리 따위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오은교 평론가는 “여성은 이제 남성의 간택을 받거나 받지 못하는 두 명의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하는 한 명의 여자로, 남성의 욕망이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행위 주체성으로부터 정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이제 남성의 기준에서 쓰인 모든 문장을 성경처럼 믿으며 헤엄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여성의 목소리로 또 다른 진리를 적어 내려갈 것이다. 연수가 화자에게 보낸 메시지처럼, 여성은 기록함으로써 또 다른 여성을 온전한 자신만의 세계로 초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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