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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Aug 02. 2021

소설보다 여름 2021 : 이서수 <미조의 시대>

"인간을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 본 글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단어, 집.


이서수 작가의 단편소설 '미조의 시대'는 우리의 오늘을 관통하는 작품이다. 화자인 미조는 수영 언니의 추천으로 웹툰과 웹소설을 제작하는 회사에 경리직으로 지원한다. 압박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 미조는 엄마의 연락을 받는다. 재건축이 시작되면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후 미조는 엄마와 함께 부동산을 찾고, 반지하를 포함한 몇 군데의 집을 둘러보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긴 5천만 원으로 괜찮은 집을 고르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사람들의 발에 치여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반지하는 미조에게 현실을 직시하게끔 만든다. 옆집 음식 냄새가 고스란히 넘어드는 집을 보면서 미조는 '더럽고 치사한 종류의 범죄'라고 느낀다. 이때 세 번 연속 반복하는 '이게 어렵나?'라는 대사는 더욱 가슴에 깊게 박힌다. '침해하지 말라고. 그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그렇게 서로의 공간마저 존중하는 게 불가능해진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하지만 미조는 어떻게든 엄마와 함께 살 집을 구해야한다. 때문에 미조는 있으나마나한 친오빠 총조에게 전화를 건다. 총조는 10년째 공시생으로 살며 '생생정보'에 나온 맛집을 방문하는 것이 일이다. 집을 나간 이후 7년째 돌아오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


그런 오빠가 최근엔 중공업 단지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미조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낀다. '멋지니까'라는 이유로 공단을 구경하러 다니는 오빠에게 일침을 가한다. 이런 공단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좋아하라고. 그런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힘들거 아니냐고.


"미조야, 나는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려서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레종과 도림천에 버려져 있다."


이때 공단의 이미지는 수영 언니가 언급한 '가발 공장'과도 연결된다. 산업 단지 풍경 속 가발을 만드는 여성의 사진과 수영 언니의 모습이 겹쳐질 때, 우리는 과거 노동자의 삶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마주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차마 버릴 수 없는 재능이라는 게 있다. 문제는 그 재능을 스스로가 너무 사랑할 때 생긴다. 수영 언니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재능을 잘 알고 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 자본주의 현실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무섭게 착취한다.


미싱을 돌리고 가발을 만들던 오래전의 여성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형태가 변했을 뿐이다. 자신이 진짜 그리고 싶은 그림이 아닌, 무수히 많은 돈을 끌어들이는 '성인 웹툰'의 모습으로 말이다.


수영 언니가 그리던 웹툰의 내용을 끝까지 미조에게 쏟아내는 것은 어쩌면 살기위한 발악처럼 보인다. 이렇게라도 고백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낼 수 없는 상태. 하지만 미조 또한 소주잔을 기울이며 쏟아내는 고해성사를 전부 받아줄 그릇이 없다. 그러기에 미조는 당장이라도 엄마와 몸 뉘일 곳 하나 없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있는 줄도 몰랐던 조용한 식물까지 미워하는 나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작아진 걸까. 여섯 평짜리 반지하 방만큼?"


좁은 집 한 켠에 자리를 자치하고 있는 고구마 줄기에게도 못마땅함을 느끼는 미조는 그 감정을 인지하는 순간 초라해진다. 그러면서 미조는 엄마처럼 시를 쓴다. '고구마 줄기'라고 꾹꾹 눌러쓴 단어는 '무해한 단어'로 다시 읽힌다. 조금 더 넓은 집을 위해 무해한 고구마 줄기마저 잘라내야하는 현실. 미조의 시대는 곧 우리의 시대를 대변한다.


이서수 작가는 작품 속에 자전적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 시대에 집을 마련하는 것은 평생에 걸쳐 고투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에 절망한 마음이 들었다"고 전했다.


집. 보기만 해도 견고하고 단단해보이는 단 하나의 글자. 그 속에 미조와 우리의 자리는 있을까? 어쩌면 누군가에겐 평생 가질 수 없는 유니콘 같은 것이 아닐까? 누울 곳 하나를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는 미조에게서, 가발 공장처럼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수영 언니에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를 쓰는 미조의 엄마에게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하지만 엄마, 우리는 민들레 꽃씨가 아니고 우리에겐 집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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