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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Jul 22. 2023

복수라는 환상, <더 글로리>가 찜찜한 이유

  드라마 <더 글로리>는 통쾌하다. 가해자는 한 명도 빠짐없이 감옥에 가거나, 불구가 되거나, 죽는다. 정의는 복수로 구현되고, 악인은 징벌로 처단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뚜렷하고, 가해자는 절대 회개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반성을 모르는 또 다른 가해자를 벌하기 위한 피해자의 연대로 끝을 맺는다. 이토록 선명하고 촘촘한 복수라니. <더 글로리> 속 학교폭력은 현실로도 번졌다. 때마침 유력 정치인 자제의 학교폭력, <더 글로리>의 현실판 같은 일반인의 사연이 떠오르면서 <더 글로리>의 정의가 현실에서도 구현되는 듯했다.


  <더 글로리>는 우리 사회의 한계를 명백하게 증명했다. 학교폭력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시스템, 자본과 권력으로 은폐되는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드라마를 보며 한동안 정의의 투사라도 된 듯 문동은을 응원했다. 그러나 드라마가 끝나고 난 뒤 학교 속 정의를 세우겠다는 마음은 곧 사그라들었다. 내가 속한 학교는 이미 ‘박연진’과 또 다른 ‘박연진’이 마주하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서로를 가해자로 비난하며 처벌과 징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반성은 사라지고 회피와 책임 전가만이 남았다, 누가 진짜 ‘박연진’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여전히 지속될 학교폭력 앞에서 우리가 마주할 영광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현실에서 권선징악의 세계는 더는 유효하지 않다. 지난해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2만 건이다. 모든 사건은 <더 글로리>를 닮았을까? 그렇지 않다. 언론에 보도되는 전형적인 사건을 제외하면, 학교 내 대부분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규정하기 힘들다. 상대방을 때리면 육체 폭력이지만, 피해자가 먼저 욕설을 했다면? 언어폭력이다. 사건에 연루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에 뒤섞여 서게 된다. 어떤 경우 양쪽 입장을 들어보면 두 입장 모두 고개가 끄덕거려질 때도 있다. 그러나 학폭위의 세계에서는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방식, 그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유일한 논의는 폭력과 폭력의 맞부딪침에서 누가 더 심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뿐이다.


  가해자는 억지로 피해자가 되려고 애쓰기도 한다. 제도가 촘촘해질수록, 처벌이 강화될수록,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은 상대를 가해자로 둔갑시킨다. 최근 심의되는 학교폭력 건수의 50% 이상은 쌍방 가해 사건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는 시도는 불행하게도 자주 성공한다. 복잡한 절차와 규정으로 촘촘한 법망의 세계에, 교육적 판단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는 없다.


  문동은의 복수에는 많은 돈이 든다. <더 글로리>의 복수가 치밀하고 계획적인 이유는 ‘돈’을 매개로 조력자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월급을 주고 ‘현남’을 고용하고, 대형 병원장의 아들인 ‘주여정’은 물심양면으로 주인공을 도와준다. 가해자인 박연진 일당이 본인들의 폭력을 감추고, 덮는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본으로 만들어진 권력이다. 드라마는 학교폭력 문제 해결에 자본과 권력이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은연중 드러낸다. 작가 김은숙은 작품 간담회에서 ‘내 딸이 학교폭력을 당한다면 난 가해자들을 지옥으로 끌고 갈 돈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드라마가 가정하는 계급 격차에 대한 신랄한 상징처럼 읽힌다. 문동은은 가난했다. 그러나 결국 자본과 가해자 집단이 경계심을 느낄 만큼의 지위를 가진 조력자의 힘을 그대로 빌린다. 복수는 복수의 대상인 가해자의 세계관을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그래서 <더 글로리>를 보고 나면 강한 쾌감과 함께 허무함이 밀려든다. 정의로운 마음이 샘솟다가도, 선악이 명징한 자본의 세계 이후의 어떠한 전망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낱 드라마에 무엇을 기대하냐 묻기엔 이 드라마가 세운 ‘정의와 엄벌의 세계’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도 뜨겁다. 이 열망은 학교와 교육을 향해 날선 질문을 토해낸다. 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느냐고. 마치 학교가 학교폭력 가해자를 끝까지 추적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줘야만 할 것만 같다. 알다시피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가 내놓은 대답은 이 지점에서 단순해진다. 교육부가 꺼내든 ‘영광의 세계’는 결국 학교폭력에 대한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강화뿐이다.


  교육부의 논리는 단순하다. 한국 사회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중요하다. 대부분 학생과 학부모는 이렇게 생각한다. 따라서 입시에 성공해야만 한다. 현재 입시 제도의 60%는 수시이며, 학교생활기록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정시에서도 학교생활기록부를 보는 대학이 증가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에 학생의 실수와 잘못을 기록한다면? 입시가 중요한 한국 사회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학교폭력을 저지를 아이가 있을까? 우리 사회는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를 학교폭력의 훌륭한 예방책이자 사후 대책이라 생각한다. 입시 만능주의가 학교폭력 해결을 위한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는 입시 만능주의를 한국 교육의 문제점으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입시 만능주의가 문제점과 해결책의 자리에 뒤섞여 서는 이 아이러니를, 마치 어디서 본 듯도 하다.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논의의 장에서 늘 비켜난다. 전문상담교사를 갖춘 학교는 절반조차 되지 않고, 유일한 학교폭력 피해자 교육기관이었던 해맑음센터는 폐쇄되었다. 가해자에 대한 교육, 피해자에 대한 심리 치유, 방관자에 대한 예방 교육과 같은 교육적 논의가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교육부의 발표와 언론의 헤드라인, 대중의 인식에 남는 것은 오로지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강화’뿐이다. <더 글로리> 속 박연진 일당이 2023년에도 존재한다면 학교생활기록부가 무서워 학교폭력을 멈췄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복수를 마무리한 문동은은 행복할까? 복수의 끄트머리 끝에 ‘신은 결국 자신을 돕지 않는다며’ 자살을 결심하는 모습을 보면 막상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더 글로리> 안에는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 행복하지 않은 피해자, 그 뒤로 가려진 수많은 방관자가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하는 건 눈에 보이는 가해자를 향한 함무라비식 복수뿐이다. 가해 행위에 대한 처벌 은 반드시, 아주 강력하게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외의 것들은 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밟고 지나가야 할 숱한 현실의 파편이 여전히 내 발밑에 가득 깔려 있다. <더 글로리> 속 복수라는 환상이 찜찜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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