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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Aug 03. 2023

휠체어 장애인 없는 저상 버스

  나는 뚜벅이다. 운전면허도 없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애용한다. 시내버스, 지하철, 마을버스까지 안 탄 게 없다. 부산이라는 대도시에서 20년 넘게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니 나름 대중교통 전문가라 할 만하다. 부산 대중교통은 만만치가 않다. 지형이 험해 버스가 마치 롤러코스터 같을 때도 있다. 마을버스는 좀 더 심하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 출퇴근 시간만 되면 지하철도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장애인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마주친 경험이 있을 텐데도 기억에 남지 않은 걸 보면 그 빈도가 낮았던 게 분명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5%는 장애인이고, 이중 절반은 지체 장애인이다. 부산의 경우 장애인 인구 비율이 6.6%라 다른 도시보다도 높다. 20년 넘게 대중교통을 탔으니, 통계학적으로 분명 여러 번 마주쳤어야만 한다. 내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야만 한다. 그런데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건으로 휠체어 장애인이 사망한 뒤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그 시절을 기록한 영화가 최근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된 <버스를 타자>이다. 22년이 지났으니 현실이 많이 바뀌었을까? 다행스럽게도 대부분 지하철 역사엔 위험한 리프트를 대신할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휠체어 장애인들은 지하철 이용을 꺼릴 때가 많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상버스는 여전히 느림보 걸음이다. 부산의 저상버스 보급 비율은 30%다. 심지어 울산은 10%대다. 저상 마을버스는 없고, 휠체어를 태울 수 있는 고속버스는 0.57%에 불과하다. 장애인이 마음 편하게 탈 수 있는 택시는 어떨까? 서울의 경우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리는 평균 시간은 40분이다. 평균임을 고려하면 이보다 훨씬 더 오래 기다리는 장애인들이 많다. 기다리다 취소하는 비율은 통계에 잡히지조차 않는다. 지방은 말할 것도 없다.


  장애인 이동권 관련 수업을 하며 아이들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휠체어 장애인을 본 적이 있냐는 물음에 그 누구 하나 손을 들지 않았다. 2년 동안 가르친 학생만 400명이다. 본 적이 없으니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경험도 드물다. 통합교육을 하면서도 장애와 비장애가 선명하게 분리되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하곤 했다.


  우선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장애에 비친화적이다. 수직과 직선으로 구획된 공간에 모서리는 날카롭고 경사는 가파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특수 학급은 1층의 구석진 자리에 있다. 소통과 교류보다는 안전한 소외를 위한 배려다. 통합교육 강화는 전 세계적 추세지만 통합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각종 충돌과 갈등을 염려하는 탓이다. 특수 학급뿐일까. 2022년 기준 특수교육대상자는 9만 명이지만, 특수학교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2만 7천 명에 불과하다. 중증의 장애를 지녀 고도화된 교육적 지원이 필요하면 특수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한다. 부족하니 학교를 새로 짓겠다고 하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난리다. 특수학교는 혐오시설이라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 밀려 발달 장애인을 위한 ‘서진학교’가 들어서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발달 장애인 부모가 무릎을 꿇었지만, 그 부모의 아이들은 결국 서진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역사를 기록한 영화가 <학교 가는 길>이다.


  학교에서 장애는 가리고 숨기는 게 자연스럽다. 수능 관련 업무를 2년 동안 하며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장애 유형에 따라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능 업무를 담당하는 장학사의 말이 인상 깊었다. 보청기나 확대 독서기 등의 편의를 요청하는 학생과 부모 대다수가 장애가 노출되는 것에 상당히 민감하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보청기가 최첨단 과학 기술로 홍보되지만, 그 보청기에 낙인된 사회적 시선은 마치 옛날처럼 느껴진다.


  많은 사람에게 장애는 소거와 제거의 대상이다. 대학교 1학년 때 황우석 박사는 국민의 영웅이었다. 나는 아직도 황우석 박사가 휠체어를 탄 척수 장애 아동에게 ‘곧 걷게 해주겠다.’고 말하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찬양했다. 나 또한 그랬다. 그의 조작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체세포 배아 복제 기술이 담고 있는 비장애 중심주의를 읽어내지는 못했다. 장애는 언젠가 소거되어야 한다는 담론 위에서 나 또한 당연하게 서 있었다.


  당연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장애 담론은 비장애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과학 기술의 진보와 발전을 찬양한다. 과학 기술이 빚어낸 장밋빛 미래엔 장애가 없다. 유전자 편집과 체세포 배아 복제로 선천적 장애는 예방되고 후천적 장애는 극복된다. 장애가 없는 미래를 꿈꾸는 포부 가득한 생명공학 전공자는 생기부에 단골로 등장한다. 장애라는 결핍을 해소함으로써 누군가의 삶에 정상성을 선물하겠다는 논의는 다정하다. 소수가 아닌 다수의 자리에, 특이한 삶이 아닌 평범한 삶에 누군가를 대등하게 올려놓겠다는 마음도 따뜻하다. 그런데 장애가 소거와 제거의 대상이 될 때 장애라는 정체성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만다.


환상 같은 먼 미래보다 있는 그대로의 가까운 현실에 다가갈 순 없을까. 현란한 과학 기술 대신 현존하는 기술로 세상을 바꿀 순 없을까. 휠체어 장애인이 지하철을 비집고 타는 모습을, 롤러코스터 같은 버스가 천천히 운행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 장애와 비장애가 부대끼고 부딪치면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풍경을 학교에서 보고 싶다. 교실에서 장애를 농담으로 소비하며 함께 웃어보고도 싶다. 무겁게 엄숙하지 않아도 될 날이 우리가 다다를 장밋빛 미래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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