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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Mar 21. 2024

외로움을 메우는 방법

“현미 강정이 아주 맛있어. 한 봉지 사줄까?” 30대 중반 직장인이 과자 하나 못 사 먹을 리 없건만, 엄마는 늘 내 허기짐을 걱정한다. 같이 길을 걸으면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던 군것질거리를 늘 사주려 한다. 나이가 드니 이런저런 음식 취향이 바뀌었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어렸을 땐 강정을 참 좋아했는데....” 어쩌다 보니 현미 강정 한 봉지를 가슴에 안고 집으로 향한다. 당신의 기억 속에 난 늘 과자를 먹는 어린아이에 불과하겠지.

홀로 저녁을 보낼 때가 많았다. 누군가에게 화목한 시간이었을 저녁이 우리에겐 걱정과 슬픔의 시간이었다. 늦은 새벽까지 광안리 바닷가에서 커피를 팔던 엄마는 늘 내 배고픔을 걱정했다. 나를 위해 나를 내버려 둬야만 하는 마음이 내겐 한없는 슬픔이었다. 집엔 늘 단출한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대신 찬장엔 각종 간식거리가 가득했다. “배고프면 꼭 간식 챙겨 먹어.”라는 말이 나에겐 미안하다는 말로 들렸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커피 대신 폭죽을 팔기 시작했다. 폭죽은 민원인들의 신고로 자주 경찰에 빼앗겼다. 혹시나 폭죽이 없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밀린 잠을 버려두고 아침 일찍 경찰서에 가던 뒷모습을 지켜보던 순간들. 나는 엄마를 노동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해방의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주는 생활비가 부족했던 탓이다. 엄마는 어김없이 새벽 늦게까지 폭죽을 팔았다. “더 무리해서 걸으면 무릎의 연골이 닳아 사라집니다. 수술비가 더 들 수도 있어요.”라는 의사의 말이 결국 엄마의 노동을 멈추게 했다. 이후로 노령연금과 내가 준 생활비를 아껴 가며 팍팍하게 살았다. 오르지 않는 월급이 야속할 때가 많았다.

엄마는 뜻밖에 찾아온 여유를 공허하게 보냈다.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쓰냐는 내 물음에 바닷가에 앉아 몇 시간이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쳐다본다고 대답하곤 했다. 우연히 들은 평생 학습 프로그램엔 퇴직 후 여유로운 배움으로 외로움을 메우는 사람이 많았다. 글을 쓰고, 오일 파스텔을 그리고, 서예와 한지 공예를 하는 노인들. 엄마에게도 슬쩍 평생 학습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영 무관심했다. 그즈음 엄마는 외로움이 힘겨워 종종 우울증 약을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공 일자리를 신청했다는 게 아닌가. 집 근처 어린이집에서 신발장을 치우고, 마당을 청소하는 일을 맡았단다. 한 달에 29만 원이나 받는다며 기뻐하는 목소리가 영 달갑지 않다. 오르는 물가를 불평하며 살림살이가 힘들다는 말을 흘려듣지 말걸. 돈을 조금만 더 잘 벌었더라면, 생활비를 넉넉하게 줬더라면. 그 마음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다행히도 어린이집 직원들이 따뜻하단다. 무리하지 마시라고, 힘들면 언제든 쉬시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넨단다. 같이 일하는 분들과 하하 호호 웃다 보면, 어느덧 시간이 금방 흐른단다. 어느 날 들뜬 목소리로 가득한 전화를 받았다. 일이 재밌고 즐겁다며 웃는 목소리가 괜스레 민망했다. “첫 월급 탔어. 엄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선뜻 그러자고 대답하지 못했다. 다음에 먹자고, 엄마나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한사코 거부했을 뿐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배우 윤여정의 인터뷰를 봤다. 47년생인 그녀는 엄마보다 딱 1살이 많다. 진행자가 일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묻자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이 나이에 일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생계 때문만은 아닐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나문희, 박막례 같은 할머니들이 즐겁게 일하며 사는 모습이 눈에 떠올랐다. 그래,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외로움을 메우는 당신만의 방법일 거라며 애써 나를 위로했다.

집에 돌아와 찬장에 넣어둔 현미 강정을 베어 문다. 달큼한 맛이 입에 퍼진다. 문득 주머니에 꾸깃꾸깃 넣어둔 만 원으로 현미 강정을 사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씹을수록 고소한 냄새가 계속해서 입속을 맴돈다. 누군가의 오래된 마음에 밴 향기이려나. 강정을 입에 문 채로 휴대폰을 꺼내 엄마가 좋아하는 맛집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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