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나를 사로잡은 화두는 두 가지다. 첫째로, "정치적 활동성이 없는 삶에 의미가 있는가?" 라는 물음, 둘째로 "수정자본주의 이후 스스로의 자아에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 개인은 어떻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첫번째 물음이 나를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비바 액티바의 개념으로 가져다 놓았다면, 두번째 물음은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과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가져다놓았다. 첫 물음은 비교적 쉽게 귀결을 맞았지만, 두번째 물음은 자아에 대한 사유에서, 무한 세계 안에서의 유한자의 한계, 정답 없는 형이상학으로 계속해서 빗겨나갔다.
책은 프랜시스 베이컨과 실증주의 사조로부터 시작하여 프랑크푸르트학파, 마르쿠제,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지성사를 따라간다. 빌헬름 딜타이 이후 인문학은 역사학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근현대에 와서는 문화사의 형태로 고착되었다. 문화사를 인문학의 저변으로 접해 온 내게 지성사의 개념은 낯설었고, 그만큼 그 기조에 동의하는 것 또한 어려웠다. 지성사는 상부구조 중에서도 사상에 중점을 두며 당대의 사상과 사회가 상호작용하는 궤적을 따라간다.
사회가 사상을 배출하는가? 사상이 사회를 구성하는가? 두 측면이 모두 존재하겠지만, 나는 전자의 비중이 더 크다고 믿는다. 사상은 수많은 신념의 합이고, 개인의 신념에는 사회의 몫이 반드시 존재한다. 나는 한 명의 뛰어난 학자가 사회적 풍조를 넘어선 변혁적인 사상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것이 상부구조 전반을 뒤흔든다고는 더더욱 믿지 않는다. 예를 들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의 긴장이 낳은 사회자유주의 저작이었고, [여성의 종속]은 여성주의의 흐름 속에 사회자유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의 교류가 낳은 저작이었다. 칸트의 선험철학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흄의 경험주의 양자를 종합한 이론으로 그 풍토가 확연히 달랐던 영국과 유럽대륙간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저자 역시 책에서 말하듯이)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은자본가 계급의 급속한 성장 속에서 헤겔의 관념론을 역으로 사유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막스 베버의 사상은 관료주의를 동반한 근대 자본주의에 근간을 두면서 니체의 사상과 닮은꼴을 이룬다.
당대의 정치경제체제와 사회문화가 사상을 낳으며, 사상가 개인은 필연적으로 대치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즉 나는 니체의 '위버멘쉬'나 베버의 '카리스마적 영웅'을 믿지 않으며, 사상적 위대함으로 이루어진 개인이 세상과 유리되어 역사에 등장할 수 있음을 믿지 않는다. 니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허무주의를 주창하며 신학적 권위의 종말을 선언하는 학자는 나타났을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의 지지부진한 논쟁과, 과학기술의 발달, 근대적 이성 숭배가 낳은 개인이다. 마찬가지로, 베버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토대와 상부구조에 대한 마르크스적 인식을 거꾸러트리는 학자는 나타났을 것이다. 다른 사상가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이것은 개인의 사고틀이 사회화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일 뿐만 아니라, 학계가 어떠한 사상을 주목할만한 것으로 선택할 때는 사회 전반의 망탈리티가 작용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나의 주장대로 사회의 결과물로서 개인 사상이 도출된다면,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는 다시 두번째 물음으로 나를 가져다놓는다. 마르쿠제는 [1차원적 인간]에서 소비주의와 물신주의에 의해 취향을 주입받고 그에 자연스레 순종하는 현대인을 비판한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우리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근대적 권력에서 벗어났지만, 그 대신 은근하고 교묘하며 그렇기에 저항조차 힘든 현대적 권력에 의해 세뇌되고 제어된다. 현대의 사회구조는 개인의 자아를 위협하며, 그 속에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린다.
행복을 알기 위해서는 욕망을 알아야 한다. 나의 욕망은 정말로 나의 것인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인에게 이 물음은 어렵기 그지없다. 대답의 끝에 언제나 다다르는 것은 희박한 자아의 확인 뿐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값비싼 시계를 사고 싶고, 멋진 차를 타고 싶다. 출퇴근하는 매일매일에도 여행을 꿈꾸고 먼 해변에서 소비를 즐기며 여유를 만끽하는 나를 그린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정말로 시계를 좋아하고 차를 운전하는 것을 좋아할까? '값비싼 시계와 좋은 차를 소유한 도시인'의 이미지를 선망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여행이 가져다주는 여유를 좋아할까? '해변에 누워 여유를 만끽하는 여행객'의 이미지를 여느 광고에서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나는 인간적 풍요의 충분요건이 자본이라 믿으며, 자본의 획득을 위해 지겹기 그지없는 노동을 감내한다. 모아둔 돈으로 소비를 하는 순간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요컨대 나의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선망한다.이때 두 자아 사이의 위계가 온전히 나의 신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소비를 즐기는 것이 나의 고유한 특질이라고 생각하기엔, 자본주의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소비를 지나치게 선망하고 있지 않은가? 거의 모든 행복이 소비로 귀결되는 삶에서 나는 자발적인 욕망을 얼마나 찾을 수 있는가? 사소한 선호에서부터 시작된 의문은 근본적인 가치체계로까지 번지고, 이내 나는 나에 대한 어떠한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욕망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행복할지도 알 수 없다.
마르쿠제와 푸코로부터 시작한 사유는 데카르트로 이어졌다. 나를 확신하기 위해서, 그가 사용한 방법론적 회의를 적용해본다.데카르트에 의하면, 조금의 의심이라도 가능한 것들을 모조리 배제해가면결국 남는 것은 '사유하는 나'라는 존재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러한 '아'와 '무아'의 경계공간, 아주 조그마한 자아 한 조각에서 관념론을 도입하여 신으로의 믿음으로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관념 그 자체는 형상과 연결짓지 않는 이상 왜곡될 수 없다. 한편 나에게는내재되지 않는 외부의관념이 존재하고, 이는 나 이외의 외부자가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따라서무한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는 것은 무한실체, 즉 신 존재의 증거이다.마침내 그는 신학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한다.
내가 데카르트에게서 얻은 것은 어떠한 결단주의에 가깝다. 자아를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은 무언가 붙들고 나아갈 것이 필요하다. 삶을 살아가는 이상, 특히 정치적 활동성이 있는 삶을 원하는 이상, 어떠한 신념체계도 믿을 수 없다는 허무주의를 견지할 수는 없다. 대신 '신이 죽은' 시대 이후의 인간인 내가 붙들기로 한 것은 신학이 아니라 실존주의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사상은 사회가 잉태하는 것이지 뛰어난 개인이 잉태하는 것이 아니며, 소비주의와 물신주의에 지배당하는 개인은 희박한 자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위버멘쉬'나 '카리스마적 영웅'같은 개인을 기다릴 수는 없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은 요원하다. 그러나 운동량을 유지하면서, 자그마한 변화라도 이끌어내길 희망하는 것을 그만둘 수도 없다. 실존주의자들이 세상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휴머니즘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않듯이, 현대사회의 개인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지성사의 기조를 믿지 않으면서도 사상에 대해 사유하길 멈추지 않는 것, 역사 속 대치될 수 있는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면서도 방향성과 운동성을 유지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의와 권력에의 경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아우르는 육영수 교수님(중앙대학교 사학과)의 저작은 나를 만족스러운 회의와 경계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 책이었다. 책을 읽으며 서구중심주의, 백인우월주의, 남성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밑바탕으로 하여 실증, 이성, 합리의 틀이 세워지고 또 깨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사상과 권력이 빚는 교묘한 협력관계 속에서 개인은 무엇을 신념 삼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쉽게답이 내려지지 않을 물음이지만,답에 근접한 것을 찾으려 노력하는 행위를그만둘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