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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하 May 31. 2020

죽음이란 무엇인가 / 저자 셸리 케이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강렬히 삶을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규정은 부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생각은 결국에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끝난다는 것을.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역사적인 동물이다. 다른 많은 동물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스스로가 유한자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산다. 수많은 선조들이 세상에 존재했다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자신 역시 영원불멸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안다. 역사의 성질이 직선적인지 원형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 속에 나의 삶이 차지할 수 있는 위는 한정되어 있다는 , 그리고 그 위가 매우 작게 느껴진다는 이다. 우리는 수십년의 생 끝에 죽는다. 물론 영혼이나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 기능을 멈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는 죽을 것이고, 나는 흐르는 역사 속에 아주 잠깐 동안 존재할 것이다.


  많은 분량을 영혼에 대한 논증에 쏟고 있으니, 영혼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서구의 영혼-육체 이원론은 소크라테스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사상이다. 서구 사상이 의 모든 사회의 기저 자리매김한 지금, 나의 사고방식 역시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은, 사회적 맥락에 탓을 돌리지 않, 영혼이란 개념 자체가 상당히 매력적이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영혼 개념을 인정하면 지지부진한 뇌과학을 원하지 않고도 인간의 고등적인 사고활동 간단히 설명할 수 있으며, 신과 무한자를 비롯한 불가해한 관념들에 대 갈피를 잡을 수도 있. 무엇보다도  희망적이 다.


-육 이원론이 죽음을 희망적으로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영혼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가 죽을 것을 확실히 알지만 영혼의 운명은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 육체는 감각되므로 유한하지만, 영혼은 감각되지 않으므로 얼마든지 무한하거나 불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저자가 책에서 지적하듯이 감각 가능성이 곧 불멸성으로 이어지는가는 의문해봐야 문제, 또한 불멸성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역시 고민문제이다.


 진행하기 위해 저자의 관점을 미리 밝히자면, 그 전통적 영혼-육체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인간을 이루는 것은 오로지 물리적 실체임을 주장한다(물리주의). 자는 리주의 관점이 인간의 고등의식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내어놓지 못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존재 논증에서 입증 책임은 존재를 주장하는 쪽에 있고, 이원론자들은 영혼의 존재를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과로 저자는 이원론에 대한 가능성을 아예 닫아두지는 않은 채로 물리주의를 고수한다.


나는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확신 있게 부정할 수도 없는 당착적인 지에 놓였다. 이성적 사유가 한계를 맞닥뜨린 상황 이르러, 어쩌면 당연한 수순으로 칸트를 떠올렸다. 칸트의 대표 저작은 모두 비판론으로, 그는 인간 정신 능력의 한계를 상정하여 형이상학에 경계를 그은 최초의 철학자다.  저서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의문로부터 출발. 세계와 영혼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서, 칸트는 그 질문이 대답될 수 있는 것인가를 먼저 물은 것이다. 칸트 이전의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이성에 한계를 설정하지 않은 채로 무한과 유한, 신과 인간에 대해 저마다의 사변적인 논리를 제시했던 것과 구별되게, 그는 인간의 영혼과 자율성, 신의 존재, 세계의 원리 등은 순수이성의 대상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한 형이상학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순수이성의 논증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신앙은 순수이성이 아닌 실천적 영역에 있다.


영혼과 신이 논증될 수 없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문제다.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나는 신과 영혼이라는 두 단어를 병치해두었는데, 둘 중 하나를 믿는 것은 나머지 하나를 믿는 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가지는 것과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믿음에 대한 개인의 성향 면에서도 그렇고, 종교교리들은 종종 영혼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종교는 우주의 직관으로서 무한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이며, 또한 주관적인 체험주의이기도 하다.


나는 영혼이나, 신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을 믿는 삶을 가끔 상상해보기는 한다. 그러한 삶이 나의 것과 비교해서 얼마나 더 확신에 차 있을 것이며, 얼마나 덜 우울할지를. 잠시 다른 책 얘기를 하면, 나는 요즘 정치철학자이자 기독교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의 저서를 읽고 있는데,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 굳이 그의 이름을 불러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인으로서 그가 지니는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책을 통해 니버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인간집단의 비도덕성을 꿰뚫어보면서, 인간 일반이 보다 나은 교육과 종교로 윤리를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는 사회갈등을 해결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그는 저서 내내 날카로운 현실 감각 견지하며, 낭만주의와 종교적 이상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인간 집단의 강력한 이기심을 인정할 것을 주장한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이렇듯 냉정하고 회의적인 그가 결코 신의 실재와 목적을, 그의 선함과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후기 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그는 역사에 의미가 있음을, 또한 그것이 신의 의미이며 의로운 것임을 확신한다. 


내가 니버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바로 온정주의이다. 비단 니버 뿐만 아니라, 내가 살면서 겪어온 종교인들은 인간과 사회에 있어서 현실적일망정 결코 냉소적이 되지는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내가 가진 뿌리깊은 냉소주의가 없다. 냉소주의는 다름 아닌 가치의 부재로부터 오는데, 반면에 종교는 삶에 다양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저자(셸리 케이건)와 같은, 그리고 나와 같은 물리주의자의 숙명은 어쩌면 평생 냉소주의에 저항하려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어떻게 살든 의미 없어 보일 때가 있다. 나는 세상의 많은 부분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모르는 채로 죽을 것이다. 죽음 이후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애써도 내 존재는 역사에 남지 않을 것이며, 만약에 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죽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개인의 삶에 비해 지나치게 거대한 시간 속에서, 가치를 부여하려는 노력이나 옳음의 추구는 부질없어 보인다. 불행하게도 나의 실천적인 이성은 '하느님 나라'도, '내세나 사후세계'도, 하다못해 '육체의 사후 지속되는 영혼'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나는 그러한 냉소적 허무로부터 붙들고 일어날 것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 냉소하면서,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는 나의 오랜 고민 중 하나인데, 어린 시절 삶의 유한함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만족스럽게 결론 맺지 못한 고민이다. 이제부터는 그 고민의 단편을 조금 공유해보려 한다. 몇년 전, 나는 스스로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삶 속에서 어떠한 행복한 순간, 예를 들면 여행 속 절경, 일상의 사소한 기쁨 같은 것을 만나면 항상 하는 생각이 있다. 시간을 멈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우리는 삶의 밀도를 높일 수는 있을망정 삶의 절대적 기간을 연장할 수는 없다.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주어진 유한한 삶 속에서 최대한 많은 의미를 발굴하는 것이다." 삶의 기간을 늘릴 수 없으니 대신에 밀도를 높이자는 말은 얼핏 온당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삶의 밀도를 높이는 것이며, 무엇을 하면 의미를 발굴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없었을지도 모르는 오늘이니 주어진 순간을 소중히 여겨라,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임하라는 말을 숱하게 듣는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많은 감정을 강렬하게 느끼려고 애쓰는 것? 그도 아니면 사랑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인가? 사실, 격렬한 감정에 몰입하는 것은 지속하기 상당히 힘든 상태이며, 지나치게 많은 것에 최선을 다하는 일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그 모든 시도들이 삶의 밀도를 높이는 데에 효과가 없진 않을 테지만,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에 정답이란 없다. 그 질문의 답은 개인의 의지적인 영역에 있지, 명확한 교리적인 영역에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이 영혼을 굳게 믿는 반면 나는 영혼을 도저히 믿을 수 없듯,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이성과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저자는 삶의 가치를 산출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쾌락주의를 소개한다. 쾌락과 고통의 합산을 통해 그 삶이 살 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사회적 영역에 이를 적용하고자 했던 공리주의에 대해서는 비판거리가 많겠지만, 어쨌든 개인적인 영역에서 쾌락주의는 꽤나 명쾌하다. 쾌락의 추구를 넘어 더 고차원적인 삶의 면모를 믿는다 해도, 어찌되었건 인간은 삶동안 고통보다는 쾌락을 경험하길 원한다. 다만 애석한 것은 이 또한 언제나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이론은 아니라는 점이다. 벤담의 양적인 쾌락을 넘어, 밀의 질적인 쾌락을 도입한다면 더욱 그렇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의 사소한 쾌락은 손쉽게 얻을 수 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등 질이 높은 쾌락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쾌락은 사소한 쾌락들을 미루어두고 고통을 인내함으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질 높은 쾌락을 위해서는 당장의 쾌락 대신 고통을 선택해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더 나쁜 것은,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질 높은 성취를 이룰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가지의 쾌락 중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교과서적으로 답을 내리자면, 우리는 두 쾌락을 조화시켜야 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마냥 인내하면서만 살 수도 없고, 질 낮은 쾌락만을 추구하며 삶을 헛되이 흘려보낼 수도 없다.


우리가 세상의 원리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한, 무엇을 질 높은 쾌락으로 간주것인지 역시 믿음의 영역에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의 결말은 스스로의 방향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데에 있다. 연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한 역사적인 개인은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견지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






*주석

-스피노자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규정하고자 하면, 그것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맞닥뜨린다. '푸름'을 규정하고자 하면 무엇이 푸른색이 아닌지를 생각해야 하고, '인간'을 규정하고자 하면 어떤 동물은 인간이 아닌지를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규정코자 할 때는 어디까지가 죽음이 아닌 삶인지를 사유해야 한다. 실제로 저자 셸리 케이건은 책 내내 사고실험을 통해 삶과 죽음의 애매한 경계를 상기시키며, 어디까지를 삶으로, 어디까지를 죽음으로 인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흐르는 역사 속에 아주 잠깐 동안 존재할 것이다.'

당연한 듯이 넘어갔지만, 이는 철학적으로 논란 없는 문장은 아니다. 역사의 시간성만을 강조하는 서술은 현대철학에서 제기된 공간성 개념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시간성의 측면에서도 그것이 '흐르는'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중세의 신학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대한 견해에 따르면, 과거-현재-미래에 이르는 시간이란 그 실체가 다분히 모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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