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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하 Mar 03. 2021

3기니 / 타인의 삶 / 여자 전쟁

저널리즘과 시혜성에 대하여

<3기니> 버지니아 울프 저, <타인의 삶> 수전 손택 저, <여자 전쟁> 수 로이드 로버츠 저

저널리즘; 대중에게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제공하는 활동.
시혜성; 은혜를 베푸는 성질.

     

개인적인 경험으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일 년쯤 된 일이다. 장애와 돌봄, 비당사자성에 대해서 토론하던 중이었다. 나는 장애인권 활동에 무지했고, 따라서 대부분 경청을 했다. 한참 비장애인 입장에서 쓰인 시혜적 언어들에 대해 비판이 퍼부어지던 중에, 한 장애인권 활동가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혜적인 도움조차 필요해마지않을 때가 있다. 시혜적인 관심조차 받지 못해 건강과 생명을 위협받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그가 시혜성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님은 자명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한편으로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대중적 관심은 많은 경우 시혜적이다. 그리고 어떠한 인권운동이 성과를 이루고 계속 이어지려면, 대중적 관심이 절실할 때가 있다. 비당사자의 입장에서 기꺼이 도움을 준다는 태도, 약자를 가엾게 여기고, 스스로의 이권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조력하겠다는 태도에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태도 없이 인권의식이 대다수에게로 퍼져나가는 일이란 너무 요원하지 않은가.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를 통해 인간 보편의 윤리를 자극하고,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가 보편윤리의 실현이라고 믿었던 것, 즉 저널리즘과 사진 언어에 드러난 시혜성을 꼬집는다. 수 로이드 로버츠는 <여자 전쟁>을 통해 치열하게 저널리즘을 수행한다. 세 저작은 근본적으로 인권을 다루며 대중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한데, 세 권의 독서를 끝내고 나에게 남은 의문은 이것이었다. 대체 우리는 ‘시혜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선은 시혜성의 근원을 알아보고자 한다. 책, 저널, 신문의 독자는 대다수가 사건과 멀리 떨어진 한 명의 타자다. 비단 특정한 독자에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당사자가 아닌 그 어떤 인간도, 심지어 당사자일 때조차, 시혜성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시혜성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사회 안에 존재함에서 기인한다. 울프가 <3기니>에서 지적하듯 사회적 지위는 인간의 심성을 재구성한다.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옷을 입은 자들로 존재한다. 인간은 벌거벗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종, 성별, 나이, 직업, 자본……. 열거할 수도 없이 다양한 사회적 층위가 나를 형성한다. 내가 사회적 존재인 이상, 나의 공감성은 상대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내가 절절히 공감할 수 있는 약자가 있고, 그저 조금의 연민만 가질 수 있는 약자가 있다.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 따르면 저널리즘은 시혜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문에 보도되는 전쟁 사진을 통해 -조금 더 현대적이고 일시적인 매체로는 뉴스 영상을 통해- 우리는 언론에 의해 선별된 비극을 목격한다. 그리고 본다는 행위, 일말의 연민과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는 이내 위선적인 만족감과 무관심으로 변모한다. 타자로서 타자의 아픔을 들여다보고서,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그대로 타자로 남아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어떠한 것을 ‘행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공감했고 그래서 감수성 있는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사유했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는, 독자로서 혹은 시청자로서 우리는 사건을 전달받았을 뿐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타자의 고통을 유발한 지구 어딘가의 사건에 대해 말하자면, 그 어떤 상황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손택이 저널리즘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언제나 인류의 무기였다. 역사의 변혁이나 진보의 순간에 언론은 항상 큰 축을 맡았다. 지금도 많은 인권운동의 목적은 약자가 처한 상황을 알리는 것, 관심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대중의 관심 없이 관습에 의한 차별이 해소되거나, 사건이 정의로운 해결을 맞거나, 잘못된 제도가 개선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손택이 지적하려는 것은 많은 경우 우리가 취하는 무관심성과 시혜성, 그리고 그러한 태도로써 우리가 일조하는 차별과 폭력의 되풀이다. 손택은 저널리즘에서의 사진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의 이면을 보여주는데, 현대에 와서 그의 지적은 너무나도 뼈아프다.      


현대는 범람하는 이미지로 점철된 시대다. 이미지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넘쳐흐르고 일시적인 관심을 받은 후 이내 정보의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다. 손택이 저널리즘과 사진을 분석했던 때보다도 더 현란해진 미디어의 시대, 개중 무엇을 믿을지, 무엇에 관심을 기울일지조차 판단하기 힘든 시대다. 인권과 시혜성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면,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의제가 국민청원에 올라가 수만의 동의를 얻고, 페이스북에서 수천의 좋아요를 얻어내고, 트위터에서 수백의 리트윗으로 공유된다. 그러나 시혜적 태도가 작용하는 것은 딱 거기까지다. 그저 관심을 던지는 것까지다.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적다. 나 역시 세상의 많은 의제에 대해서 그러하다.     


보편의 도덕에 실망하자는 말은 아니다. 울프가 <3기니>에서 말하듯, 선험적 윤리학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전쟁 사진을 보고 가지게 되는 불안과 연민은 지극히 온당하다. 칸트가 도덕을 인간 본성의 표현으로 본 것이나 롤스가 ‘옳음이 좋음보다 선행한다’고 말한 것은 분명 인간 보편이 가지는 윤리적 행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스 역시 지적했듯, 사회는 복잡해졌다. 이제는 개인의 윤리준칙만으로 복잡다단한 사회 문제들을 설명하고 풀어나가기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울프의 말처럼 우리는 전쟁 사진을 보고 개인의 도덕을 자극받지만, 손택의 말처럼 그 사진이 우리의 눈에 도달하기까지는 이미 여러 층위의 정치학이 관여했다.      


결국 시혜성에 대해 파고들수록 시혜성이란 필연적이라고 결론 내려지는 듯하다. 필연적으로, 인권운동이 소수자의 권익을 위한 것인 이상 대중은 비당사자이다. 대중은 공감할 수 있지만 진심으로 타자의 입장에 서기는 어렵고, 행동하기는 더욱이 어렵다. 게다가 미디어는 대중의 관심을 공정하게 하기보다는 편향되게 한다.     


<여자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여성운동은 위의 지점에서 다른 인권운동과 차별화되는 면이 있는데, 인류의 반이 당사자라는 특이점을 가진 탓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차별의 세부적인 면을 서로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또다시 시혜성의 함정이 작용한다.      


<여자 전쟁>을 통해, 영국의 언론인인 로버츠는 여성 혐오(mysogyny) 때문에 일어나는 세계 각지의 처참한 사건들을 고발한다. 그는 <여자 전쟁>을 통해 세상에는 강간당하고 살해당하고 배제당하는 너무 많은 여자들이 있다는 것, 가히 전쟁이라고 할 만한 인권 유린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취재로서 알린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삶과,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는 가해를 낱낱이 고발한다.     


<여자 전쟁>을 읽으며 독자로서 느낀 것은 스스로의 시혜성이었다. 물론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울분이 치밀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상실하고 폭력에 휘말리고 삶이 황폐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데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역자 심수미 씨가 지적하듯, 약자를 억압하는 기제는 어느 사회든 닮은 면이 있어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한국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나는 일들과 아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의 시혜성을 곱씹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어 나는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랬다고 해서 그들의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나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여성 혐오에 반대한다고 한들, 혼자 의미가 있다고 자위하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책, 이러한 취재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의 끝에서 나는 첫 문단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한 관심조차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있다는 말을. 스스로의 시혜적 태도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변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널리즘, 특히  로버츠가 행한 것과 같은 저널리즘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결론 내리고 싶을 뿐이다. 그의 취재 이후 어떤 나라의 상황은 바뀌지 않기도 했지만, 또 어떤 나라에서는 바뀌기도 했다. 로버츠가 많은 족적을 남겼듯이, 그의 취재기를 읽은 독자들 또한 일부는 행동할 것이다.      


사회적 존재인 개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것은 정치적인 활동성이다. 단지 문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 행동하려는 노력이다. <여자 전쟁>을 읽고 글을 쓰고 사건을 알리고 후원을 하는 나의 행동들은 분명히 시혜적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행동이나마 멈춰버려서는 안 된다. 멈추어서 안 될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활동성을 띠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중의 시혜성은 필연적이지만, 개인은 그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시혜성은 용납되어야 하는 한편에 끊임없이 경계되어야 한다.      


사족. 글을 끝마치며 또 다른 장애인권 활동가의 말을 떠올린다.‘우리가 하는 것이 인권 운동인가, 이권 운동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속에 인권 운동은 위선과 타협 사이를 위태하게 걸어가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저널리즘이 선별적이듯이, 범람하는 정보들과 이권적 관계들 속에 개인이 스스로의 정의를 관철하면서 정치적 활동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비판과 경계심에 아예 모든 방향성을 잃어버리는 일은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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