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덕하 Jun 06. 2022

임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에 대한 단상

임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에 대한 단상


어쩌면 내 시작은 당신에게서 왔을지도 모른다. 창발하는 우주 속에 최초의 일리야(Il y a, 프랑스어 ‘존재하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 그것은 하나의 개체가 고독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 아니라, 타자와 타자가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몰이해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각자의 현현에서 어떠한 호소를 느꼈던 순간인지도 모른다. 최초의 인간 의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으나, 적어도 타아배제적인 전제성의 이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썼던 몇몇 철학자들은 나와 같은 상상을 했으리라 믿는다.     


내게 레비나스 사상이 처음으로 찾아온 것은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한 짤막한 소개식의 강의였다. 후설과 그의 현상학에 몰두했던 철학자들이 종종 그렇듯, 존재에 대한 그의 철학은 사변적이고 체계적인 근대의 이성 중심 철학에 비하면 다소 인간학적 경험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였나, 유아론적인 이성주의자들이 으레 그렇듯 보편타당한 것에 매달렸던 그 시절의 나는 레비나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도무지 지나칠 수 없는 몇 마디가 내게 와 박혔다. ‘동일자의 자기 회귀라는 방식으로 운동하는 존재의 지평 속에 있는 한, 내가 더 많은 가능성을 지녔다는 우월성은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의 고통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존재의 고통은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세계 내 한계들을 극복하려는 세속적 초월의 욕구를 인간의 근본 욕망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자기 존재에 묶여 있다는 존재론적 제약은 세계-내-역량(세속적 능력)이 더 커지면 극복할 수 있는 장애물 같은 것이 아니다.’ 그의 철학에 매료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초기 저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읽게 됐다.     


책을 읽고 얻은 여러 가지 문장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내 안에서 형이상학이라는 단어의 성질이 바뀐 것이었다. 레비나스를 만나기 전까지, 내게 있어 형이상학은 언제나 출구 없는 긴 터널이었다. 주체와 객체, 세계와 운명 그리고 자유의지에 대한 사유는 나를 언제고 스스로의 얄팍한 이성 속으로 침잠하게 했다.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생각의 터널을 걸어가노라면 상반되는 말을 늘어놓는 철학자들의 서로 다른 주장들이 공허하게 메아리를 쳤다. 어두컴컴하고 종잡을 길 없는 쿱쿱한 터널, 그게 나의 형이상학이었다. 사실,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초반부 역시 내게 또다시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레비나스의 사유, 그러니까 잠, 불면, 음식, 놀이에 대한 현상학을 뒤밟아가면서, 또다시 나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할지 모르는 불신의 터널에 있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존재와 초월 그리고 윤리학을 얘기하면서 내게 긴 터널의 탈출구를 건네었다. 그건 타자였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익명적 존재로부터 출현한 존재자는 전체 존재자들의 그물망 속에 존재를 배열함으로서 의미를 도출해낸다. 주체의 홀로서기가 일어난 후에,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존재에 매여 있다. 우리가 처한 존재자로서의 근본적인 고통이 여기서 드러난다. 존재자의 근본적 고통은, 우리에게 세속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자가 스스로의 존재에 매여 있다는 본질에 있다. 따라서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존재로부터의 초월이 필요하다. 그러나 옷을 입은 자로 사회 안에 존재하며, 세속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욕망으로 삼는다면 이러한 초월적 욕망을 실현할 수 없게 된다. 초월은, 그러니까 존재의 비극에서 벗어나는 것은, 타자에서밖에 얻어질 수 없다. 이때 주체가 본질적 한계에서 벗어나 존재와 다르게 되는 사건, 이것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가 바로 형이상학이다.     


짤막한 요약으로 책의 내용을 대신할 순 없겠지만, 이렇게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타자라는 탈출구를 열어놓는 것으로 마무리되며, 초월에 대한 레비나스의 사유는 [시간과 타자], [타자성과 초월]에서 더욱 전개된다.     


레비나스를 말하기 위해 쓴 글이지만, 그의 사상을 논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하이데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동시대의 걸출한 사상가이자 나치의 전제주의에 협력한 것으로도 유명한 하이데거의 사상은 레비나스의 대척점에 있다. 20세기, 무너져가는 근대의 표상적 이성에서 벗어나 현상학적 사유를 전개한 두 철학자는 금세 충돌했다. 레비나스는 그의 저서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정면으로 반문한다. 존재자에게 존재는 정말로 선물로서 주어지는가? 존재자 없는 존재가 사유 불능의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이성적 범주화에 존재론을 포섭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타자는 공동현존재로서 실존하는 것이 맞는가? 사실 타자와의 관계는 얼굴과 얼굴을 맞댄 관계로, 타자는 내게 윤리학적 명령을 내리지 않는가?     


현존재의 실존을 탐구하는 것을 제일의 과제로 보았던 하이데거와 타자에게서 명령받는 윤리학을 제일철학으로 삼았던 레비나스, 두 사상가는 모두 존재자와 존재가 불협화음을 내는 순간에 주목했다. 구토와 불면 속에서 현존재는 존재와의 긴장을 마주한다.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우리는 주체의 출현 이전의 존재, 익명적이고도 포착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를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탄생, 얽매임과 자유의 시작, 이성의 최초의 순간은 선험적인 실존이었을까, 타자의 속삭임이었을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레비나스로 기우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아무래도 나는 후자를 상상할 때에 더한 확신을 가지므로.


작가의 이전글 3기니 / 타인의 삶 / 여자 전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