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은 보이는 다른 것에서부터의 의미 부여를 말한다. ‘실체’라든가 ‘본질’은 관점적인 것으로서, 이미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그 바탕에는 ‘그것이 내게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있다."
사족.
니체의 진리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한 명의 사상가의 주장이라기보다는, 현대 철학이 맞닥뜨리게 될 필연적인 허무주의였다. 자연과학과 철학은 서로 중대한 영향력을 주고받는데, 현대에 와서 인류는 이성에 대한 여러 도전을 마주한다.
물리학이 거시세계만을 다루었을 때 뉴턴의 고전역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떠한 계가 주어지고 물체의 질량, 속도 등 필요한 데이터를 측정하면 그것의 운동량, 에너지, 여타 모든 역학적 데이터를 측정하거나 계산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계의 운동을 공식화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놀랍고도 이성중심적인 발견은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주의 철학의 근간적 사고방식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분자와 원자, 그보다 작은 입자들의 미시세계가 발견되자 이러한 고전역학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미시세계에서는 어떠한 입자의 위치를 관측하는 순간부터 그것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관측할 수는 없다. 심지어 입자는 관측하기 전에는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것의 존재 확률이 파동함수로만 나타내질 수 있을 뿐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인간은 예측가능성이 없거니와 정확한 측정조차 불가능한 세계, 미시세계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렇다면 미시세계가 아닌 쪽은 어땠을까? 예측할 수 있었던 거시세계로 다시 나아가보자. 20세기, 거시세계에서는 우주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네가지 힘이 발견되었고, 인류는 우주의 팽창을 관측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와 암흑 에너지는 어떻게 작용하여 우주의 팽창을 가속화시키는지, 그 팽창이 가속되다가 빅 크런치를 맞을지, 혹은 열 죽음을 맞을지는 알 수 없었다. 현재의 우주가 형태를 지니고 있게 해주는 힉스 장의 퍼텐셜이 왜 가장 안정적인 상태에 있지 않은지, 준안정 상태의 그것이 곧 붕괴하지는 않을지 역시도 알 수 없었다. 미시세계건 거시세계건 이성의 한계는 명확했다.
그렇게 현대에 와서 예측 불가능성의 세계에 인간은 내동댕이쳐졌다. 비단 자연과학뿐 아니라 복잡다단해진 사회와 종교적 무질서 속에서 니체와 같이 절대 진리는 없다는 주장, 진리의 상대주의가 제시된 것은 필연에 가까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