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와이파이 비밀번호의 비밀
2년 전에 목차를 만들었다.
1년 전에 첫 글을 썼다.
그리고 1년 동안 멈춰 있었다.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각색’과 ‘양심’ 사이에서 오래 고민했다.
무엇보다 도서관은,
생장점이 터진 나무처럼 쉼 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도서관 8주년을 맞으며,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모아보려 한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에세이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조금의 각색이 더해진 기록이다.
작년 5월에 남긴 기록부터 다시 꺼내려 한다.
아주 길고, 조금은 느리게 흐를 이야기다.
칭다경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무엇일까?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가장 자주 들었던 것은 이것이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뭐예요?"
도서관의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20160813.
2016년 8월 13일.
"20160813, 2016년 8월 13일입니다."라고 안내하면
대부분 같은 질문을 덧붙인다.
"도서관 개관하신 날인가 봐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니요, 도서관 와이파이 개통한 날입니다."
2016년 8월 13일,
매사에 변수까지 계산하며 계획대로 살아오던 내게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찾아온 시기였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사무실이 있던 바오롱광장은 거대한 돔 형태의 쇼핑몰이었는데,
천장은 통유리였고, 실외기가 모두 실내에 있어 공간은 온실처럼 뜨거웠다.
나는 늘 무언가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살아왔지만,
이번만큼은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15살 때부터 5년마다 수정했던 인생 계획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보름이 걸렸다.
우리 부부는 2016년 1월 23일 결혼했다.
2월 11일,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연수를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낙상 사고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원래 계획했던 곳은 윈난성 쿤밍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엉켜버린 끝에, 우리는 칭다오로 향하게 되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결정이었다.
7월 12일, 아내와 함께 칭다오 땅을 밟았다.
어떻게든 쿤밍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우리가 가진 짐은 캐리어 네 개가 전부였다.
그렇게 도착한 지 열흘 만에, 머물던 모임의 담당자가 내게 말했다.
"비자 문제로 돌아올 수 없게 됐어요.
대신 모임을 맡아주실 수 있나요?"
이쯤 되면, 신의 개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막막했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유아인 분)이 분이(신세경 분)에게 말한다.
"살아 있으면 뭐라도 해야지."
그 대사가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그래, 삶이 허락되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쿤밍에서 하려던 일을 칭다오에서 하면 어떨까?
나는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을 정한 날,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 재개통이었다.
그날이 바로 2016년 8월 13일.
기사님이 인터넷 선을 연결하는 동안,
나는 이면지에 메모를 남겼다.
5단계 계획
1단계 - 설립, 책 모으기 (개인의 도움)
2단계 - 안정, 자리 잡기 (마을의 도움)
3단계 - 자립, 지속 가능한 도서관 (지역 사회의 도움)
4단계 - 확장, 도서관이 일상이 되기 (칭다오 공공기관의 도움)
5단계 - 완성, 공공도서관 승격 (대한민국의 도움)
2016년 8월 13일.
나는 도서관을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 비밀번호를 물어보는 기사님에게 날짜를 말씀드렸다.
시작은 단순했다.
일주일에 몇 시간만 이용하는 사무실을 일주일 내내 활용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떠올랐다.
"도서관을 만들어보자."
하지만, 주변 도서관을 보니 문턱이 높았다.
같은 교회나 학교에 속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도서관의 주춧돌과 같은 정관에 새겼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무료로 운영하되, 생색내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 초심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현재 도서관은 아래와 같이 4단계를 지나고 있다.
거대한 뼈대 위에 살을 붙이며 나아가는 중이다.
5단계
시즌1 책은 소유하면 짐이 되고 나누면 사랑이 된다(도서관 설립, 2018~2019)
시즌2 따뜻한 책 한 끼와 커피 한 잔의 여유(안정, 동네 사랑방, 2019~2021)
시즌3 다름 아닌 독서의 자유(자립, 마을 회관, 2021~2024)
시즌4 DEEP & WIDE(확장, 일상의 공간, 2024~)
시즌5 공공도서관 승격(최종 목표)
칭다오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도서관이 있다.
작가와의 만남, 청소년 문학 행사, 어린이 북클럽...
많은 활동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칭다오 경향도서관은,
아무리 생각해도 독자들이 만들어 가고 있다.
내 기억이 완전히 휘발되기 전에
그 고마움을 연재와 책으로 남기려 한다.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또 다른 질문에도 답이 되길 바란다.
"어떻게 무료로 운영할 수 있나요?"
"그럼 밥벌이는 어떻게 하세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을 향한
궁금증이자 현실적인 질문들.
이 글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부딪히고 고민한 기록들,
스쳐 지나간 사람들,
그것이 결국 이 도서관을 만들어온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말을 빌린다.
"나는 칭다오에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보름이 지날 때마다 몽상과 같았던 꿈은 현실이 되고 있다.
봄이다.
밤이다.
아직은 바람이 차다.
이어지는 글들이 계절처럼 펼쳐지길 바란다.
2025년 3월 3일, 칭다오에 사는 이방인
향도서관 시즌 0: 20160813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