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 -4-

윗집에 중학교 동창이 살고 있었다

by 우성이의 일기장

3편 : https://brunch.co.kr/@sosim-in/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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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반갑지만 불쾌한 추억들을 곱씹으며 잠이 들었다가 초인종 소리에 깼다. 암막커튼 좁은 틈 사이로 빛이 약간씩 새어 들고 있었다. 터덜터덜 현관으로 나가 문을 살짝 열어보니 위층집 그녀, 그러니까 현지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도우성 맞지? 나 현지야. 중학교 때 같은 반. 기억 안 나?"

"오랜만이네."

"들어가도 되지? 근데 집이 왜 이렇게 어두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지는 이미 몸을 반쯤 현관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현관문을 닫은 뒤 서둘러 암막커튼을 걷었다. 소파 하나 없어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았던 그녀는 식탁으로 쓰고 있는 다용도책상에 가 앉았다. 집을 둘러보던 현지는 거실에 한가득 쌓여있는 이삿짐을 보고 말했다.

"이사 가는 거야?"

"응. 다음 주 월요일에."

"혹시 층간소음 때문에 가는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고, 퇴사하면서 부산에 잠시 내려가 있을까 해서."

"부산? 좋겠다. 고향 안 간지 오래돼서."

"종종 부모님 뵈러 안 가?"

"연락 끊고 산지 오래됐어."

현지는 민감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집이 좀 더럽지? 금방 치워 줄게."

우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다음엔 식탁 위에 쌓여있는 음식물과 맥주캔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싱크대로 옮겼다.

"술 좋아하나 봐?"

술을 즐기진 않지만 ‘보상’에 대해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현지는 자신과도 한 잔 하자며 냉장고를 열고 그 자리에서 바로 맥주를 한 캔 따서 마셨다. 대낮부터 무슨 술이냐고 다음에 마시자고 했지만 현지는 “다음에? 너 이사 간다면서.”라며 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친구는? 괜히 오해받고 싶지 않은데."

"친구 만나러 가서 괜찮아. 것보다 맥주가 몇 개 없네.”

현지는 마시다 중간에 사러 가면 흐름이 끊기니 지금 맥주를 사러 가자고 했다. 내가 사 올 테니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안주도 고를 겸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현지는 주방을 뒤지더니 빨대를 하나 찾아 맥주 캔에 꽂은 다음 현관으로 나가 빨리 나오라고 내게 손짓했다.

"맥주는 놓고 가면 안 될까?"

"덥잖아. 마시면서 갈래."


편의점이 멀리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골목골목을 제법 돌아 나가야 했다. 골목길에 앉아 있는 어른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죄다 현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괜스레 짜증이 나 현지에게서 맥주캔을 빼앗은 뒤 내용물은 하수구에 버리고 캔과 빨대는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현지는 왜 아깝게 술을 버리냐며 투정을 부렸다.

띠리링-

현지의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잠깐 편의점 가고 있어."

현지의 통화를 가만 듣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남자친구는 현지의 외출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혹시나 감시당하며 억지로 붙잡혀 사는 건 아닌지 걱정돼 통화가 끝난 뒤 현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남자친구가 너 외출한 거 알고 전화한 거야?"

"응. 요즘 그런 앱 있거든. 위치 확인할 수 있는 거."

"뭔가 감시당하는 거 같아서 별로지 않아?"

"그건 그런데, 나도 얘 어딨는지 알 수 있으니까.”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내 일이 아니라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계라는 게 또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말 나온 김에 나도 써보라며 내 휴대폰에 위치확인 앱을 설치해 주었다. 그다음 서로의 휴대폰에 뜨는 QR코드를 찍더니 다 됐다며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액정 위엔 나와 현지를 나타내는 동그란 얼굴모양의 아이콘이 지도에 둥둥 떠있었다.

"너 근데 싸움 잘해? 어제 안 쫄더라. 보통 사람들은 되게 무서워하거든 내 남자친구."

"운동을 오래 해서."

"네가? 의외네."

현지는 위아래로 나를 훑었다.

"내 바운더리를 지킬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아서. 여자친구라든지."

"여자친구 있어?"

"지금은 없어."

현지가 피식 웃었다.

편의점에 도착하자 현지는 동그란 일회용기에 담겨 있는 어묵 두 개를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두 개를 전부 골랐다. 그리고 구슬아이스크림 몇 개와 맥주를 바구니에 담았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로의 삶에서 부재했던 시절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듣는 내가 무안할 정도의 수위로 가감 없이 과거의 일을 전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술집을 전전했으며 중절경험도 있다고 했다. 조폭이었던 과거의 남자친구는 손버릇이 나빠 폭력을 일삼았으며 현지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그러다 오사카 어느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그 가게에서 아가씨 관리하는 사람과 눈이 맞아 한국으로 들어왔고 그 사람이 지금의 남자친구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듣고 두 가지에 대해 놀랐는데, 하나는 그녀가 이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이겨냈다는 것이었고 둘은 그녀가 여전히 그 굴레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맥주로 마른 목을 축인 뒤 일본에서 귀국 후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할 때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이거 혹시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니?" 하며 내게 물었다. 사실 개 짖는 소리는 아까부터 나고 있었는데 얘기에 집중하느라 몰랐던 모양이다.

"아까부터 짖고 있었어."

"그래? 생각보다 크게 들리네. 너 스트레스 많이 받았겠다."

현지는 팔자에도 없는 개를 키우느라 본의 아니게 나에게 스트레스를 준 것 같다며 사과하고는 ‘해피’를 입양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 줬다. 현지 말에 따르면 해피는 안락사 위기에 놓인 유기견이었다. 노견에다 앞도 잘 보이지 않아 아무도 입양하려 하지 않았고 이대로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며칠 내로 안락사 행이었다. 막 행복마을로 이사 왔을 무렵, 인스타그램에서 해피에 관한 게시글을 보게 된 현지는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입양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일산까지 가서 해피를 데려왔다고 했다.

“어쩌면 눈이 안 보이는 게 강아지 입장에선 다행일 수도 있겠네. 주인이 바뀐 줄 모를 테니까."

"그래도 강아진데 냄새로 알지 않을까?"

"그건 그렇네. 그래도 지금 옆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하지. 안 보인다고 버릴 주인이었으면 딱히 좋은 환경에서 살진 않았을 거야."

그녀는 요즘 기술이 좋아져서 원격으로 강아지 밥도 주고 주인 음성도 들려줄 수 있다고 했다. 현지는 반려견 관리 앱을 켜 해피에게 밥을 내려주고는 '엄마 금방 갈게'하고 말했다. 아무래도 해피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불안장애가 있는 것 같다는 말도 했는데 가끔 오래도록 짖어대는 게 그런 이유에서였나 싶어 해피가 안쓰러웠다. 해피는 밥을 먹는지 짖음을 멈췄다.

"너무 내 얘기만 했나? 넌 어떻게 지냈어?"

"평범하게 지냈어. 보통 사람들처럼."

"보통 사람들처럼 어떻게? 내 주위엔 보통 사람들이 없어서."

현지는 양손을 식탁 위에 교차되게 올려놓고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우선 고등학교 졸업하고 성적 맞춰서 대학교 갔다가 공무원 준비한다고 노량진에 4년 정도 있었어. 그러다 결국 공시는 접고 고향 내려갈까 하다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무슨 회사인지도 모르는 곳들에 죄다 원서를 넣었는데 어느 미디어마케팅 회사에서 면접 보라고 연락이 온 거야. 그래서 면접 보고 3년 정도 다녔는데 정리해고 당하면서 여기 집도 빼게 된 거야."

"대학교는 어디 다녔는데? 너 중학교 때 공부 잘했었잖아."

내 기억이 맞는다면 현지는 학원 다닐 때 나보다 더 상급반이었다.

“한국대학교 다녔어.”

“거기 유명한 대학교잖아. 대단한데? 미팅도 해 봤어?”

미팅이라는 단어를 듣자 예전에 만났던 여자친구 혜정이가 떠올랐다. 친구를 대신해 나갔던 미팅에서 혜정이와 사귀게 된 얘기와 치킨집에서 순살치킨을 주문한 것 때문에 싸움이 커져 헤어지게 된 얘기를 해줬더니 무척이나 재밌어했다. 군대에서 만난 고문관 이야기와 노량진 스터디에서 만난 금수저 이야기는 마치 유명한 단편소설이라도 되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주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깔깔 거리며 얘기를 듣던 현지는 "근데 너 꿈 떡볶이 장사 아녔어?"하고 뜬금없이 물었다. 갑자기 무슨 얘긴가 싶어 현지에게 되묻자

"너 초등학교 때 나랑 짝꿍 한 적 있잖아. 그때 장래희망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네가 분명 떡볶이 장사라고 적었거든."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하도 희한해서 기억하고 있지. 누가 장래희망을 떡볶이 장사라고 해."

현지가 옛날 얘기를 꺼내자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당시 나는 동네에서 평양할머니라고 부르는(아마 6.25 때 부산으로 오신 것 같다)할머니의 분식들, 특히 어묵을 좋아했고 이 맛은 전 국민이 마땅히 알아야 할 맛이라고 생각했었다. 미술학원 끝나고 먹는 평양할머니의 어묵과 호떡은 마치 직장인이 퇴근 후 마시는 생맥주처럼 하루의 고됨을 시원하게 날려주었다.


이사를 위해 두 달가량 고생한 이야기를 끝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담배를 피우고 온다는 현지에게 혹시 전자담배라면 그냥 집에서 편하게 피워도 괜찮다고 말했다. 집주인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예의가 아니라며 거듭 거절하는 현지에게 매달리다시피 흡연을 강권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전자담배를 피우며 바닐라 향이라 이상한 냄새가 나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얘는 천안에서 뭐 하는 거야."

현지는 아까의 위치확인 앱으로 남자친구의 위치를 확인하는 듯했다. 나는 식탁을 대충 정리한 뒤 유튜브에서 적당한 음악을 골라 틀었다.

"아이스크림 먹자."

현지의 요청에 구슬아이스크림을 가져다주었다. 현지는 연보랏빛의 구슬아이스크림을 몇 입 먹더니 맛이 없다며 내 것과 바꿔먹자고 했다.


요즘은 뭐 하냐는 질문에 현지는 인터넷 쇼핑몰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약간의 호들갑을 떨며 자사 앱을 켜 옷들을 보여줬는데 전부 여성복이어서 그 옷이 그 옷 같았다. 모델 얼굴은 블러 처리되어 있었으나 문신으로 보아 현지였다.

"적당히 벌어먹고는 있는데 1년째 매출이 안 늘어서 걱정이야.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는 느낌?"

"SNS 쪽은 활용하고 있어?"

"인스타그램은 쓰고 있는데."

"유튜브도 활용해 봐."

전공은 아니지만 예전 미디어마케터로서의 경험을 살려 주제넘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현지에게 해주었다. 마침 해고당하기 전 마지막 프로젝트가 의류쇼핑몰이어서 적절한 조언이 가능했다. 다만 얼굴 노출에 부담감이 많아 보였는데 예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그리 깨끗하지 못해서 그런 듯했다. 현지는 내가 던져 준 몇 가지 아이디어 중 애견의류사업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한창 열을 올려 아이디어를 뱉어내고 있는데 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지는 아무래도 이젠 가봐야 할 것 같다며 내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다. 현지 휴대폰에 내 번호를 찍어주자 현지는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는 401호로 올라갔고 나는 이틀 후 부산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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