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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rmycanada Oct 14. 2022

고요한 그린

federal store, Vancouver, Canada 





끊임없는 물의 일렁임을 넋 놓고 쳐다본 적이 있다. 무수한 빛이 부서져 눈을 향해 돌진하는데도 실눈을 뜨고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귀에는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미세한 유리알들이 와르르 웃으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세상 속을 헤엄치며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머리 위로는 유리알 보석들이 굴러다니고, 손가락과 머리카락 사이로는 부드러운 액체가 흐르고, 중력은 약해져 온몸이 붕- 떠버리고, 반짝이는 기둥이 되어버린 햇살의 주변을 맴돌며 따스함을 만끽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니까, 산책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하루를 잘 보내고 싶을 때는 무작정 산책을 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걸음마다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LP store, 빈티지샵 같은 보물 같은 행선지를 넣어두기도 한다. 힘차게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튀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이기도 하다. 아파트의 로비를 내려와 정문을 활짝 열고 작은 돌계단 몇 개를 내려가는 순간 부드러운 물결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듬직한 나무 아래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오늘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택했다. 대충 머릿속으로 지도를 익혀 두고, 길을 잃기 전까지는 지도를 보지 않는 것으로 규칙을 정했다. 







밴쿠버의 이맘때는 고요한 그린으로 가득하다. 채도가 한 톤 낮고 무거운 초록색을, 나는 ‘고요한 그린’이라고 쭉 생각해왔다. 사람으로 치면 깔깔거리는 말괄량이보다는 두툼한 가디건을 입고 커피를 마실 것만 같은, 식물로 치면 가볍게 바람에 살랑거리기보다는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후드득 비를 맞고 있을 것만 같은, 악기로 치면 우아한 피아노보다는 느린 기타 연주 같은, 그런 그린. 







일부러 멋을 내려고 한 것은 티가 나기 마련이다. 맞춰진 직선, 각본과 가구에 연출된 공기는 묘하게 속내를 감춘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다. Federal store는 정반대다. 덥수룩한 덩굴에 오래전부터 가려져 마침내 고요한 그린에 잠식되어 버린 간판,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한 공간에서 마침내 부부처럼 맞춰진 가구들, 비스듬한 길거리에 투박하게 놓인 나무 테이블, 서로를 향하지 않고 풍경을 향해 있는 의자가 그렇다. 나는 왠지 소박한 가족이 정성스럽게 가꾼 남의 가정집에 들어간 것처럼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더운 걸음을 식힐 시원한 커피와 앙증맞은 얼그레이 컵케이크를 주문했다. 가만히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으스스할 것을 알면서도 비스듬해 한쪽으로 쏠린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읽기 위해서 가져온 책도 꺼내지 않았고, 쓰기 위해 가져온 노트북도 열지 않았다. 내가 있는 그늘 옆의 반짝이는 햇살 기둥을 바라보았고, 마주 앉은 나무가 사근사근한 모습으로 바람을 타고 있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잎사귀 사이로는 유리알 보석이 와르르 웃는다. 그러니까 산책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나 말고도 테이블에 커피만을 얹은 동네 주민들이 오손도손 모여 이렇게 가을을 감상한다. 고요함 속에 비로소 이런 시간이 절박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목이 말랐던 나그네처럼 가을을 맘껏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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