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Safari와 페이스북 마켓플레이스는 온통 부동산 매물로 가득 차 있다. 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남의 집을 힐끔거리며 스크롤을 내리는 것이 언젠가부터 습관이 되어 버렸고, 덕분에 밴쿠버의 구역별 집값이나 렌트비를 줄줄이 읊을 수도 있을 정도가 되었다. 누군가 ‘가장 저렴한 방을 찾고 싶어요.’라고 요청하거나 ‘가장 접근성이 좋은 아파트를 찾고 싶어요.’ 혹은 ‘가장 안전한 곳에 살고 싶어요.’라고 한다면 단번에 적확한 구역을 알려 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그 사람의 퍼스널 컬러를 찾아 안색을 밝혀 주듯 그들의 수요를 환하게 밝혀 줄 매물들이 내 머릿속엔 줄줄이 있다.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집착이 시작된 시점은 해외 생활의 설렘이 결국엔 무뎌졌던 시점과 맞물렸다. 눈치 보기로 가득한 긴 하루의 끝에서 마음은 늘 갈망했던 것 같았다. 서툰 언어의 끝에 몰려오는 자괴감, 문화적 피로감, 서로를 향한 은근한 선입견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아주 단단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로 퇴근하고 싶다고. 타인의 기분이나 생각이 단 한 점도 흘러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에서 꿈조차 꾸지 않는 캄캄하고 고요한 휴식을 마음껏 취하고 싶었다. 시간에 상관없이 배고픈 나를 대접할 수 있는 부엌과 언제고 찾아와도 좋을 손님을 위한 여벌의 실내화가 있다면 좋겠다. 크기는 상관없었다. 작으면 아늑해서, 크면 수납공간이 많아 좋을 것 같았다. 결국엔 그런 은밀한 상상이 매일 밤 침대에서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는 속물적인 취미가 되어 버렸다.
이 도시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공간을 렌트하며 살고 있다. 캐나다에는 전세라는 개념이 없기도 하고, 집값이 세계 2위에 달하는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사는 와중에도 집을 ‘빌려’ 산다는 개념은 어쩐지 안정이라는 기분을 앗아간다. 그 옛날 내 집 마련에 열심이었던 엄마가 생각났다. 그리고 결국 끝없는 대출을 받아 그 꿈을 이루었을 때 엄마는 아직 다 지어지지도 않아 안이 훤히 비추는 벌거벗은 콘크리트 건물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삭막하기 그지없던 콘크리트를 눈에 가득 담고 꿈꾸듯 보고 있던 엄마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고 이곳저곳 몸 뉠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이 진절머리가 날 때쯤 비로소 깨달았다. 비범한 연봉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평범한 안정은 꿈과도 같다는 것을.
이사할 시기가 다가올 때면 나는 어김없이 가장 암울했던 ‘그 집’을 떠올려야만 했다. 반지하 방, 환풍기가 있었지만 창문이 없었고 화장실을 가려면 3층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집주인 부부가 머무는 안방의 바로 아래에 있어 그들이 싸우는 소리며 걷는 소리가 고스란히 다 들렸고, 부엌은 6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용으로 쓰다 보니 식사 시간에 맞춰 밥을 먹는 일이 드물었다. 그럼에도 그 집을 선뜻 계약했던 이유는 시세보다 약간 저렴한 렌트비 때문이었다. 꽤나 편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어쩐지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불을 끄면 시간을 짐작할 수조차 없고 알고 싶지 않은 타인의 사생활이 흘러 들어오는 그 방을 떠올리면 자주 무덤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업을 마치거나 퇴근하고 나서는 최대한 집에 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늦게까지 문을 여는 카페에서 크로아상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일이 잦아졌고 피곤함은 더해져만 갔다. 곤궁한 공간이 한 인간의 일상을 지배하는 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사철마다 구태여 불쾌하고 묵은 기억을 떠올리는 이유는 자신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돈 몇 푼을 위해 자신을 그렇게 대접하지 말 것.’
더러 좋은 집들도 있었다.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아 시끄럽고 좁았지만 매일 밤 도시의 야경을 선물했던 집. 1층이라 풍경은 없었지만 바다와 가까워 산책이 기다려지는 집도 있었다. 어쩌면 8년의 해외 생활 중 7번의 이사는 나의 취향을 찾아 헤매는 의미 있는 탐색 행위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사 계획은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러웠고 2주 안에 넉넉지 못한 연봉 안에서 최고의 장소를 찾아야 했다. 꾸준한 이사를 통해 취향은 확고해졌으나 불행히도 내게는 그 모든 요건을 충족할 만한 비범한 연봉이 없었다. 집을 찾는 사이트에서 예산에 맞게 월세의 가격을 조정하고, 직장과 너무 멀어지지 않게 지역을 조정하고, 이런저런 조건을 넣다 보니 사이트가 띄워주는 매물의 개수는 0이 되어 버렸다. 아무런 매물도 없는 텅 빈 화면을 보고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7번의 실패와 시도를 통해 갖게 된 것은 ‘확고한 취향’이 아닌 주제를 모르는 ‘까다로움’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며칠간 불안정한 마음으로 보금자리를 찾아 헤매며 과연 안정감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캐나다에 살면서부터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기분이었다. 비자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벗어나 영주권을 갖게 된다면, 침술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면, 일할 수 있는 클리닉이 생긴다면, 수입이 일정 수준이 된다면 마침내 도달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안정이라는 기분은 내게 쫓기듯 달아났다. 어쩌면 마침내 나만의 집을 가지게 되어도 결코 갖지 못할 기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난 그냥 그날 내가 잠드는 곳이 집이라고 생각해.”
나의 하소연에 D가 말했다. 마침 D는 아파트 관리인과 사소한 트러블이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 밖에서 나온 말은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캠핑을 좋아하는 그녀는 숲속 한켠에 텐트를 치고 잔다면 그날은 그 텐트가 집이라고 덧붙였다. 매일 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자는 D가 한없이 부러워졌다.
일이 끝나면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이 루틴이 될 때 즈음, 첫 인상이 가장 좋았던 집과 계약을 했다. 직장과 멀었지만 월세에 비해 꽤나 넓었고, 동네는 수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익숙한 가구를 들이고 산책을 하며 주변 환경에 적응해 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안정이라는 기분을 느끼기 힘들었다. 다만 포근함을 맛보는 순간들을 맞이했다. 넓어진 부엌에서 여유롭게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는 순간. 빛이 방향을 바꾸는 시간에 맞춰 창문을 열고 몬스테라와 함께 빛을 가득 마시던 순간. 바스락거리는 이불에 누워 섬유유연제 냄새를 맡으며 잠드는 순간 같은. 내일을 향한 걱정과 출처를 알 수조차 없는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 순간도 분명히 존재했다. 침대에 누우면 다음 달 월세를 걱정했고, 진료 예약이 없는 날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고, R과 L을 헷갈려 이상하게 발음한 단어가 떠올랐고, 이해하지 못한 동료의 농담을 곱씹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과 근심은 공간을 가리지 않았다. 단단하지 못한 나라는 틈을 무던히도 비집고 들어왔다.
언젠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무기력 없이 받아들이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자신과 세상에 책임지는 과정.’이라는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그건 자가를 가지고 공간을 통제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과는 몹시 상반되는 사실이자 D가 삶을 대하는 자세였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내 안의 연약한 새싹 같은 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외줄로 자꾸만 나를 몰아세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 온전한 공간의 소유가 주는 평온함을 우리는 무시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내 안의 연약한 새싹에게 평온한 찰나를 쬐어 주며, 침대맡에서는 고된 삶을 기어코 밀어내는 단단함을 길러 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