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
얼마 전 책을 빌렸다. 빌렸다기보다 빌림 받았다(?)
갑자기 내게 책을 주더니 말했다.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오면 돌려주세요.’
만약 안 가면요? 그럼 안 돌려줘도 돼요.
책은 한 번도 펼치지 않은 듯 구김도 자국도 없었다. 방금 산 것 어떤 뜨임 하나 없이 평평했다. 분명 읽지 않은 책이다.
안 돌려줘도 된다니. 읽지 않을 책을 샀다는 말인가?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었던 걸까?
유럽에서 생활한 지 반년, 출장과 휴가로 어느덧 7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중에 프랑스는 없었다. 뭐랄까. 프랑스는 꽤 호불호가 갈리는 듯했다.
여행을 막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건이 좋은 만큼 심심하면 비행기표를 끊는 나는 과소비를 막기 위해 룰을 정했다.
‘혼자 가는 여행을 자제할 것.’
사실 유럽의 풍경은 아주 예쁘지만 어디를 가도 대부분 비슷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큰 도시는 멜버른의 모습과 비슷했고, 작은 도시는 라트비아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고, 휴가를 내고 가기에는 너무 지치는 활동이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티켓을 끊지 않도록 저런 룰을 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여행한다면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보다는 좀 덜 유명한, 다른 나라를 가고자 했다. 저런 나라들은 지인들이 놀러 올 때 반드시 가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프랑스는 인기가 없었다. 동료들과 (그들의 선택으로) 영국을 가기도 하고, 언니가 방문했을 때는 독일과 이태리를 여행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여행지로 선정되는 일은 없었다. 왜일까?
‘프랑스 가고 싶어!’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언니는 프랑스를 여행했던 경험이 너무 안 좋았다며 반색했고, 주변 사람들은 되레 너무 유명한 여행지라 이미 다녀온 후였다.
어째서인지 내 주변 지인들은 프랑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과 이태리는 다녀오고도 다시 가고, 또 가고 싶어 하는 반면 프랑스를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나도 반년이 되도록 프랑스를 갈 일이 없었다.
독일 이태리 프랑스.. 유럽에 유명한 나라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나라. 가보지 않은 나로서는 무척 궁금했다.
게다가 프랑스는 음식부터 문화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가진 게 너무 많은 나라다.
궁금하다. 왜 이렇게 호불호가 갈리는지. 그렇게 치안도 사람들도 별로인지. 마카롱과 바게트는 그렇게 맛있는지.
그래서 티켓을 끊었다. 처음에는 곧 있을 공휴일을 끼고 휴가 없이 2박 3일을 여행하려 했다. 그런데 표가 너무 비쌌다.
그래도 이왕이면 따듯할 때 여행하고 싶어, 결국 휴가를 내고 11월 초에 여행하는 3박 4일 비행기를 끊었다.
당장 2주 뒤 일정이었다. 프랑스에 갔으니 바게트도 먹고, 디저트 맛집도 찾아다니고 에펠탑도 한 번은 가보고..
아웃렛이랑 백화점도 가야 하고 스타벅스(프랑스 스타벅스가 예쁘다 하여)도 가야 한다. 정말 시간이 많으면 디즈니 랜드도..?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센느강을 걷고, 커피를 마시며 책도 보고 싶다.
여유로운 여행,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은 일정. 이 모든 걸 다 할 시간은 없다.
아웃렛과 백화점, 부티끄들을 돌아다니려면 이틀을 꼬박 써야 했고, 에펠탑, 박물관, 몽마르트르 언덕 같은 관광지를 보려 해도 이틀은 꼬박 걸릴 듯했다.
센느 강을 걸으며 책이나 읽고 낮잠이나 자다 푸아그라와 마카롱을 먹고 저녁에는 와인을 마시며 잠드는 여유로운 시간도 필요하다.
이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쇼핑을 포기하거나, 여유를 포기하거나.
하지만 곧 친구 생일인데, 한국에 가기 전에 프랑스를 다시 올까?
그러고 보니 한국행 비행기는 아직 4개월이 남았다. 텍스 환급이 안된다는 뜻이다. 물론 텍스를 받든 안 받든 아웃렛에서 사는 게 훨씬 싸겠지… 와인도 마카롱도 포기할 수 없는데.
그러다 파리에 백화점은 21일 이내에 돌아가는 여행객에게 백화점에서 현금으로 텍스 환급을 해준다는 글을 봤다.
‘한번 더 가자.’
2월 말 한국에 가는 일정에 맞춰, 그로부터 21일 이내에 티켓을 하나 더 끊자.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당장 비행기표를 알아보았다. 따듯한 11월과 달리 2월에는 관광객이 적은 지 (아니면 아직 기간이 좀 남은 탓인지) 티켓이 아주 저렴했다. 11월 티겟의 반값이다.
나는 2월 첫째 주 주말, 프랑스로 가는 왕복 티켓을 예약했다. 토요일 아침에 가서 일요일 저녁에 오는 일정임에도 평일에 가서 평일에 돌아오는 11월 티켓보다 저렴했다.
날짜는 한국으로 가는 날짜의 딱 20일 전이다. 한국을 방문하기 전, 가족과 친구들의 선물을 사기 위한 티켓이다.
쇼핑하러 주말에 잠깐 파리에 가는 일이, 유럽에 사니 현실이 된다.
하지만 사치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에 가깝다. 이번에 끊은 저렴한 티켓은 쇼핑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함과 동시에 텍스 환급이라는 커다란 이점이 있으니까.
살 목록만 생각해 봐도, 프랑스에서 받을 텍스 환급은 새로 끊은 티켓과 숙소 값을 커버하고 남을 금액이다.
무엇보다, 이제 쇼핑에서 자유로워진 나는 원하던 여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다.
그날그날 내키는 관광지나 쓱 보고, 중간중간 예쁜 카페와 맛있는 와인에 취하는 여행을 할 수 있다.
센느 강이나 걷다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는 그런 여행 말이다.
아무 부담 없는 첫 번째 프랑스 여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