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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Nov 06. 2020

나만의 방학 만들기

여행의 이유









여행이란 뭘까? 우리는 왜 여행이라는 단어가 마치 좋은 휴식과 여가가 총집합 된, 삶의 질을 올려주는 마법의 단어처럼 여기게 된 걸까. 무지 카페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으며 그런 생각했다. 


여행할 때면 서로 다른 국가에서 모이는 탓에 자연히 시차가 생기기 마련이었는데, 비교적 휴가를 길게 쓸 수 있었던 나는 대체로 일찍 와서 늦게 돌아가는 비행기를 끊었다. 엠마가 하루 먼저 비행기에 오른 이튿날, 나는 싱가포르에서 남은 반나절을 쥬얼(jewel)에서 보내기로 했다. 창이 공항에 도착한 나는 캐리어를 끌고 구름다리를 건너 쥬얼로 향했다. 창이 국제공항에서 새롭게 창조한 이 공간은 거대한 인공 폭포와 현대식 상점들이 어우러져 미래도시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렇게 거대한 폭포를 어떻게 만들어낸 걸까? 핸드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 속에 나도 몇 장을 찍어 엠마에게 보냈다. 이거 봐라. 예쁘지?


그리고는 짐을 보관하고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가를 기웃거렸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라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즐비한 익숙한 브랜드의 간판 가운데, 그나마 일찍 문을 열었던 무지에 들어섰다. 세트 메뉴 하나를 시키고 숨을 돌리자 익숙한 한적함이 밀려왔다. 


여행에서 가장 고요하고 독특한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시간. 정신없이 돌아다닌 긴 여행을 끝에 가지는 고요한 휴식 시간. 느긋하게 밥을 먹고 온몸이 지루해질 만큼 늘어지고 나면 다시 사부작 걷기 시작한다. 영화관에 내려가 영화도 한 편 보며 감동하다 (당시 라이온 킹이 리메이크되어 상영 중이었다) 다시 기지개를 켜며 늘 가던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동네에서나 할 법한 일을 해도 여행지라는 이름은 이 평범함 속에 있는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휴가를 내고 여행을 왔다는 사실만으로 꽤 높은 만족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유대주의에서는 일주일 중 칠 일째에 쉬는 것을 안식일이라 한다. 요즘에는 일하는 칠 년 중 휴식을 취하는 해를 ‘안식년'이라 부른다고 들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어떤 대학교수가 안식년을 가지러 외국에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였다. 안식년이라. 퍽 부러운 울림이다. 


안식.


그 단어만으로 평화로움을 자아내는 말이 아닌가. 유대주의가 칠일째를 휴식일로 정한 것처럼 대학에서는 연구 칠 년째를 안식년으로 정해 외국에서 연구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는 이야기였다. 몇 년이 더 흐른 지금, 안식년은 고생하는 나를 위해 잠깐 쉬어가는 해. 정도로 농담처럼 쓰이기도 한다.  안식년.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안식년에 필요하다. 


모든 직장인에게 제도적인 차원에서 안식년이 보장되면 좋겠지만,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나만 해도 당장 일 년을 쉬라고 하기 이전에, 육 년 동안 쉬지 않고 한 곳에서 일을 하는 것 부터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다. 물론 칠 일 중 이틀을 쉬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신없이 평일을 보내다 보면 그만큼 주말에 해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 미뤄둔 드라마도 봐야 하고, 책도 읽고 싶고, 무엇보다, 그동안 긴장하느라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휴식을 취한다. 다음 일주일을 위해 심신의 체력을 보충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보내다 보면 문득 회의감이 밀려올 때가 있다. 특히 갑자기 업무량이 늘거나, 사회생활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겨 마음고생을 하다보면 매일 밤 잠들지 못하고 고민하기에 이른다. 퇴사해야 하나?


우리는 어린 시절 모두 이런 재충전의 시간을 보장받으며 살아왔다. 학교는 방학이 있었고, 중간중간 수학여행이나 소풍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바람을 쐴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방학이 줄고, 수업 시간은 길어졌으며, 학업과 관련 없는 활동을 하는 빈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에 나오니, 방학 같은 건 없었다. 균형 잡힌 삶을 살다 갑자기 과다한 업무를 짊어지게 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급격히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나마도 부여잡기 위해 필사적인 세상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리를 잡은 어른이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그들만의 ‘방학'을 만들었다. 모두 그들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와 주변의 많은 사람이 택했던 방법은 여행이었다. 


멜버른에서 일하던 시절, 새해가 밝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듯 물었다. 휴가 언제 가세요? 그렇게 사전 조사를 마친 사람들은 가장 무리 없이 휴가를 쓸 날을 골라 신청서를 제출했다. 간혹 부서 사람들은 차례를 정해 돌아가며 휴가를 내고는 했다. 자유롭게 휴가를 쓰는 법적 제도와 사회적 풍조를 가진 나라였던 탓에,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스무 밤이 넘게 휴가를 쓰고 여행을 떠났다. 새해맞이 휴가 조사는 이런 장기휴가를 계획하기 위함이다.


한번은 일하던 중 다른 부서에 대리급이 와서 물었다. 휴가 안 가세요? 아직 다녀온 지 다섯 달 밖에 안 되었다고 대답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다음 달에 가면 되겠네! 원래 휴가는 반년에 한 번씩은 써줘야 해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와요! 

그 이야기를 들은 직후, 고민하던 티켓을 예약했다. 그 티켓이 바로 이 주 동안 홀로 떠난 뉴질랜드 여행이다. 지난 9월, 일주일 동안 싱가포르에 다녀온 지 딱 반년 만에 쓴 휴가였다.


호주가 다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멜버른에서는 공휴일을 제외하고 평일 기준 딱 사 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휴가는 시간 단위로 쪼개 쓸 수 있어서, 잘만 맞추면 일 년에 여섯 주는 휴가를 가질 수 있었다. 적어도 열 두 달 중 한달은 너끈히 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종의 안식월이랄까? 


표를 끊고 그날만을 바라보며 지친 날을 버티어냈다. 그렇게 한껏 재충전을 마치고 돌아오면 한동안은 다시 힘을 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지치는 때가 오면 또 다른 티켓을 끊었다. 짧게나마 그렇게 나의 방학을 만들었다.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이런 시간은 무척 중요하며,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우리에게도 방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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