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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Feb 01. 2023

십 년 만에 문제집을 풀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새해가 되어 앞자리가 바뀌었구나 생각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한 달이 지나간 것이다. 늘 그렇듯 새로운 해를 맞이해 목표를 세웠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비타민 먹기, 공부하기... 정말 초등학교 여름방학에 세울 것 같은 목표다. 어린 시절 여름 방학 계획표를 짜던 습관은 학교를 졸업한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이것이 주입식 교육의 힘인가, 혹근 그저 계획을 좋아하는 성격인 탓인가.


단언컨데, 계획의 묘미란 짜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계획을 짜는 것 만으로 마치 시작을 한 것 같은, 그래서 반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그 묘한 성취와 만족이다. 실제로 그 모든 걸 달성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심 삼일도 좋다. 계획은 다시 세우면 되니까. 


그럼에도 간혹 반드시 달성해야하는 계획이 있다. 아니, 반드시는 아니고, 되도록 달성해야하는 것들이 있다. 어릴 때는 안하면 혼나는 것들이 그랬고, 지금은 안하면 돈 날리는 것들이 그렇다. 

어릴 적 약간의 강제성과 의무감에 익숙해진 나는 일종의 동기부여로 '꼭 해야한다' 생각되는 것에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꼭 해야하는 것일수록 더 많은 돈을 쓴다. 올 해의 대상은 CPA었다. 누구 하나 공부하라고 등떠밀지 않는 사회에서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AICPA는 아주 적합했다. 300만원 상당의 강의료를 결제하고 일 년치 공부 계획을 짰고, 한 달 만에 의무와 죄책감으로 변했다. 결국 다음 월급이 들어오고 나면 잊을 수 있는 지출이 되고 만다. 그래. 어차피 환불 안되는 매몰 비용이다. 매몰 비용에 얽매이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이러라고 배운 회계가 아니거늘.


결국 이런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는, 다음 동기부여를 준비한다. 이 시험은 정말 끊임없는 동기부여의 연속이다. 강의를 끊고나면 학위 평가를 받고, NTS를 발급하고, 시험을 보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고, 하루에 한 과목 밖에 못 보니까 호텔도 끊고, 해외에서 보니까 서차지도 내야 하고, 떨어지면 다시 돈을 내야 한다. 하나의 자격을 위해 몇번의 결제를 하는 걸까? 과연 직장인에게 최적화된 시스템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비행기 표를 끊었다. 에어라인 특가 할인 알람이 떳기 때문이다. 할인 행사가 뜨면 무조건 티켓을 구입하는 게 습관이 됐다. 원래는 가고 싶었던 나라들을 골라 가는데, 이제 그 목록이 다 떨어졌다. 그렇게 하나 둘 구입한 여행이 열 달 뒤까지 차 있었고, 더는 여행 계획을 잡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대신, 시험을 위한 티켓을 끊었다. 날짜는 내가 그 때 계획했던 바로 그 날. 계획은 잊어버린 듯 해도 뇌 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카드 결제와 함께 시험 날자가 고정되었고, 환불 불가 티켓인 탓에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던 과목 하나를 끝까지 풀었다. 문제집을 끝까지 풀어본게 언제더라?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10년 만에 문제집을 풀었다. 그래, 책을 덮는건 이런 느낌이었지. 


어릴 적 빨간팬이나 구몬학습에서 지겹게 풀던 산수는 어른이 되어 놀이가 된다. 심심한 비행기 안에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푸는 스도쿠나 퍼즐 처럼, 무언가를 풀고 맞추고 끝내고 덮는 일련의 과정은 만족과 성취감을 준다. 



그럼 뭐하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비행까지 앞으로 삼 개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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