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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Oct 21. 2023

남겨진 숙제

불면증과 남겨진 숙제

오랜만에 긴 잠을 잤다. 모닥불 소리를 들으며 (비록 영상으로 재현되는 ASMR이지만) 잠들었다. 그 일사 불란한 소리는 어느새 백색 소음이 되어 나를 깊은 잠으로 끌어당겼다.

얼마 전 상사와 불면증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랬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불면증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내가 말했다. 그리고 꼭 그때부터 나는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자정이 되기 전에 쓰러지듯 (그 어떤 의심 없이) 잠들었던 내가, 자정이 될수록 의식이 또렸해졌다. 이는 불면증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까? 사람의 의식은 처음부터 까지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 연쇄 작용을 일으키는지도 모른다.


잠을 방해하는 가장 커다란 요소는 두 말할 것 없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생각한다. 아니 생각이 난다. 의식적인 생각과 무의식적인 생각, 생각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조차 멈출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 어느새 새벽을 꼴딱 새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요. 하얀 구름이 가득했던 부다페스트의 바닷가에서 전 직장 상사에게 물었다. 같이 일하던 시절에 그는 밥을 먹을 때 늘 멍한 표정으로 음식을 씹었다. 마치 의식을 저 먼 어딘가로 날려 보낸 것처럼. 몸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칼로리를 섭취하는 생명 부지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는 인형 같은 느낌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으면 (당시 나에게는 생각 하지 않는다는 선택이 없었으므로) 아무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러 가지 시도해 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어요.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사실 좋다는 건 다 해봤다. 운동도 해보고, 명상도 해보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걸 먹고.. 그 어떤 것을 해도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덕분에 집에 혼자 있어도, 어떤 음악을 듣지 않아도 적막하지 않았다. 떠다니는 생각들은 일사불란하고 소란스러워 '시끄럽다'라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불멍 해보세요. 그가 말했다. 불멍이라는 말을 나는 그때 처음 들었다. 라트비아로 돌아와 불멍을 검색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멍하게 바라보는 행위라고 한다. 그렇게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지는 모양이다. 그러부터 이 주가 더 흐른 지난밤, 나는 나름대로 불멍에(가까운 행위에) 도전해 보았던 것이다.

그날 따라 일이 많아 지치는 하루였다. 일을 마치고 나니 벌써 자정이었고, 잠은 오지 않았다. 되려 정신이 또렸했다. 그렇다고 놀고 싶다거나 술을 마시고 싶다거나, 오늘을 보내기 아까운  아니었다. 내게는 곧 다가올 주말이 있었고, 이번 주말은 아주 오랜만에 아무 일정이 없었다. 아무 일정 없이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보내지 싶을 정도로 무한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때 불멍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프리스타일을 연결해 침실 벽에 모닥불을 피웠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모닥불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긋이 응시했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쩌면 진짜 모닥불이 아니라, 영상이기 때문일까? 4K 영상이지만 내가 사용하는 프리스타일이 FHD라서 생생하게 담아내지 못하는걸까? 눈은 어디까지 영상의 디테일을 구분할 수 있을까.


결국 생각을 멈추기를 포기하고 읽던 책을 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유명한 일본 작가의 신간이다. 지난 스위스 여행에서 언니에게 사다 달라 부탁했던 책이다. 구할 수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의 책을 다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으로 넘어왔다. 사람에게는 확실히 문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담아내는 이야기의 양상이 있다. 같은 작가의 책을 열 권 넘게 읽다 보면 그 작가가 가지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알게 된다. 바나나 작가의 책이 따듯하고 소소한, 시골 별장 같은, 제주도 한 달 살이 같은 느낌의 책이라면, 하루키의 책은 현실로 돌아온 일상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보이지 않는 끝없는 번뇌와 지루함과 자극이 반복된다. 의식과 현실을 끝없이 오가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작가 후기였다. (그렇다고 본문의 이야기가 별 볼일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칠백 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다) 이 이야기는 그가 아직 신인 소설가였던 시절, 1982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무려 내가 태어나기 십이 년 전부터 그는 소설가였다) 아직 스스로의 필력이 부족하다 느꼈던 하루키는 그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내지 않고 미완성인 상태로, 언젠가 해야 할 미래의 숙제로 남겨두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꼭 사십 년이 지난 2022년, 서른 살이었던 그가 일흔 살이 되어 이 책이 나왔다. 더할 나위 없는 필력과 (무려 의식과 무의식과 현실과 비현실이 엉켜있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며 납득시킬 정도의) 명성을 갖춘, 뛰어난 '전업 소설가'로 성장한 그는 삼십 년 전, 재즈 카페를 운영하며 (아마도 당시에는 이쪽이 본업이지 않았을까 싶다) 소설을 쓰는 신입 소설가였던 젊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이는 그가 드물게 '작가 후기'에 남길 정도로 큰 의미를 지녔던 듯싶다.


누구나 과거에 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시도했으나 끝맺지 못했던 응어리, 인생의 숙제 같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나 역시 그랬고 (어쩌면 아직 다 풀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또한 그랬다. 인생의 마지막 숙제를 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후기는 앞으로 그의 책을 몇 권이나 더 읽을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만큼 후련해 보였다. 자신이 남긴 과제를 하나하나 매듭 지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 날 아침, 나는 세안을 하고 택시를 불렀다. 화장도 하지 않은 채 택시를 타고 Big Bad Bagels로 향했다. 오픈 시간에 맞춰 방문하기로 전 날 오후쯤 생각했던 것 같다. 곧 볼트 드라이버가 도착했다. 회색 빛의 구식 벤츠였다. 드라이버는 십 년 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워낙 잘생긴 친구들이 많은 곳이지만, 꽤나 잘생겼다. 라트비아가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할리우드로 빠지지 않았을까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인맥도 쌓을 겸 취미 삼아 볼트 드라이버를 한다고 했다. 마케팅 사업을 토대로 전 세계에 다양한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모양이다. 전에는 컴퓨터를 유통하는 일을 하다, 시장 수요가 다 채워지자 (라트비아의 인구는 이 백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같이 일하던 파트너에게 사업체를 넘기고 지금 하는 일로 넘어왔다고. 그리고 지금은 또 비타민업계 (영양학에 중점을 둔 약품이라고 했으니 아마 비타민이지 싶다)에 뛰어들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야기에서 추측해 보건대,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친구는 아마 사십 대 초반이지 싶고, 이리저리 업계를 옮겨 다니며 자유롭게 마음 가는 일을 하며 살고 있는 듯했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있는 걸로 보아 가정이 있는 듯했고, (그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능력이 되거나, 철이 없어도 되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리라.


AI의 도래로 생겨난 무인 택시가 라트비아에도 도입되면 곧 볼트를 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할 때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야기 재밌었어.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려 베이글 집에 들어갔다. 듣던 대로 베이글 집에는 테이블이 딱 두 개뿐이었다. 그중에 한 테이블은 이미 선객이 앉아 베이글을 먹고 있었다. 아직 오픈한 지 십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듣던 대로 꽤 인기 있는 장소인 모양이다.


직원이 추천해 준(그녀가 가장 좋아한다는) 베이글과 라테를 시키고 남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제 백 페이지가 채 남지 않은 책을 읽었다. 다시 불확실한 벽 안의 세계의 이야기로 넘어갔을 즈음이다. 이야기 속 그가 소년을 기억하지 못할 때쯤, 베이글이 나왔다. 소고기와 피클, 상추로 채워진 커다란 베이글은 한 끼 식사로 충분해 보였다. 스타벅스의 블루베리 베이글을 생각하고 온 내게는 꽤나 거한 식사였다. 한 입 베어 물기도 힘들 정도로 컸다. 베이글은 다소 질기고 퍽퍽하고 촉촉했다. 여느 베이글이 그러하듯. 위에 깨를 뿌리고 구운 듯 했다. 씾을수록 묘하게 고소한 맛이 있다. 치즈와 고기의 느끼함을 피클이 잡아준다. 피클은 누가 만들었을까. 위대한 발상이다. '절인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걸까. 중간중간 쉬어가며 마지막 한 입까지 꼭꼭 씹어 삼켰다. 아마도 오늘은 더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하면서.


베이글을 모두 삼킨 뒤에는 남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좀 더 읽었다. 소녀가 부은 귓불에 연고를 발라주고 있었다. 옆 테이블의 손님이 바뀌고 볼트 가방을 멘 배달기사가 두 번 정도 방문했다. 테이블이 작아도 배달 주문이 많으니, 경영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구글맵을 켜서 도서관을 검색했다. 걸어서 오 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었다. 마침 열 시부터 문을 열어 식사를 마치고 이동하기에 적절해 보였다.


길을 건너고 모퉁이를 돌아 도서관에 들어섰다. 시 도서관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작은 - 정말 작은 - 도서관. 건물의 삼 층 정도를 쓰고 있었는데, 칠 증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과 (아마도 도시 사람들의) 페인팅이 커다란 이젤 위에 동그랗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의 사서는 영어를 못하는 듯했다. 다행히 책을 빌리지 않는 한 따로 등록 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한국어로 된 책은 없었다. 열심히 찾으면 영어로 된 책들은 드문드문 끼어 있었다.


동그란 책상에 앉아 남은 페이지를 읽었다. 이야기가 끝나갈수록 오른손에 잡히는 종이의 두께가 얇아져 한 장씩 넘기기가 어려워졌고, 왼쪽으로는 책의 무게가 쏠려 그 무게를 고스란히 감당하는 손목이 금세 뻐근해졌다. 작가 후기(감사의 말로 채우지 않은, 정말 후기 같은 후기)를 읽고 책을 덮은 뒤  노트북을 켰다.

내게도 아직 끝나지 못한 과제가 남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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