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유럽 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넘었다. 유럽에 온 뒤로 나는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지 소재가 없었고, 다음에는 시간이 없었고, 그다음에는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그다음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결국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 쓰고 싶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썼을 테니까.
무엇이든 다 때가 있다고 했던가. 글을 쓰는 것도 그렇다. 억지로 쓰려하면 쓸 내용도, 감정도, 상황도 따라주지 않다가, 어느 순간 이렇게 불현듯 갑자기 찾아온다. 갑자기 불쑥. 그렇게 글을 쓸 마음이 들어 처음에는 메모장에, 그다음에는 머릿속에 쓰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노트북을 켜는 나를 발견한다.
라트비아에 온 뒤로 나는 많이 바빴다. 처음에는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그 후에는 집을 구해 살아가느라 바빴고, 처음 방문한 유럽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출장을 다니느라 바빴고, 한 달에 몇 번씩 여행을 가느라 바빴다. 일 년 조금 더 되는 기간 동안 나는 열두 번이 넘는 여행을 했고, 내가 글을 쓰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다음 책은 여행기야?'라며 놀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했다. '요즘은 한 자도 쓰고 있지 않아요.'
책을 내고 한동안, 나는 그래도 꾸준히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과, 하나의 책을 마무리했으니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게으름의 대립에 있었다. 거의 늘 언제나 게으름이 이겼고, 의무감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일 년이 지났을 무렵, 의무감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나는 아마도 근 반년 동안은 글을 쓰지 않은 것 같다. 대신 일 하고, 공부하고, 여행을 다녔다. 왜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진 걸까? 아마도 이제 완전히 익숙해진 회사 생활과 시험 하나를 끝내고 다음 시험까지의 기간에서 오는 여유로움, 그리고 혼자서는 더 다닐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돌아다닌 지난 일 년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회사일에 완전히 익숙해질 것, 한가해질 것, 달리 더 하고 싶은 게 없을 것. 이 세 가지가 나를 다시 돌아오게 했다. 본래 상태로 돌아오려는 속성을 '관성'이라 했던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이 나이를 먹고 웹툰을 챙겨보는 것도, 가끔 옛날 게임을 하는 것도, 이제는 잘하지 않는 게임기를 구비해 놓는 것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책을 읽는 것도 모두 관성일 것이다. 딱히 이래야지, 저래야지 생각해서 움직인다기보다 그냥 그렇게 한다. 별 생각은 없지만 어딘가 편하다.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란 그런 거다.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전에 읽던 책을 펼쳐보다, 백 페이지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아는 순간 끝까지 읽어버리고 마는 그런 자잘하고 고유한 고집 같은 것이다.
라트비아는 생각보다 살기 좋은 나라다. 유럽 국가치고 물가가 아주 싼 편이고, 공항도 잘 되어 있어 다른 유럽을 여행하기 좋다. 비록 연 중 반 정도는 겨울이지만 여름이 특히 짧은 것도 마음에 든다. 찬 공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이 나라에서 바퀴벌레를 보지 못했다. 바퀴벌레뿐 아니라 날파리와 모기, 실버피시, 개미를 제외한 어떤 벌레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처럼 얌전하고 차분한 속성을 가졌거나,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이주했거나.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에, 이곳에 오 년째 거주하던 상사는 말했다. '동물도 환경의 영향을 받아. 여기 사람들이 온순하고 착한 것처럼, 여기 사는 개들도 사람을 보고 짖지 않거든' 나는 단 한 번도 여기서 버려진 개나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 집 앞 공원에서 산책하던 개들을 몇 번이나 마주했지만 그들은 나를 보고 신기한 듯 꼬리를 흔들며 냄새를 맞거나 총총 거리며 주위를 뛰어다닐 뿐이다. 덕분에 이곳에서는 개를 보아도 겁내지 않았고 멀리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새벽에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도 시비 거는 사람 하나 없었고, 주말에도 시내는 그리 북적이지 않았다. 이곳의 인구는 이백만 명에서 최근에 백 팔십만 명가량으로 줄었는데, 그만큼 인구 밀도가 낮아 집값도 싸고, 초라한 인구에 비해서는 높은 임금 수준 덕분에 사람들은 대게 여유로워 보였다. 아마도 K팝 덕분에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너 되게 예쁘다'라고 말을 건네는 젊은 여자애들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법한 것이, 한국인은 꽤 예쁘지만 라트비아인은 대부분 예쁘다. 인구의 대부분은 늘씬하고 키가 크며, 눈도 크고 속눈썹은 길고, 얼굴은 조그맣고 하얀 피부와 눈부신 금발을 가졌다. 인형같이 생긴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한국인은 분명 눈에 띄지만, 다소 밋밋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의 생활은 여유롭고, 한적하고, 또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