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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Apr 19. 2024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아버지의 노트

장례가 끝난 다음날부터 엄마는 끊임없이 세탁기를 돌려대기 시작했다. 1주일에 한번 세탁기를 돌릴까 말까 하던 사람이, 손빨래만 주구장창 하던 양반이 하루에 서너 번 이상 세탁기를 돌렸다. 처음에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옷가지들을, 장롱에 걸려 있던 철 지난 옷들을, 그리고 서랍에 넣어 두었던 입지 않은 옷들과 아버지의 옷가지들까지 몽땅 꺼내어 세탁을 하고 정리를 하고는 내게 아버지의 옷들을 모두 처분하라고 했다. 왜 벌써. 굳이. 아직도 아버지가 입을 것만 같은 옷들을, 아버지가 벗어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옷들까지 왜. 이제 입지도 못하는 거 놔두면 뭐해. 나는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너무 빨리 치우면 아빠가 서운해 하지 않을까. 좀 더 있다가 해도 되잖아. 엄마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꾸역구역 짐가방에 아버지의 옷들을 욱여넣었다.


오빠는 아버지의 약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한참을 복용했던 항암제. 몇 번 먹어 보지도 못하고 중단한 면역항암제. 혈압약과 혈당약, 이뇨제, 심부전 치료제, 항응고제, 과민성방광증상치료제, 통증완화제, 식욕촉진제, 호르몬제, 그리고 각종 영양제들.... 약 복용을 힘들어했던 아버지에게 무심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조그만 한약방에 놓인 것 같은 약 서랍장이 오빠의 방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버릴 것들과 약국에 반품할 것들, 남겨두고 먹을 만한 것들을 분류하여 약 서랍들을 정돈했다.     


그렇게 엄마와 오빠는 아버지와 함께 앓아왔던 날들을 정리해 갔다.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 같아서 야속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흔적이 사라지면 그 텅 빈 공간으로 상실감이 채워질 텐데.      


정작 나는 아버지와 정리할 것이 없었다. 아버지의 고통스럽던 투병의 시간에 나는 없었던 것이다. 거실 한 켠에 아버지의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 아버지의 사진들과 시계, 반지가 가지런히 놓였다. 엄마는 아버지가 쓰던 노트들과 메모들을 함께 넣어 두면서 노트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아버지의 멋들어진 글씨체로 빼곡한 노트.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 습관인 것은 알았지만 아버지의 노트를 넘기다가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하루하루의 기록. 생계와 관련되었을 아주 작은 일들까지 빽빽하게 씌어진 글씨들. 나는 한 장 한 장 새겨진 아버지의 글씨 속에 담겨 있었을 아버지의 치열하고도 성실했던 하루하루가 느껴졌다. 한번도 궁금해 한 적 없던 아버지의 일상이 그렇게 화석처럼 남아서 한 가장의 삶의 무게를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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