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교환학생 일상
이곳에는 며칠간 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중간고사도 치르고 또 그렇게 시시한 몇 번의 밤을 보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니까 하늘이 내내 잿빛인데 그 사이에 노란색으로 물든 나무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코트와 목도리를 두르니 제법 가을 같다. 보풀이 올라온 오래된 목도리를 보고 목도리를 새로 사야겠네, 생각했다. 그 친구가 있는 곳도 지금쯤 추워졌겠지. 부드러운 통기타 소리에 조곤조곤하게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음악을 듣다가 또 네 이름을 떠올렸다. 가수가 멀리 있는 친구를 떠올리며 쓴 곡이라고 했다.
아득히 떨어진 곳에서
아무 관계없는 것들을 보며
조금 쓸쓸한 기분으로
나는 너를 보고픈 너를 떠올린다
네가 런던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배웅을 했던 날이 떠오른다. 여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던 너와 나는 의연했었고, 오히려 평소에 센 척하던 마야가 엉엉 우는 모습에 놀라 웃으면서 헤어졌다.(마야는 이거 보면 또 운 거 동네방네 얘기하고 다닌다고 화낼 거다) 그땐 그렇게 웃으며 보냈지만, 집에서 혼자 이 노래를 듣다가 네가 떠올라 조금 찡했다. 런던으로 홀로 떠나던 네가 친구로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고, 알아서 잘하겠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프랑스에 교환학생을 왔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릴', 벨기에와 맞닿은 프랑스 북부이다. 영국과 가까워 꾸리꾸리한 날씨로 유명한 곳이다. 릴에서 영국은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심지어 1시간 차이가 나서, 도착하면 출발했던 시간 그대로 도착한다. 비록 다른 나라에 있어도 너와 8시간이 아닌 1시간 차이가 난다는 게 좋았다. 비록 바다를 건너야 네가 있대도 우리가 꿀꿀한 날씨를 공유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우리는 파리에서 한 번 만나고, 런던에서 한 번 만나기로 했다. 꿈만 같던 여행은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던 9월에 현실로 이루어졌다. 너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길거리 버스킹에 눈길을 뺏기기도 하고 에펠탑의 화려한 불빛이 어지러운 센강에서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런던에서 만나기를 약속하며 헤어졌고, 꿈은 낙엽이 떨어지던 11월에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너를 보러 런던에 가던 날, 나는 오전에 시험이 있었다. 짐을 후다닥 싸느라 시험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시험도 30분 만에 제일 먼저 치르고 나왔다. 그런데 설레는 마음에 들떠 있어서 그랬는지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하고 난 그날 기차를 놓쳤다. 20만 원짜리 유로스타를 놓치고, 같은 가격을 다시 지불해야 할까 봐 울음을 참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너는 따뜻하게 달래주었다. 운 좋게도 다음 기차에 취소표가 생겨 나는 런던으로 갈 수 있었다.
드디어 너를 만나! 나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누구보다 빨리 기차에서 내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 너는 어디 있을까 두리번대던 내게 네가 언제나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다가왔다. “가빈아!”
영화 토르에서 나라를 잃은 토르에게 오딘이 말한다.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 그 자체라고. 가끔 집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킹스크로스역을 빠져나와 런던 거리를 가로지르며 네가 말했다. “네가 오니까 한국에 온 것 같아. 지금 서울에 같이 놀러 온 기분이야."
너랑은 아마 밤새 수다를 떨어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는 펍에 와 주린 배를 채우며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너는 보따리를 풀듯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리액션을 다채롭게 하며 제 역할을 했다. 나는 너에겐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건 네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말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하고 항상 여유 넘쳐 보이는 애티튜드의 런던 패션학도. 심지어 너는 영국 악센트도 금방 체득하여 멋들어지게 구사한다. 이 정도면 밸런스 붕괴 아닌가? 매력을 몰빵 했다고 작가가 욕먹을 캐릭터다. 그런 너인데, 너는 네가 얼마나 멋진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다음 날엔 네가 너의 런던 친구 그룹에 나를 소개해줬다. 우리는 다 같이 버블티를 마시며 소호 거리를 누볐다. 레스터 광장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다 다음엔 다 같이 캠핑을 가자던 알렉스의 말에 잠깐 이 그룹에 영영 소속되는 상상을 했다. 바쁜 런던의 수많은 쌀알 같은 사람 중 하나로 살면서 친구들과 캠핑도 가고 작은 파티도 여는 상상. 행복한 상상이었지만 나는 금세 머리를 흔들어 머릿속에 피어난 풍선을 터뜨려 버려야 했다. 희망은 비싸고 잔인한 거라서. 그래도 나는 릴리와 알렉스와 션을 잊지 못할 거다. 4층짜리 엠앤엠 스토어의 수많은 초콜릿 기둥들에서 손으로 슬쩍 손잡이를 눌러 초콜릿을 훔쳐 먹는 사람들을 보며 "모두 엠앤엠 감옥에 갈지도 몰라!" 하던 션, 스코틀랜드 전통음식 해기스가 괴상한 동물로 만들어졌다는 거짓말을 진심으로 하던 알렉스, 중국식 빵을 좋아하던 릴리. 기억만으로도 고마운 이름들이다.
해리 포터의 나라에서 마법 같은 이틀을 보내고 결국 마지막 날은 왔다. 영국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우리는 런던 한복판에서 마라탕을 먹었다. 무슨 대야 같은 그릇에 가득 담겨 나오던 마라탕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오랜만에 먹는 매콤한 국물에 둘 다 코를 박고 정신없이 먹었다. 배를 든든히 채운 후에는 내셔널 갤러리도 가고, 코벤트 가든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구경했다. 투어리스트인 나를 위해 네가 빨간 전화부스 앞에서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렇게 즐거운 오후를 보낸 후, 감기 기운이 있던 너는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런던에 혼자 남아 빅벤을 보러 가기로 했다.
혼자 남아도 난 혼자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도와주러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은 명성대로 바람이 얼굴을 관통할 것처럼 불었다. 기념품은 사지 않았고, 값싼 목도리를 하나 샀다. 알록달록한 목도리를 이불처럼 두르고 빅벤을 향해 걸었다.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이어폰을 꼭 끼고 이미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한 런던 거리를 걸었다. 이어폰에서는 마이클 부블레의 'it's beginning to look a lot like christmas'(크리스마스처럼 보이기 시작했어)가 흘러나왔다. 마이클 부블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포근하게 감겨 다리가 아픈지도 모르고 걷던 나는 템즈강을 만났고 번쩍번쩍 빛나는 런던 아이를 만나고 곧이어 빅벤을 만났다. 이게 런던이구나. 탁 트인 타워브리지에 서서 지나가는 빨간 2층 버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진을 찍는 수많은 관광객의 우산에 치이며, 왜 가만히 서있느냐는 듯한 눈초리를 받으며 관광객들을 요리조리 피해 지나가는 자전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사진을 한 장이라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까르르거리던 두 친구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두 친구는 플래시까지 켜며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어정쩡하게 선 자세에 비에 젖은 얼굴이 번쩍거리며 멋쩍게 웃고 있는 내가 사진에 담겼다. 나,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어. 소심했던 어렸을 때 나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이야. 네가 옆에 있는 것처럼 속으로 속삭였다. 널 만나면 신나게 자랑해야지.
찬 바람에 얼굴이 시릴 때쯤 난 네 집으로 갔다. 겨울의 유럽은 해가 일찍 져 어둑해진 지 오래임에도 7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난 네가 먹을 제육볶음을 소호의 한식당에서 포장해 품에 꼭 안고 지하철을 탔다. 날 따뜻하게 맞이해 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었다. 런던의 작은 튜브 안에서 제육볶음의 달콤한 마늘 냄새 맡으며 오늘 네가 따뜻한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새벽까지 수다를 떨다가 잠들었다. 항상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드는 건 왜일까. 내일이면 또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항상 금방 만날 것처럼 이야기한다. 다음에는 파리의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자. 아니면 이탈리아로 가자. 언제 또 현실로 돌아올지 모를 꿈만 같은 이야기를 몽실몽실 피어낸다. 멀리 있어도 가까운,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나의 친구야! 네가 어디에서 뭘 하든 응원할게. 다음엔 부드러운 눈송이가 휘날리는 겨울에 만나.
2023년 11월 12일 런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