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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Sep 30. 2023

햇 살 한 줌


며 칠째 눅눅함과 축축함이 계속되던 날이었다.

가는 비를 맞는 것은 기분 좋기도 했다. 그물처럼 성긴 여름 운동화는 한 발만 밖으로 나가도 금세 안으로 물이 들어와 양말과 발을 적셨다. 나이가 들고 보니 굽이 조금만 있어도 충격이 느껴지고, 슬리퍼도 불편해서 웬만해서는 운동화를 신지 않을 수 없다. 운동화로 물이 들어오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집에 돌아와 냄새나는 운동화를 말리기도 어려웠다. 계속되는 비 속에서 한 켤레  운동화는 젖은 채로 방치되어 구린내가 났다.


아이들이 일부러 첨벙이며 물 위를 달린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져 나도 슬쩍 물을 몇 번 튕기다가 운동화가 다 젖고 말았다. 말릴 새도 없이 다시 신어야 하는 한 켤레의 운동화. 그럴 때 잠시 소강상태가 되어 햇 살 한 줌이 내리비치면 그렇게 기쁘고 마음까지 보송보송해질 수 없다.


어렸을 적에 시골집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고랑이 생기고 땅이 내려앉았다. 담벼락까지 넘보는 물길을 막기 위해 비가 쏟아 지기만 하면 식구들이 모두 달려들어 모래주머리로 물길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잘 보고 있다가 또 비가 넘어서면 다시 그 위에 모래주머니를 쌓아야 했다. 밤새 비와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았다.  지친 다음날 해가 반짝 비치면 한낮에 마루에 널브러져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 기억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장마철 틈틈이 비치는 해살에 급하게 빨래를 널기도 하는 마음, 한 줌의 햇살이 귀하고도 귀한 보석 같은 시간이 오늘도 아주 조금 나에게 주어진다. 하루종일 돈이 되지 않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바쁘지 않았던 날보다 더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졸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텔레비전도 볼 새 없이 컴퓨터를 켜서 글을 쓰고, 졸린 눈을 비비며 책을 읽는 달콤함이라니 오늘 나에게 주어진 틈새의 시간이 황홀하여 시근거리는 팔목을 달래며, 필사를 하고 기쁨에 미소 지으며 곤한 잠에 빠져 든다. 장마철 햇살 한 줌처럼 소중하고 귀한 하루 중 나의 시간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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