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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 05. 2024

사라진 것들, 사라지는 것들, 사라질 것들


# 사람 마음은 간사하다. '나 좋자고 쓰는 글인데 뭘'이라고 생각하다가, '나만 좋자고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바뀔 때. '되어가는 대로 쓰는 거지 뭐'라는 마음이 '되어가는 대로만 쓰면 대체 언제 완결될 것이냐'라는 마음으로 바뀔 때. 내면적 동기를 외부적 실천으로 끌어내기 위해 스스로 마감을 설정하고 소박한 목표를 세우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마감과 목표가 세팅되는 순간 '미루기'와 '딴짓' 모드가 즉각적으로 발동한다는 사실이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이 그랬던 것처럼. 원고 마감도 마찬가지. 미루기와 딴짓이 원고 마감의 꽃일 리는 없는데. 미루기와 딴짓의 파노라마가 1년 내내 펼쳐지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핑계는 늘 엇비슷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저 책도 읽고 나서. 이걸 좀더 공부하고 나서. 저것도 파악하고 나서. 오늘 마주친 이 음악, 이 영화, 이 인물, 이 주제를 좀더 들여다 보고 싶어서. 지금-여기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해서. 기타 등등. 마감이 필요하다고 외칠 때는 언제고. 마감 앞에서 한없이 게을러지는(아니, 딴짓에 부지런해지는) 사태. 딜레이, 딜레이, 딜레이. 딜레이의 연속은 딜레마로 빠진다. 



# 딴짓 목록에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물론 읽기. 그리고 보기와 듣기. 지난 8개월간 어슬렁거렸던 목록을 알차게 기록이라도 했다면 덜 억울한 마음일까. 그렇게.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써야 할 것도, 기억해야 할 것도, 쓰고 싶었던 것도, 읽었던 것도, 보았던 것도, 들었던 것도. 빠르게 사라진다. 매일 사라지는 것들.  



# 앤드루 포터의 신간 <사라진 것들>(역시 딴짓 목록 중 하나였다)은 사라진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각 단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십대라는 공통점은 주목할 만하다. '사십대'라는 단어가 주는 독특한 뉘앙스 때문일 것.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며 사라진 것들을 돌아보기 시작하는 모종의 진입로 같은 구간이 사십대 아닐까. 생각해보면 내가 일을 접고 한국을 떠난 것도 마흔이 되던 해이다. 강산은 또 바뀌어. 양쪽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아이는 집을 떠나고. 머지 않아 '사라진 것들'보다 '사라질 것들'을 생각하는 구간으로 진입하게 되겠지. 



# 다시 <사라진 것들>로 돌아와서. 앤드루 포터의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워낙 인상깊어서일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가슴 저릿한 예봉이라면. <사라진 것들>은 (시간에) 닳고 둥글어진 쓸쓸한 돌멩이 같은 느낌이랄까. 전자가 강렬한 흑백톤이라면 후자는 아련한 세피아톤? 두 작품 모두 개별적 삶에 담긴, 각자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지만. 뭐랄까. 전자가 서늘하면서도 깊은 응시에 가까운 기억이라면, 후자는 미지근한 동시에 씁쓸한 회고의 정서에 가까운 느낌. 문득. 백가흠의 소설들이 떠오른다. 그의 초기 단편들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고 찔러대면서 독자를 불편한 진실 앞에 데려다놓는 반면(나는 그의 <힌트는 도련님>을 수작으로 꼽고 싶다), 이후 <사십사>와 같은 작품에서 중년에 접어든 인물들을 내세워 시간의 흐름과 자기 성찰(연민)을 다루고 있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랄까. 그러고 보니 <사라진 것들>이나 백가흠의 <사십사> 모두 (우울한) 사십대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 지나간 시간을 쓸쓸한 감정으로 돌아보는 것은 분명 호소력이 있다. 그러한 느슨한 긴장감과 연결의 감정(그래, 내 마음도 그렇지,와 같은)이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읽는 이의 탓. 개인의 특수한 인생 서사와 자기 연민/성찰이 좀더 보편적인 맥락으로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왜일까. 



# 아마도. 나는. (이미 지나간) '사라진 것들'에 대한 미련 없이. (아직 오지 않은) '사라질 것들'에 대한 근심 없이. 오직 (지금-여기) '사라지는 것들'에만 집중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2024-3-5)




+ 연결.



얼마 전 우연히 CD를 뒤적이다 마릴리온의 음반 한 장을 발견했다. <Brave>. 내가 이 앨범을 가지고 있었나? 사라진 기억. 정작 <사라진 것들>을 읽다 떠오른 마릴리온의 앨범은 <Script for a Jester’s Tear>. 특히 ‘Chelsea Monday’는 꽤나 어울리는 듯.


https://youtu.be/3gPUqzxEhEA?si=Z67WNNf4IxFztw-W

Marillion - Chelsea Mo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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