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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15. 2024

그림 앞에서 울다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어린 소녀의 초상

그림 앞에서 울다니. 누군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믿지 않았다.


로스코의 그림이 대표적인 예. 감염되거나 학습되기 좋은 ‘어떤 정서’가 있다고 나는 추정했다. 로스코 열풍이 불던 어느 때가 있었고. 로스코를 좋아한다는 것이 예술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있어 보이는’ 모종의 트렌드처럼 여겨지던 때. 어느 순간부터 통용되는 조어 ‘있어빌리티’라고나 할까.


오래전 일. 신입사원 Y는 자신을 소개하는 짧은 프리젠테이션에서 ‘마크 로스코를 좋아한다’고 했고, 또 다른 신입사원 J는 자신도 그러하다고 반색을 표했다.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라는 문장이 어색하지 않게 수용되던 때라 나는 그들의 적극적인 표현이 모종의 트렌드와 연결된 것은 아닐까 의구심을 품었다.


구상보다 추상이 주는 가능성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따라서 추상예술이 주는 ‘어떤’ 정신적인 것, 무한한 공간, 넓게 펼쳐진 여백 같은 것에 끌렸던 것도 사실이지만. 꽉 차 있지만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떤 감각, 그 빈 공백이 넓을수록(넓게 느껴질수록) 작품이 나를 초대하는 강도가 높아진다,고 믿었지만(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나는 Y와 J가 표명하는 것에 대해 ‘진정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감정은, 취향은, 말은, 믿음은 정직한 것인가. 어쩌면 이 질문은 암암리에 나에게로 향한 것인지도 몰랐다.


‘진정성’이라는 복잡한 문제는 차치하고. 정직하다,는 단순한 단어에만 집중한다면. (물론 이 단어 또한 복잡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정직하다: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다.” 문제는. ‘정직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러니까 어떤 주체 A의 마음이 꾸밈 없이 바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것. 나는 나의 마음이 거짓 없이 바르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나의 마음도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인의 마음을(진정성을/정직함을) 의심하고 심지어 규정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역시 오래전. 예술의전당 마티네 공연을 간 적이 있다. 평일이었는지 주말이었는지, (평일이었다면) 연차를 내고 갔는지 반차를 내고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티네 공연다운 익숙하고 말랑한 레퍼토리가 펼쳐졌고. 내가 앉은 좌석 앞줄(대각선 위치)에 자리한 한 중년 여성이 눈물을 닦는 것을 목격했다. 그날의 다른 레퍼토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여성이 눈물을 흘리는 대목에서 흘러나왔던 곡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과연 틀림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아니, 어느 곡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여성의 눈물에 의아해하던 ‘나’를 다시 의아해하던 순간이 중요할 뿐.


타인이 어떤 작품 앞에서(그림이든 음악이든) 눈물을 흘리는 것에 의아해하던 나. 내가 흘리면 납득할 만한 눈물이 되는가? 음악을 들으며 눈물 흘리는 일은 이후 잦아졌지만(이것도 정확하지 않다. 눈물을 흘렸다기보다 눈물방울이 맺혔다는 정도?),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없었다.


그러나. 눈물방울이 맺히는 정도도 아니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흐느껴 울다시피 하는, 그런 있을 수 없는,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살다보면) 일어나기도 한다.


L에게. 이상한 체험을 했어.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뜬금없는 어떤 그림 앞에서 울어버림. 그림을 보며 흔들리거나 울컥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눈물을 쏟아낸 것은 처음 있는 일. 평소 좋아하던 그림도 아니고. 심지어 작가의 이름도 낯설게 다가오는 작품. 얀 페르스프롱크의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어린 소녀의 초상>. 17세기 네덜란드, 당대 유행하던 수많은 초상화들 중 하나로 여기고 무심히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평범해 보이는 어느 소녀의 초상. 왜 울었을까. 표정에서 무너진 것 같아. 애늙은이의 표정. 아마도 나의 소녀 시절을 투사했겠지. 10대의 나를 보았던 모양.


Portrait of a Girl Dressed in Blue Johannes Cornelisz Verspronck (C. 1600-1662) oil on canvas, 1641


미술 책자에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면, 국립미술관의 핵심 공간인 명예의 전당(Gallery of Honor)에 걸려 있지 않았다면 나 또한 지나쳤을지 모른다. 이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주요 컬렉션, 예컨대 렘브란트의 <야경>이나 <자화상>, 베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메이드>나 <연애편지>, <편지를 읽는 여인> 같은, 사람들이 늘 몰려 있는 곳이 아닌, 한적한 지점에서, 4세기 전에 존재한 어느 익명의 소녀와 마주치는, 그리고 그 소녀의 표정에서 무너지는 ‘나’를 발견하고 방치하는, 기이한 경험.


설명할 수 없는 소녀의 표정


“Why is this portrait so popular? Because it depicts an adorable child dressed in her Sunday best? As was the custom of the day, the young girl is portrayed as a small adult lady. That she is playing a role is betrayed only by her facial expression. Unfortunately, we know nothing about her identity or her family. Perhaps she resided in Haarlem, like the portraitist Verspronck.”


화가 자신이 살던 네덜란드 하를렘의 어떤 소녀를 그린 그림. 나를 사로잡은 것은 화사한 푸른 드레스도, 화가의 스승이 ‘프란스 할스’였다는 사실도 아니다. 소녀의 표정.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small adult lady’ 혹은 ‘facial expression’이라는 단어를 확인하자마자,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예정되어 있기라도 한 듯, 광폭하고도 맹렬한 어떤 것이 치밀어오른다. 그것은 서서히 나를 적신 것이 아니라, 한순간, 왈칵 엎질러지듯, 눈가로 내몰려 나왔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림 앞에 서서 울다가 전시실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잠시 눈물을 닦아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빈의 표정도 생각이 난다.


- 정상이 아니지? (그를 향해 웃으며 말한다.)

- 아니, 정상이야. (그가 정색하며 말한다.)


어이가 없네. 어처구니없다. 정말 황당하군. 이런 말들을 내뱉으며 나는 잠시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기이하고 희한한 체험. 심오한(그렇게 간주되는) 유명 작품도 아니고, 작품 표면에서 이미 격렬하게 요동치는 추상표현주의 작품도 아닌,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17세기 네덜란드 소녀의 초상 앞에서, 이토록, 서럽게, 눈물을 흘리다니. 나중에 사진을 본 L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네. 표정에 많은 시간이 덮여 있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은데. 내면에 담아둔 무엇이 보인다.”


그림은 그림을 보는 사람을 투사시킨다.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투사시킨 ‘나’와 투사당한(투사당할 것을 급작스레 강요받은) ‘나’ 사이의 적정 거리가 무너질 때. ‘나’는 순식간에 취약해진다.


3년 전에 쓴 노트 중:

“전시를 보러 간다는 것. 감응하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보러 혹은 들으러 간다. 전시장과 영화관, 콘서트홀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감응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에 나를 놓음으로써, 배가된 현장감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자극하고 고양하게끔 집요하게 내버려두는 것. 보고 듣는 대상 외의 모든 것을 잠시 밀어냄으로써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순간을 최대치로 느끼는 것. 전시를 보러 간다는 것은, 예술이라는 아레나(경기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의 모습(취약성과 욕망)이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브레네 브라운에 따르면 아레나(경기장)에 들어가는 것은 취약해질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나는 취약해질 준비를 갖추고 전시를 보러 간다. 그리고 전시에서 나의 취약성을 보고 온다.” (2021-2-15)


나의 취약성과 모호함의 영역으로 (자발적으로) 들어서는 것. 준비를 하고 들어가도 언제 어디서 공격을 받고 얻어맞을지 모르는 링 안의 복서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얻어맞고 돌아왔는데도. 불쾌보다는 쾌의 감정에 가까운 이것. 나는 얼얼한 부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질까 아쉬워한다. 적어도 이것만은 ‘정직한’ 감정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02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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