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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19. 2024

소음 혹은 소리에 관한 잡념

소음, 소리, 음악

# 2024년 6월 22일. 브뤼셀에서의 두 번째 밤. 새벽 2시에 눈을 떴다. 뜰 수밖에 없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 이 시간에 체크인이라도 한 건가. 쿵쾅거리는 소리,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 너무하잖아. 들려오는 소리로 미루어보건대. 여러 방을 나누어쓰는 한 무리의 미국인 가족. 아버지로 보이는(들리는) 남자의 거침없는 지시 사항들. 새벽 2시든, 다른 객실에서 사람들이 이미 수면을 취하고 있는 중이든, 개의치 않는 목소리. 계속 이어지는 문 두드리는 소리, 문을 세게 닫는 소리. 이어 어머니로 보이는(들리는) 여자 목소리 가세. 이 무례한 인간들은 언제쯤 조용해질까.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미국인 특유의 마무리 멘트. 엄마가 다른 방의 아이에게 건네는 소리. 해브 어 굿나잇. 아이 러브 유, 하니. 다른 객실에 있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바탕 떠들어대더니. 잘 자라-사랑한다-얘야,라는 깔끔한 마무리까지. 이런 코미디가 있나.


# 누군가에겐 불쾌한 소음이 누군가에겐 일상의 소리일 수 있다는 점. 시끄럽다,라는 기준. 똑같은 데시벨의 소리도 언제, 어디서, 어떤 맥락이나 상황에서, 누구(무엇)의 (목)소리인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 예전엔 공공장소에서 들리는 아이들 소리가 시끄럽기만 했지만, 이제는 다소 큰 소리로 울어대는 아기의 목소리도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때론 사랑스럽기까지.) 아무리 떠들썩한 카페에서도 내가 고도의 집중 상태라면 소음은 일종의 ASMR(다소 활기찬 ASMR?)이 된다. 비교적 조용한 장소라 해도 내가 예민한 상태라면 옆 테이블에서 나누는 차분한 말소리조차 극도로 거슬리는 소음이 되는 것처럼.


# 몇 달 전, B가 갑작스런 이명 증상으로 괴로움을 호소했을 때. 가끔씩 왼쪽 귀에서 삐이-하는 소리가 들려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살아온 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을 달고 산다며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B를 안심시켰(시키려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B의 근심 어린 목소리. “그러기엔 소리가 너무 큰데...” 적당히 무시하기엔 소리가 크고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W가 떠올랐다. W는 타이베이에 거주할 때 같은 아파트에 살던 한국인 이웃. 언젠가부터 그녀는 이명 때문에  우울해하고 있었다.


# 대만의 태풍은 유난하다.(모든 태풍이 유난할 테지만.) 지진에 익숙해질 즈음, 첫 번째 태풍을 맞았다. 전국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졌고, 집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비바람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거대한 거인이 상자를 흔들어보듯 직육면체 아파트를 두 손에 움켜쥐고 마구 흔들어대는 장면을 상상했다. 살면서 이토록 강력하고 기괴한 바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부서질듯 덜컹대는 집의 비명소리. 창밖의 가로수가 가로로 눕는 것을 지켜보는 것. 청각과 시각이 빚어내는 시너지는 굉장해서 신경은 종일 곤두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밤. 제대로 잠들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나는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음울한 저택 워더링 하이츠를 떠올리며, 비바람이 광기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았다.


# 뜻밖의 깨달음은 폭풍이 지나간 후. 아파트 카페에서 W를 만났다. 귓속 소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로 그녀가 얼마 전부터 프로작을 복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괴로움이라는 것도.


나: 이번 태풍 때문에 더 힘들었겠어요.

W: 그거 알아요? 태풍 덕분에 오히려 잠을 잘 잤다는 거.

나: 응…?

W: 음악도 소용이 없었는데. 바람소리 때문에 이명이 안 느껴져서. 간만에 깨지 않고 잤네요.

나: 아…!


거센 비바람 소리 ‘때문에’ 잠 못 드는 사람이 있다. 거센 비바람 소리 ‘덕분에’ 잘 자는 사람도 있다. 비바람은 아무 의도도 없다.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신경을 곤두세울지, 신경을 안정시킬지, 결정하는 것은 ‘듣는’ 이의 몫. (결국 ‘일체유심조’의 문제?)


# 한국에 도착하니 B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다.

- 넌 좀 어때. (짧게 B의 안부를 묻는다.)

- 좋아졌어. 마음의 안정. (B의 짧은 답변)  


# 소음에 괴로워할 것인지, 소음을 무시할 것인지, 소음과 잘 지내볼 것인지. 소음과 살아가는 방식 중엔 ‘소음을 즐기는’ 옵션도 있다. 예컨대 소음을 음악으로 연결시키는 아티스트의 시도. 쇤베르크 이후 불협화음의 차원을 넘어서는 현대 노이즈 뮤직(noise music). 노이즈 뮤직과 친해지지 않는 것은 여전하지만. (예컨대, 오토모 요시히데의 연주라든가.) 초현실주의, 미래파, 다다이즘, 아방가르드 등 소위 ‘실험적’ 혹은 ‘전위적’ 자질을 적극 수용하고 옹호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음악에 관한 한 급진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것을 볼 때. 이거야말로 부정교합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사람마다 불협화음/소음에 대한 역치가 다를 테니까,라고 바꾸어 생각한다. 미학적으로 급진주의적 면모를 보이는 자가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시각적 진보주의자가 청각적 보수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류이치 사카모토의 <async>(2017) 앨범 중 ‘andata’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처음부터 불협화음과 노이즈를 표명하는 것이 아닌, 익숙한 코드와 리듬으로 곡을 끌고가다가, 곡이 전개될수록 ‘다른, 이질적인, 어긋나는’ 소리를 감지하게끔 사운드를 삽입하고 쌓아올리는 과정을 세련되게 보여주어서일 것이다. (그의 ‘Bibo No Aozora’ 같은 곡이 다양하게 편곡되어 수용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지 않을까.)


# 아름다운 불협화음. 일견 형용모순처럼 들리지만, ‘안다타’를 들으며 나는 모종의 ‘감동’(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을 느끼기까지 했다. 뮤지션 정재일은 안다타를 들으며 ‘충격’을 받았다고 했지만. 뭐랄까. ‘밀도 높은 감흥’이라고 해야 하나. 음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 곡을 들으며 그랬던 것을 보면. (*이 곡에 대해 “멜로디와 노이즈의 이항대립을 탈구축한 음악으로 들린다”라는 댓글이 눈에 띈다. 공감한다.)


https://youtu.be/8naZALMglpo?si=Ygh7KrgGQ5THLKW9

‘andata’는 여러 버전 중 <async> 앨범에 실린 곡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다.



https://youtu.be/OQo4EosAhvA?si=YcYgzWjU7pOWqcwJ

‘Bibo No Aozora’는 트리오 버전이 좋다.


# 류이치 사카모토의 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는 앨범 <async>의 작업 과정에서 이우환 화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야기가 소개된다. 일본 미술계의 모노파(もの派)를 대표하는 이우환의 ‘모노(もの: 일본어로 물(物)/물체를 의미)’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물 자체에 대한 탐구와 관계에 착안하여 앨범 작업에 적용한 것. (책에서 그는 앨범 전반에 걸쳐 ‘사물 그 자체의 소리’를 목표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영화음악 분야에서도 입지를 다진 그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 음악을 제작할 때, 이냐리투 감독으로부터 받은 의뢰가 “We need layers of the sounds”라는 주문이 전부였다는 일화 또한 흥미롭다. ‘소리의 중첩’, 즉 흔히 생각하는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 아닌 것. (생각해보면 이냐리투의 <버드맨>에서 내가 받았던 강렬한 인상 또한 잊을 수 없는 ‘사운드’에서 비롯되었다.) 사물의 소리를 직접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삽입시키고 중첩시키는 것. “뉴욕 길거리에서 주운 돌을 툭툭 두드리고, 스윽스윽 문질러가며 그 소리들을 녹음해 그야말로 음악으로서의 ‘모노파’의 실현을 시도”한 셈이다. 그 중심엔 ‘어긋남’이라는 컨셉이 있다. 앨범의 제목이 말해주듯, 모든 것이 동기화(sync)되는 흐름에 거리를 두고 의도적으로 비동기(a+sync)를 구현하는 것. 사운드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의식적으로 비동기화된 소리는 얼핏 소음/불협화음으로(만) 들릴 수도 있다.


# 사람에 따라 ‘이질적인 소리’를 받아들이는 수용의 폭은 각기 다를 것이다. 아니. 이렇게 바꿔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질적 소리에 대한 인식의 폭에 따라 수용의 폭 역시 달라지는 것이라고. 마치 현대 개념미술 작품을 접했을 때와 유사하다고 해야 하나. 감성과 직관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작동시키는 것. ‘이게 뭐야’라는 신경질적 반응으로부터 ‘이게 뭘까’라는 호기심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어디쯤에 자신을 놓아두고 열어두는 것. 이를 위해서는 일말의 ‘탐험’ 감각이 필요하다. 새로운 방식의 ‘보기’와 ‘듣기’에 대한 요청. 자신이 무언가에 의해 ‘요청받고 있다’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 독일 드레스덴에서의 일이다. 드레스덴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미술관 ‘알베르티눔(Albertinum)’의 엘리베이터 안. 버튼을 누르고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소음을 감지한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떤 남자의 목소리. 웅얼거리는 것도 같고 흥얼거리는 것도 같고. 처음엔 엘리베이터 바깥의 소음과 뒤섞여 분명치 않았지만. 알고 보니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 그제야 나는 엘리베이터 벽면에 (작고 눈에 띄지 않게) 붙어 있는 종이를 발견한다. 아, 요셉 보이스의 작품이구나.


Joseph Beuys (1921-1986)
Ja Ja Ja Ja Ja, Nee Nee Nee Nee Nee
1969
Sound, digitized from audiotape of multiple 76/100
Archiv der Avantgarden
Staatliche Kunstsammlungen Dresden



# 지나칠 뻔한 ‘소음’이 유의미한 ‘소리’일 수 있다는 것. 소음과 소리는 이항대립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소음은 의미있는 소리가 될 수 있고, 소리는 의미없는 소음이 될 수 있다. 소위 ‘작품’이라 불리는 무엇은 인간의 다양한 감각을 자극해 오랜 이분법적 사고를 의문에 부치고, 경계나 위계가 사라지는 사태 혹은 현상에 대한 ‘감응’ 혹은 ‘사유’를 요청한다.


# 문득 이런 생각. 소음 혹은 소리에 관한 이 두서없는 글 역시 누군가에게는 소음처럼 들릴 수도 있겠군.


(202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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