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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24. 2024

마주침에 대한 잡념

피아니스트 박재홍과의 마주침에 부쳐

# 지난 6월 초. 오스트리아 빈의 한 골목에서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마주쳤다. 마주쳤다기보다는 5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그를 알아보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 앞쪽에서 걸어가던 그의 옆모습을 얼핏 보고 알아본 나는 걸음을 재촉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가 작고 좁은 골목으로 꺾어진다. 덩달아 따라간다. 어쩌다보니 F식당 바깥에 줄선 사람들 무리 속에 내가 섞여 있다. 알고 보니 하루 전날 내가 방문했던 식당의 본점. 졸지에 그의 뒤에 서게 된 것. 엉겁결에 나를 따라온 빈은 대체 왜 여기에 서 있느냐는 듯한 기색이고. 한국말이 들려와서인지 어떤 시선을 느껴서인지 그가 흘깃 뒤를 돌아본다. 확실하군. 박재홍과 눈이 마주친 나는 우물쭈물. 피아니스트 박재홍씨 아니세요, 라고 물어보고(아니, 말을 걸고) 싶었으나. 그가 동행한 외국인과 대화 중이어서 그만둔다.


다시 골목을 빠져나온 내게 빈이 묻는다. 누군데?

대충 설명하자 그가 다시 묻는다. 그런데? 말을 걸어서 뭐하게?

그러게. 생각해보니 그렇다. 뭐하러? 무엇을 위해?


나는 당신을 알아요, 당신을 알아봤어요, 이렇게 만나니 반갑고 신기해요, 뭐 이런 제스처일 테지만.


피아니스트라는 그의 정체성에 맞추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의 연주 좋아합니다, 베토벤 함머클라비어 해석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하콘에서의 연주 그리고 인터뷰도 흥미롭게 봤어요, 따위의 말들. 나는 그의 베토벤/부조니 음반을 들어봤을 뿐이고, 그의 부조니 콩쿠르 파이널 곡을 위시해 몇몇 인상적인 연주를 동영상으로 찾아본 것이 전부다.


그러게. 알아봄/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너’의 마음이 어떨지는 (내가) 알 수 없는 것.


자신을 알아보는 시선. 반가울까, 부담스러울까. 좋을까, 싫을까. 상황에 따라, 알아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 한국에서 부다페스트로 출발하는 날. 전날 먹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배탈이 난 나는 밤새 배앓이를 하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항버스 타는 곳까지 간신히 걸어갔고, 공항까지 무사히 가기만을 바랐다. 조금 뒤 빈이 누군가로부터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C가 조금 전 우리를 보았대. C라면 십수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빈의 직장 동료. 멀리 있어서, 긴가민가해서, 아는 척하지 못했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다. 구부정한 자세로 미간을 찌푸린 채 괴로워하며 걸어가는 내게 누군가 (그것도 가깝지 않았던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상황이라니. 반갑기는커녕 난감한 사태일 것.


# 불편한 사이였다면 말할 나위 없다. 한때 친하게 지냈던 M과 어이없는 계기로 관계가 끊어진 이후. 한동안 나는 M과 마주치는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10년 넘게 반복해서 꾸다보니. 꿈의 레퍼토리도 변하고. 꿈의 레퍼토리를 변화시켜야겠다는 나의 (꿈속에서의) 의지도 (꿈속에서) 구현되었다. 처음엔 회피와 외면으로 일관. 어떻게 해서든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특히 눈이 마주쳐서는 안돼. 이후 2단계. 마주치되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서둘러 헤어질 것. 그 어떤 만남도 기약하지 말 것. 3단계. 어쩌면 대화를 시도해볼 수도 있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어디 가서 차 한 잔 마시자는 시나리오. 그때 내게 왜 그랬는지 연유를 물어볼 수도 있고. 나를 이상한 사람 만들었던 것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있고. 억울한 마음이라든가, 해명하는 것 자체가 구차해지는 사태에 대한 분노라든가. 비분강개. 수치심. 한동안 그런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이토록 오래도록 앙금이 남을 줄은 몰랐다고, 이제 남은 것은 희미한 찌꺼기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런 말들을 ‘너’의 앞에서 발화하는 ‘나’의 모습을 꿈속에서나마 그려보길 원했다고. 꿈속에서 나의 행동은 2단계까지 나아갔지만. 더이상 M의 꿈을 꾸지 않는다. 현실에서 그녀를 마주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칠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은, 마주치고 싶은 사람을 마주치지 못해 애태우는 마음보다 강력하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꿈속에서 보는 경우는 드물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꿈속에서 마주치는 것은 지속적이라는 것. 나의 꿈이 말해주는 것이다. 불안은 소망보다 강하다. 근심은 희망보다 검질기다.


# 그러고 보니. 이사 후 집 근처 카페에서 J를 본 것 같다. 한 번은 멀리서(긴가민가한 상황에서), 한 번은 비교적 가까이서. 워낙 큰 키와 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터라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한때 친했던 사이. 그녀가 살던 바닷가 근처 자취방을 찾아가 뭔가를 같이 해먹었던 기억도 있다. 어떤 계기로 연락이 끊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불편한 이유는 분명 아니었다. 자연스레 멀어지는 사이. 시절인연. 이처럼 적절한 말이 또 있을까.


# 소설가 백수린은 이를 '관계의 생로병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내가 애초에 그리고 싶었던 것은 관계의 파탄이나 단절의 순간이 아니라, 어떤 관계가 꽃처럼 피었다가 결국 져버리는 과정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관계의 생로병사 같은 것."


자신의 단편 <시간의 궤적>에 부친 작가노트 중의 일부이다. 관계의 생로병사. 시절인연의 한 조각. M이나 J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나는 끄트머리에 있는 조각 일부를 붙잡고 있는 셈.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스러진 조각에 대한 어떤 이미지만을 붙들고 있는 셈.


# 스러져간 조각을 (굳이 다시) 이어보려는 노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J도 나를 알아보았을까. 알아보기를 원하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상대에게 알아봄을 굳이 표시하지 않는 것 또한 상대에 대한 예의일까. 자신은 알아봄을 당하는 것이 싫어도 상대가 알아봄을 숨기는 것을 목격하는 것도 싫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 자연스러운 것. 이보다 쉬운 것도, 이보다 어려운 것도 없다.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라도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길고 잔잔한 인연. 한 시절 밀도 높은 관계를 유지했다가 이내 성긴 그물처럼 느슨해진 사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짧고 짙은 인연. 멀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그렇게 놔두면 되는 일. 가까워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일.


# 살면서 예상치 못한 누구와 마주치든 이 '자연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억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라서. 또 그렇기에. 억지로 피할 것도, 억지로 만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 그렇기에. 작품을 만나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억지로 탐험하려 하지 않고. 억지로 장악하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와 마주친 것들, 자연스럽게 나를 매혹한 것들. 그 대상을 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나'의 말을 얹어보는 것. 억지로 아는 척할 필요도(현학적인 표현), 억지로 피하려 할 필요도(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편집증적 자기검열 같은 것. 언젠가 나는 'PC의 폭력시대'와 같은 '위험한' 주제의 글을 써보고 싶기도 하다. 물론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놔두어야겠지만...) 없는 그런 성숙한 경지엔 언제쯤 다다를 수 있을까. (물론 없겠지. 없으면 또 말고.)


# 몇 달 뒤 박재홍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있는 모양이다. 아티스트에게 소중한 것은 알아보고 아는 체하는 것보다 자신의 작품/연주를 찾아주고 좋아해주며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받는 것. 장승리 시의 한 구절처럼.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 정확하게 사랑하기. 벌써 10년 전. 신형철 평론가는 이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정확하게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해석과 비평의 어려움(이자 본질)을 이토록 아름답고 정확하게 차용하다니.  


"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해석은 기술이기 때문에 비평은 직업이 될 수 있다. (…)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내게 이를 가르는 기준은 ‘생산된 인식의 깊이’다. 해석으로 생산된 인식이 심오할 때 그 해석은 거꾸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한다. 이런 선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해석이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모든 해석자는 ‘더’ 좋은 해석이 아니라 ‘가장’ 좋은 해석을 꿈꾼다. 이 꿈에 붙일 수 있는 이름 하나를 장승리의 시 <말>의 한 구절에서 얻었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내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꿈이란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머리말 중에서


# 연주자는 해석자이다. 작곡가가 악보에 담아 놓은 것을 해석하는 자이다. 연주자에 따라 같은 곡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그 해석은 고스란히 듣는 자에게 전달된다. 연주자의 연주를 듣는 자 역시 해석자이다. 연주자가 담고자 했던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해석한다. 내가 해석한 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거나 글로 전달할 때. 그것을 듣거나 읽는 자는 다시 자신만의 렌즈로 이를 해석할 테고...... 해석의 연쇄.


# 바라는 것은. 마주친 것들로부터 의미 있는 해석을, 지혜로운 통찰을 얻는 것.


# 무슨 말을 하려다 여기까지 왔나. 헤매는 것은 나의 특기. 헤맴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예상치 못한 '무엇'과 '마주치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2024-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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