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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대한 단상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0.

나는 지금 싱가폴(싱가포르라 적어야 하지만 싱가폴이 편하다)의 어느 카페에 앉아 있다. 이렇게밖에 시작할 수 없는 문장에 대해 생각한다.


1.

작년 6월을 기점으로 시작된(아니 재점화된) 역마의 기운. 작년 가을 시카고행이 취소되었지만, 연말엔 치앙마이에서 몇 주를 보냈고, 올해 1월 삿포로행이 취소되었지만, 2월에는 독일에서 열흘가량을 보냈다. 지금은 싱가폴, 4월은 도쿄, 5월은...


연이은 출국 스케줄을 듣고 Y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을 추천했다. 여행하며 읽으라고. 기다릴 것도 없이 <방랑자들>을 읽었고. (끌리는 책은 당장 읽어야 제맛이다.) 프랑크푸르트로 떠나기 며칠 전 Y와 짧은 카톡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방랑자들>이 남긴 몇 가지 단어들을 떠올렸고, 이렇게 후감을 적었다.


"파편화된 텍스트, 여행심리학, 산책, 무목적성. 삶을 산책처럼."


Y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한동안 방랑자로 '지금 여기 내가 있음'의 (여행의 마지막) 단계까지 느껴보길.”


2.

나는 '여행'이라는 단어를 습관적으로 쓰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여행이라니. 관광이 아니고? 보통 우리가 떠나는 여행은 관광에 가깝다. 거기-있는-무엇을 확인하는 것.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경험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엇은 온통 나의 외부에 있다. 나의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촉각이 그 외부의 무엇들을 내부로 끌어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접속의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의 쾌와 불쾌를 유발하는 표피적인 차원에서 그칠 확률이 높다. 보다 + 먹다 + (사진으로) 찍다. 21세기, 대개의 여행(이라는 이름)에서 대개의 여행자(관광객)가 경험하는 것은 대개 이 세 가지 동사의 조합으로 수렴된다. 아, 한 가지 더. (SNS에) 올리다. 물론 다른 동사의 경우도 있다. 읽다. 듣다. 말(대화)하다. 드물게는, 쓰다(=생각하다).


3.

출장을 겸한 여행이 좋은 것은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강박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을 해봐야지’라는 관광 마인드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다. 여기까지 왔는데…그걸 봐야지 / 거기 가봐야지 / 이걸 먹어봐야지 / 인증샷 남겨야지……. 관광 모드에서 경험은 당위의 이름 아래 소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손해보는 느낌. 그도 그럴 것이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교통+숙박) 여기까지 왔는데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에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해할 만하다. 고로 나는/당신은 돌아다닌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또 다른 곳으로. 보다 많은 것을 보고 확인하기 위해 움직일수록 나는 (지금-여기-있는) 나를 잊는다. 나는 나를 온전히 외부 대상에 바친다. 이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선택과 취향의 문제일 뿐. 단지 우연히 마주친 어떤 것(여행 책자나 전형적인 여행 정보에서는 볼 수 없는)이 나를 매혹시킬 때, 이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과감하게 시간을 투자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


4.

여행 심리학의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욕망입니다. 바로 이 욕망이 인간에게 이동성과 방향성을 부여하고 어딘가로 향하려는 성향을 일깨웁니다. 욕망 그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그저 방향만을 가리킬 뿐, 목적지를 드러내진 않으니까요. 목적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고 불확실한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애매해지고 수수께끼 같아집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목적지에 다다르거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고군분투의 과정을 요약하는 딱 한 마디는 바로 ‘~로 향하는’을 뜻하는 전치사, 그러니까 영어로 바꾸면 towards와 같은 전치사입니다.


- ‘여행 심리학 - 짧은 강연 1’ 중에서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그러니까.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향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 이것은 ‘삶=여정’과 같은 (흔한) 은유에도 적용된다.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이다. 이동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나의 위치를 오롯이 느끼는 것. 궤적의 어느 한 지점에서 ‘내가 여기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이때 나는 외부에 나를 갖다바치지도, 내부로 침잠하는 데 골몰하지도 않는다. ‘지금 여기 내가 있음’이 어떻게 여행의 마지막 단계와 연결되는지 새삼 <방랑자들>을 통해 그 맥락을 확인한다.


나는 진보했다. 처음엔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뜨면 ‘나는 지금 집에 있다’ 하고 생각했다. (…) 그러다 결국 나는 여행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다음 단계, 그러니까 ‘모르겠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공간 감각을 상실한 채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처럼 전날 밤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디에 갔었는지,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왔는지, 세세한 항목을 자꾸만 돌이켜야만 했다. ‘지금’과 ‘여기’의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서. 복기의 과정이 오래 걸릴수록 나는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미로염 같은 것이다. (…) 다음은 세 번째 단계다. 여행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핵심적이고 궁극적인 최상의 단계다. 목적지가 어디던 간에, 우리는 항상 이런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치 않다.”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다. 여기 내가 있으므로.


- ‘여기 내가 있다’ 중에서, <방랑자들>


5.

‘저기-무엇이-있다’에서 ‘여기-내가-있다’는 감각으로의 전환. 이것이 ‘관광’에서 ‘여행’으로 이행하는 과정 아닐까.


(202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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