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거 싫으면 패스하시오
전에 썼던 건데 그냥 갑자기 다시 꺼내봤다.
그때 그 순간을 자꾸 되짚어보게 된다는 건 지금 마음이 질퍽거리기 때문이겠지....
세상이 잿빛이었다.
우울함이라는 감정 이외의 모든 것이 무감각하던 2018년 여름. 당시 내 일상을 요약하는 문장이다. 현재 시달리고 있는 가벼운 우울과 불안을 감지하며 그때의 감각을 되짚어봤다. 그 당시 깊은 터널을 터벅터벅 건너왔기에 지금 얕은 터널을 무탈히 견딘다는 생각과 함께. 심하게 휘청이다 넘어질 뻔했던 시간은 현재의 뒤척이는 마음을 감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2018년 여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랄리로 교환학생을 갔다. 꿈에 그리던 교환학생이었다. 심지어 일 년 동안 머물기로 했다. 팍팍한 인생의 달콤한 쉼표가 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야지, 하는 결심.
그 결심이 와장창 깨진 것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KTX의 속도로 달리다가 자전거의 속도로 사는 삶이라니. 삐걱거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의 후폭풍이 몰아쳤다. 완급조절에 실패한 삶의 자전거는 브레이크를 잃고 폭주했다. 미친 듯이 일거리를 찾았다. 무리하게 수업들을 신청하고 도서관에 파묻혔다. 밤에는 몇 시간씩 헬스장에서 운동을 했다. 마음이 썩어 문드러질 동안 몸은 바삐 움직였다. 가라앉은 마음과 발랄한 행동의 괴리.
그러나 폭주하는 자전거는 기어코 멈춰 섰다. 어느 날 아침,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지금 당장 이 공간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자리에서 샌프란시스코 행 티켓을 끊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순간순간마다 행복을 욱여넣었다. 생의 마지막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다음’이 없는 사람. 우연히 친구를 만났을 때는 어둠의 기운이 혹여나 새어나갈까 싶어 스스로를 꽁꽁 동여맸다.
그러다 문득 다시 랄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아슬아슬하게 연장하고 있는 마지막의 순간들. 이제 진짜 종지부를 찍어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 ‘죽고 싶다’는 생각과 ‘살아야겠다’는 무의식적 욕망의 발로가 교차하는 순간.
랄리 행 비행기 안에서 나는 눈물샘이 고장 난 사람처럼 울었다. ‘진짜 마지막이다’라는 결연한 정서가 마음을 온통 뒤덮었다. 그렇다고 삶을 마감해야겠다는 면밀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다. 더 이상 ‘그 다음 순간’에 대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둥둥 떠다니다 세포 구석구석으로 퍼진 상태.
"Soyeon! I missed you!" 랄리 집에 도착했더니 격한 포옹과 함께 나를 맞이한 친구. 미국 특유의 과한 제스처가 나를 반겼다. 5시간 정도를 울고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었다. 그리고는 친구와 가벼운 대화를 나눴고 새벽까지 영화를 봤다. 그러다 문득, 살았다는 안도감이 감돌았다. 가짜 웃음과 거짓된 활달함이라 믿어왔지만, 그날만큼은 그 가면에 기대어 하루를 살아냈다. 친구와의 가벼운 대화와 한 편의 영화. 그날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삶을 살아내는데 거창한 이유는 없다. 생뚱맞은 것들이 삶을 지탱해준다. 문제의 원인과 결과는 늘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삶은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명하려는 우리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그냥 순간순간 마주하는 온기와 사람들로 삶의 이음새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일상을 이어나가다 보면 삶이 되겠지.
미래에 랄리로 여행을 가고 싶다. 교환학생은 정주하는 삶과 이주하는 여행의 중간이었다. 깊숙이 뿌리내리지도 못하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없는 중간 어딘가. 그 사이에서 헤맸고 1년 동안 격랑의 삶을 살았다. 지금은 격렬한 진통을 겪은 후의 잔잔한 파도를 맞고 있다. 힘든 순간을 이기고 희망을 찾았다는, 역경 극복의 서사는 아니다. 다만 그때 느꼈던 ‘그냥 살아냈던 감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뜬금없는 것들이 내 삶을 붙잡았던 감각. 그런 의미에서 랄리는 과거이자 현재다. 지나간 경험이지만 그곳이 남겨놓은 마음의 자국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과거의 격랑과 현재의 잔잔한 파도. 자유로이 여행하는 ‘미래의 나’가 찾은 랄리에서의 감각은 또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