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히틀러가 세력을 장악하던 시절 수용소에 수감 되었던 경험과 그에 대한 단상을 담아낸 책이다. 저자인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낱낱이 묘사하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그 당시 경험에 대한 날카로운 고찰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특질에 대한 단상으로 확장하고 있다. 저자의 첫 저작인 <이것이 인간인가>이 감시관들과 당대 독일인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데 주안점을 둔 반면에, 이 책은 보다 이성적인 분석과 통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과 그 때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리며, 그 당시의 삶을 도덕적으로 포장하거나 윤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풍경으로 풀어낸다. 악에 항거했던 사람들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회색지대’에 존재하던 사람들을 묘사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분법적 선악구도의 어폐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다. 즉,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절대적인 선이고, 감시관들이 절대악이라는 양분화된 구조가 아니라, 수용소 내부에 존재하던, 하지만 은폐되었던 미시적인 선과 악을 들추어낸다. 또한 해방 이후에 환희가 아닌 수치심으로 가득 찼던 당시의 경험을 회고하며,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편견 어린 이미지를 시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시의 전경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한다.
나는 저자가 주관적 시선과 감정을 다소 배제한 채 현상을 바라봄으로써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이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책의 부록에 담긴 프리모 레비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는데, 그는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8장 독일인의 편지에서도 드러나듯이 저자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즉, 저자는 악행을 이해하고, 그가 몸소 겪었던 고통을 소통하고 싶어했다. 그러한 점에서 수용소에서의 삶과 풍경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분석하고 바라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이고, 따라서 저자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 삶의 환부까지 기꺼이 공개하는 용기를 발휘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저자의 목표에 맞추어 ‘고통의 소통가능성’에 집중하여 서평을 작성하고자 하며, 논의의 편의상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첫째는 고통을 소통하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서 ‘라거에서의 삶을 직시하기’로, 앞서 언급한 바대로 라거에서의 삶을 각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을 반영한다. 둘째는 ‘고통의 소통불가능성’으로, 이를 언어적 소통 불가능성과 본질적 소통 불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층위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이유는, 저자가 아무리 소통을 희구하더라도, 그가 내놓은 분석과 견해가 실은 소통 불가능성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통의 근본적인 소통불가능성에서 기인하기도 하는데, 이 내용 또한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라거에서의 삶을 직시하기-이분법적 선악 구도로부터의 탈피
주관성을 걷어내고 생존자이자 수감자로서의 정체성을 돌이켜볼 때, 저자는 “최악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점을 실토한다. 저자에 따르면 “라거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저자의 고백은 이분법적 선악구도의 어폐를 시사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생존자는 절대선으로, 나치에 부역한 사람들은 절대악으로 간주하여 양분화된 사고방식을 지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수감자 중에서도 권력에 충실히 복종하며 약간의 특혜를 누리던 특권층이 있었다. 또한 특권의 수혜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던 반면, 특권층 중에서는 생존한 이들이 배출되었다.
이를 통해 ‘피해자는 선이고, 가해자는 악’이라는 간단한 공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미디어나 언론에서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시하며 피해자를 무조건적으로 선한 존재로 조명하기 바쁘지만, 실상은 피해자 내부의 선과 악이 공존하며, 기실 명확한 선과 악의 구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삶은 ‘선’ 혹은 ‘악’이라는 하나의 가치평가로 환원되기에는 복잡다단한 맥락들이 얽혀있다. 그렇다고 ‘피해자들은 악하다’라는 과격한 주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는 절대선’이라는 고착화된 공식은 오류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피해자들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짚어낼 때 그들의 삶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저자가 중요하게 다루는 지점은 ‘회색지대의 존재’이다. 저자에 따르면 “라거 안에도, 또 밖에도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호한 회색 인간들이 존재한다.” 즉, 저자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나약하며, 대개의 경우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권력의 강압과 억압에 복종하고, 이를 묵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적극적으로 권력에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타협했다는 것이다. 존더코만도스에게 주어진 특혜란 몇 달 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것 정도였지만, 그 약간의 혜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동료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기꺼이 수행했다. 따라서 “정치적 강압은 모호함과 타협의 불분명한 영역을 만들어내며 이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회색지대에서 선과 악의 선명한 구별은 의미가 없다.
이는 자유주의적 기조에서 매우 핵심적인 화두로 꼽히는, ‘선택과 강요 사이의 양자택일’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면서, 선택은 자발성으로, 강요는 수동성과 대응시키며 이를 양립불가능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은 합법적이고, 이에 대해 개인이 오롯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정당하지만, 타인의 강요에 의한 행위는 불법적이고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거에서의 삶이 보여준 ‘모호함과 타협의 불분명한 영역’은 ‘개인의 선택’과 ‘나치의 강요’라는 양극단 사이 어딘가 즈음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이 ‘나치의 강요’에 가까웠고, 자발적 선택의 영역이 극단적으로 좁았던 것은 옳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특권 수혜를 위해 자발적으로 권력에 부역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저자를 비롯한 생존자들이 느낀 감정 또한 그 자체로 수용소에서의 복잡한 결을 방증한다. 프리모 레비에 따르면 “해방의 순간...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총체적으로 무너져내림을 느꼈다.” 또한 “그 후에 ‘수치심’, 즉 죄의식을 느꼈다는 것은 수많은 증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입증된 사실”이라고 고백한다. 만약 수감자로서의 삶이 절대적인 피해자였고, 나치 일당이 절대적인 가해자였다면, 출소 이후 해방감과 나치에 대한 적개심만이 들끓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적개심과 함께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 ‘수치심’이었다는 점은, 완벽하게 도덕적으로 떳떳하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선한 수감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수치심은 사회적 기대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규범을 준수하지 못했을 때, 즉 제 3자의 눈(사회적 규준)으로 자신의 상태나 행위를 평가할 때 발생한다. 환언하면, 수감자들을 약간의 도덕적 흠결도 없는 ‘선’으로 간주하는 세간의 기대는 허무맹랑한 것이었고, 이 기준에 못미친다고 판단한 수감자들은 필연적으로 수치심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
프레모 레비는 독일인을 이해하고자 했고, 그가 겪은 고통을 타인과 소통하기를 희구했지만, 그 간절한 바람은 요원했다.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은 두 가지 차원에서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본질적 소통 불가능성이고, 두 번째는 언어적 소통 불가능성이다. 전자가 수감자가 겪은 고통의 본질적 속성상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칭한다면, 후자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의사소통’의 실패를 뜻한다. 본질적 소통 불가능성은 고통의 불가해성, 수감자 내부의 분열, 근본적 소통 불가능성을 의미하고, 언어적 소통 불가능성은 수감자 내부의 소통 불가능성과 독일인과의 소통 불가능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층위는 상호배타적이라기보다는, 전자는 원천적인 불가능성에, 후자는 보다 표면적이고 일상적 의미에 초점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 소통 불가능성
우선 당시 대다수의 수감자들이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그 당시의 고통’을 인간의 언어로 복원해 타인과 나눌 수 없다. 이는 포로 생활 도중에 자살이 드물었던 원인을 언급한 부분에서 감지할 수 있다. 저자는 “첫째,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라는 점이다... 둘째, ‘생각할 다른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대부분의 경우, 자살은 어떤 형벌도 덜어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생겨난다는 점이다. 이처럼 포로생활의 힘겨움은 형벌로 인식되었고 죄책감은 해방 후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 제2선으로 밀려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분석이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는 바는 수감자들이 인간성을 박탈당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존엄한 인격체로서 고통의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동물적 감각이 한껏 돌출된 상태에서 고통을 ‘당한 것이다’.
이는 레비가 “어둠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박탈당했다는 의식을 되찾고 괴로워했다”라고 회고한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구절은 사람들이 수용소라는 긴 터널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기쁨을 만끽하는 대신,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점철된 감정의 뒤엉킴을 확인하는 부분이다. 이는 수용 생활 당시 상실했던 인간성의 감각을 되찾으면서 밀려오는 ‘인간의 감정’을 뿌리칠 수 없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따라서 잔혹한 수용소의 현장에서의 고통과 인간 일반이 느끼는 비참한 고통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극도로 피폐한 상태에서 밀려들어온 그들의 고통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여건이 여타 상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이었던 만큼, 일반적인 고통의 층위와는 결을 달리했다는 점을 짚고 싶다.
한편 일반적으로 인간성을 박탈당한 상태에서의 고통과는 상이한 정신적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바로 지식인이다. 책에 따르면 “대부분 육체노동이었던 라거의 노동에서, 일반적으로 교양있는 사람의 상황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나빴다. 육체적으로 힘이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나 농부였던 자신의 동료들에게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연장에 대한 친근함과 단련도 부족했다. 반면 날카로운 굴욕감과 박탈감, 바로 그 엔트뷔어디궁, 곧 잃어버린 존엄에 괴로워했다” 즉, 그들은 보통 수감자들이 겪는 감시관으로부터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고통이외에도, 인간 존엄성을 강탈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에서 오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지식인들은 수용 생활로부터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1차적 고통 이외에도, 인간의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가치를 박탈당했다는 2차적 고통을 인식함으로써, 이중의 고통을 짊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수감자라는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사람들이 축적해온 생애와 사회적 배경에 따라 판이하게 갈라지는 태도와 반응을 확인해볼 수 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에 익숙한 단순한 인간은 이유를 묻는 쓸데없는 고문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있었다.”는 저자의 언급을 통해, 지식인들은 일반인들과 다른 차원의 고통을 감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감자들에게는 동등한 크기와 정도의 고통이 부과된 것이 아니라, 유사한 피해 상황에 처했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와 강도의 고통을 부담한 것이다. 이렇게 유사한 경험을 가지각색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수감자들은 그동안 쌓아온 삶의 이력에 비추어 제각각의 정체성을 도출해냈다. 같은 피해를 둘러싼 다양한 정체성으로 미루어볼 때, 공통의 감정을 교감하며 ‘공동의 세계’를 재건하는 작업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라거 수감자들이 겪었던 고통은, 여타의 고통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불가해성을 특징으로 한다. 원래 고통은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예기치 못한 곳에서 엄습하기 마련이지만, 프레모 레비를 비롯한 수감자들은 그 어떤 비참한 고통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컨대 “라거에서 노동은 순전히 박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지, 실제로 생산 목적에는 쓸모없는 것이었다...그들의 노동은 고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구절은 다른 고통과의 질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대개의 경우, 고통을 주는 작업은 고통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고통이 필수 불가결하게 발생한다. 환언하면 고통은 그 자체로 추구된다기보다는 형벌이나 수익 취득을 위한 수단이나 부산물로써 기능한다. 이러한 점에서 라거 수감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이러한 고통의 불가해성은 고통의 소통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고통의 거의 유일한 효용이자 가치는 ‘고통이 깨달음의 단초’이다. 즉, 뼈저린 고통은 처절한 몸부림을 통해 소중한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고통을 겪고 있는 자아를 지긋이 직시하며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전의 삶과는 질적으로 단절하며 새로이 도약하는 단계로 전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위한 고통’을 겪었던 라거 수감자들에게 고통은 필연적으로 불가해하며, 그것을 깨달음의 씨앗이나 자원으로 변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고통을 매개로 타인과의 소통을 꿈꾸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에 앞서 면밀하게 검토해봐야 할 사실은, 기실 근본적으로 ‘고통 그 자체’는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똑같은 피해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고통은 개별적이며, 개인에게 있어 절대적이다. 따라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며, 개별적이고 절대적인 고통을 타인에게 꺼내어 보일 수 없다. 인간에게 단지 허락된 일은 고통의 크기를 비유적으로 묘사하거나 고통을 둘러싼 상황적 맥락을 나열하는 일이다. 따라서 고통은 직접적인 소통 자원으로 활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나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이는 ‘말’이 아니라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은 이룩할 수 없다. 소통은 말을 매개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상호적인 행위인데, 고통을 전달하는 행위의 핵심은 호소이고, 고통의 호소는 화자의 일방적 발화행위와 청자의 일방적 듣기를 강요한다. 고통의 호소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부재하며, 특정 내용을 언어에 담아 청자에게 전달하는 ‘말’과는 차이를 보이므로 소통의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고통의 호소는 타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후 그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그냥 묵묵히 들어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을 호소할 때 이는 소통의 매개인 ‘말’이 아니라 ‘소리’일 뿐이고, 따라서 고통의 소통은 불협화음으로 귀착된다.
-언어적 소통 불가능성
우선 수감자 내부의 소통 불가능성을 살펴보면, 물리적인 언어 장벽이 엄존했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라거에서 극소수에 속했던 이탈리아인들은 다른 수감자, 그리고 감독관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시끌벅적하고 분노로 가득한 소리들이 넘쳐나지만 무의미한 영화. 귀청이 터질 듯한 배경 소리에 잠겨 허우적대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사람들의 난리법석. 그럼에도 그 위로 인간의 말은 떠오르지 않는 영화”였다고 술회한다. 따라서 그들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며 부과되는 고통과, 옆에 있는 동료와 소통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이중고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언어가 감정과 생각을 교류하는 중요한 소통 수단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은 전면적인 고립상태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극악무도한 상황이 공통적이라도, 그 상황을 통해 느끼는 고통의 본질적 속성은 개별적이고 절대적이다. 고통의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고통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타인과 나누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감정을 터 놓으며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프레모 레비같은 경우에는 동료와의 연대와 소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내부의 의사소통 결핍에다 외부세계의 의사소통 결핍까지 더해졌고, 몇몇 라거에서 이와 같은 고립은 전면적이었다.”
또한 생존자들은 독일인과 소통할 수 없었다. 이는 수용 생활 도중 독일인 감시관과의 소통 불가능성을 의미하기보다는, 생존자들이 증언을 통해 당시의 삶을 반추할 때, 독일인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을 뜻한다. 예컨대 제 8장 ‘독일인들의 편지’에서 “그들이 ‘독일인들’일까요? 그리고 어쨌든지 간에 ‘독일인들’, ‘영국인들’, 또는 ‘이탈리아인들’, ‘유대인들’에 대해 단일체로 말하는 것이 온당할까요?...하지만 수많은 독일인들이 고통받았고, 부당함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죽어갔다는 사실을 제발 기억해주세요”라는 편지가 등장한다. 프리모 레비는 저작에서 독일인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을 시도하기보다는, 당시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치며 부정과 치부를 드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은 ‘독일인’이라는 범주에 자신을 포섭시킨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잔학무도한 행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대 독일인들과의 ‘구별짓기’를 시도하고 있다.
역사교사의 술회도 이와 유사하다. 교사에 따르면 “학생들은 이 시기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독일의 집단적 죄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하면 즉시 반대편으로 돌아선다. 심지어 많은 학생들이 언론과 자신의 교사들이 말하는 ‘내 탓’들에 대해 진절머리가 난다고 잘라 말하기도 한다.” 잘못된 행위는 악이고, 악은 규탄받아야 마땅하지만, 저러한 포악한 행위는 본인과는 무관하다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그들이 감당해야만 했던 고통은 궁극적으로 전 인류의 몫이고, 그 중에서도 독일인은 ‘독일인의 국민성’이 그들의 피에 흐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도덕적 비난과 책임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고, 양자 간의 분리를 통해 소통가능성을 모색해볼 수 있다. 전범들과 자신을 선명하게 구분하려는 독일인들의 태도와 반응은 도덕적 비난과 책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하나로 뭉뚱그려 이해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도덕적 비난과 (사회적) 책임은 분리될 수 있다. 수감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전범들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한 반면, 독일인을 비롯한 일반 사람들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잘못이 없을뿐더러 많은 경우 이러한 참혹한 행태에 무지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모두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책임은 질 수 있다. 사람들은 생존자의 증언을 경청하고, 당대 사회를 선명하게 이해하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며, 인류 사회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에 책임을 져야 한다. 후손들 또한 상처의 잔해와 발자국을 곱씹으며 고통받았던 사람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내야 한다. 이렇게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통해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프레모 레비는 당시의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풀어내며 타인을 이해하고 ‘고통의 소통’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 시도는 사실 닿을 수 없는 꿈이었다. 수감자들이 느꼈던 고통은 여타의 고통과 달리 유독 이해하기 어려우며, 수감자들 간의 정체성 차이로 인해 그들 간의 소통 또한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고통은 절대적이고 개별적이며, ‘말’이 아니라 ‘소리’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소통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픈 기억의 한 켠을 꺼내어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의 해상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렵고 어떠한 상식과 이성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고통을 마주하면서, 뿌리 깊은 좌절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음에도 이 작업을 완성한 것 자체가 인류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치명적인 고통의 심연에 침잠하지 않고, 그 고통의 맥락을 타인에게 정연한 언어로 서술한 저자의 노고는 괄목할 만하다. 좌절감, 수치심, 죄의식, 적개심, 분노 등등이 혼란스레 뒤엉켜도, 어지러운 감정을 뒤로 하고 이성적으로 실상을 바라보고 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려는 시도는 인류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앞서 고통은 본질적으로 소통불가능하다고 서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둘러싼 모든 것이 소통 자원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이 절대적이고 개별적이라는 속성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현상이고,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겪음’ 자체를 공유하며 위안을 얻고 타인과 교감할 수 있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이에 대해 적확한 언어로 상술한다. “그(고통의)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한다.....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절대성 자체가 ‘공통의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글을 읽고 씀으로써 고통의 ‘곁’에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세우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 가능하다고도 말한다. 이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사람은 고통받는 타인의 곁뿐만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게 되었다...자기 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세계를 구축하게 했다.”는 언급에서 알 수 있다. 즉, 타인과 자신의 고통에 대해 논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어렵지만, 글쓰기 작업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곁’에 ‘또 다른 나’를 상정하고 나와 ‘또 다른 나’간의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아마 프리모 레비 또한 글을 쓰면서 내면의 대화를 이루어내고, 이를 발판 삼아 타인과의 소통을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