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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숙 Monica Shim May 06. 2024

꽃 폭풍 속 카리조 플레인  Carrizo Plain

2023.4.15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만일 그대가 오지 않으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 만일 그대가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으리.' - 잘랄루딘 루미


 올해 기록적인 강우량을 보인 겨울 폭풍이 캘리포니아에 꽃 폭풍을 몰고 왔다. 3월 중순부터 여기저기 들려오는 슈퍼블룸 소식에 모두가 마음이 들썩였다. 슈퍼블룸이란 사막지역에 강우량의 증가로 예년에 비해 야생화가 폭발적으로 많이 피는 현상을 말한다. "안자보레고 사막이 꽃천지라네, 다이아몬드 레잌에도 꽃이 만발이래, 랭캐스터에 파피가 많이 피었데."  인터넷과 SNS엔 꽃소식과 꽃사진이 쉼 없이 올라오며 또 다른 슈퍼블룸이 일었다.


 사막기후인 캘리포니아는 긴 여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들과 산에는 기나긴 건기를 보내며 바싹 마른 들풀이 불쏘시개로 변해 불이 붙으면 거대한 산불로 번진다. 오랜 가뭄과 끊임없는 산불로 상처 투성이인 대지는 우기인 겨울이 되어서야 근근이 상처를 딛고 일어선다. 그리고 봄이 되면 언제 아팠냐는 듯 훌훌 털고 다시 생명으로 세상을 덮는다.

 

  마른버짐 번지듯 말라 볼품없던 민둥산들이 간만에 내린 비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신데렐라가 되었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나와 보라 유혹한다. 그 부름에 홀린 듯 길을 나섰다. 겨울비를 듬뿍 먹은 대지는 비의 은총에 보답하려 타던 갈증만큼이나 간절히 초록과 색색의 꽃을 피워냈다. 꽃들은 손에 손을 잡고 번져나가 군락을 이루고 봄산은 화려함의 절정을 이룬다.  노란 겨자꽃, 붉은 파피, 보라 루핀과 힐사이드 데이지 등이 지천에 피어 꽃세상이 되었다.


  Carrizo Plain National Monument는 중가주의 베이커스필드 서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태평양판과 북아메리카판이 만나는 산안드레아스 단층 지역으로 장장 8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평원이다.  대륙판끼리 서로 미끄러지고 부딪히며 양쪽 땅덩어리가 융기하면서 형성된 거대한 분지다. 늘어선 산들을 양쪽에서 눌러 찌그러트린 듯한 주름이 독특한 산들이 특징이다. 이곳은 2001년 National Monument(준국립공원 혹은 국가지념지)로 지정되었다. 살인적인 고온으로 여름엔 메말라 생물이 귀한 이곳도 겨울비의 은총이 내리면 어디서 그 많은 꽃들이 오는지 꽃천지가 된다.


 미서부를 남북으로 잇는 5번 프리웨이를 북으로 달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산들이 온통 초록옷을 입었다. 오랜 갈증 후에 키워내는 결실이라 더 애틋하다. 남가주에서 중가주를 넘어가는 큰 고개인 Tejon Pass를 넘어서니 평야가 펼쳐지며 보라색 루핀의 거대한 물결이 방문객을 반겼다.


  중가주의 드넓은 평원에는 사과 아몬드 오렌지 복숭아 과수 농장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들판은 생명의 소리로 가득하다. 대지는 지친 기색 없이 흘러넘치는 어미의 젖을 퍼주고 또 퍼주며 생명을 키워낸다. 나무는 땅속에서 뿌리끼리 서로 소통한다고 한다. 죽어가는 이웃 나무에게 영양을 나눠주기도 하고 서로의 영역을 사이좋게 배분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땅 속에도 정보가 오가고 베풂과 배려가 오간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대지는 말한다.


 166번으로 접어들자 포도나무들의 사열식이 벌어졌다. 전지한 나무들은 일제히 삭발한 이등병 마냥 말쑥한 머리에 같은 키를 하고 열 지어 있다. 봄 농사 준비에 바쁜 트랙터들이 나무 사이를 열심히 오간다. 카리조 평원 남쪽 진입로인 마리포사에 들러 가스를 채우고 장작을 샀다. 평원 안에는 주유소도 식당도 없기에 미리 가스를 넣고 점심도 먹었다. 차도 몸도 배를 든든히 채우고 카리조에 들어섰다.


  산길에 접어들자 듬성듬성 꽃무더기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갑자기 노랑꽃으로 뒤덮인 언덕이 나타났다. 거부할 수 없는 노랑의 유혹에 홀려 사람들은 차를 세우고 언덕으로 들로 빨려들 듯 걸어갔다. 꽃더미 속에서 사람도 한 송이 꽃이 되었다. 언덕아래 농장을 향해 걷는 연인이 화려한 수채화를 그려낸다.


 soda lake road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는 길 내내 꽃축제를 만났다. 산은 산대로 꽃모자를 눌러쓰고, 수십 킬로미터의 광활한 들에는 노랑 힐사이드 데이지가 지천으로 피어 현기증을 일게 한다.  수천 마리의 노랑나비가 내려앉아 가까이 오라 손짓하는 듯한 그 황홀경 속을 걷고 걸었다. 도대체 이 많은 생명들은 어디에 숨어있다 한꺼번에 나온 걸까. 빗방울마다 꽃씨를 품고 온 걸까.


 Soda lake이 푸른 하늘과 흰구름에 어울려 햇빛에 하얗게 반짝였다. 이곳은 한때 소금공장이 들어설 만큼 거대한 소금밭이었다. 우기엔 호수로 변하지만 건기엔 하얀 소금뻘이 펼쳐진다. 호수 주위엔 곳곳에 흰 소금이 드러나 꽃밭에 눈이 내린 것 같다. 맛을 보니 짰다.


 한 꼬마가 호숫가를 도는 내내 하늘이 무너져라 울고불고 가네 안가네 생떼를 쓰고 있었다. 젊은 엄마 아빠는 아이를 달래었다 윽박질렀다 어찌할 줄을 몰라 쩔쩔매었다.  "부모 노릇 쉽지 않지요." 했더니 젊은 아빠는 지친 표정으로  "결혼 전에 아무도 이렇게 힘들거라 말해주지 않았어요." 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과 원망을 내뱉는다. 그 말에 속웃음이 나왔다. 미리 알려주었으면 사랑에 빠지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았을까. 자식을 양육함도 꽃을 피움도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가능한 법.


 인포메이션 센터를 들러 지도를 얻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간단한 요기를 했다. 식탁 앞으로 꽃으로 만발한 들녘이 펼쳐져 있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 소박한 먹거리도 황제의 식탁 부럽지 않다. 소다레잌을 지나 세븐마일즈 로드로 접어들었다. 신이 아코디언 연주라도 한 걸까. 산들이 겹겹이 주름져 있다. 색색의 꽃무더기로 가득한 산은 물감을 마구 풀어놓은 팔레트였다.

 

 차박준비를 간단히 해 KCL캠핑장에 자리를 잡았다. 수도 시설도 없고 푸세식 변소 하나 달랑 있는 소박한 캠핑장이지만 꽃소식으로 찾아온 객이 많아 선착순인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꽃구경에 빠져 차례가 밀린 우린 캠파이어 자리가 없는 한적한 곳에 텐트를 쳤다. 준비해 온 장작을 피울 수 없어 아쉬웠다. 저녁엔 기온이 40도 아래로 내려갈 거라며 준비성이 철저한 남편은 큰 배터리와 전기장판까지 준비해 왔다. 밤에 별을 만날 욕심으로 40마일 밖 도심의 편안한 호텔을 포기했다.

 

 흥겨운 음악에 이야기꽃을 피우던 캠핑장은 밤 9시가 넘자 조용해졌다. 지상의 등불이 하나 둘 사라지자 하늘의 등불이 하나 둘 켜졌다. 세상사의 소음에 가려있던 내 모습이 침묵 속에서 보이듯, 세상 불빛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이 어둠 속에 서서히 드러났다. 성체조배를 하며 하느님과 둘만의 대화를 하듯 밤하늘의 별과 독대한다.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시를 노래하던 윤동주,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못다 헤는 까닭은 쉬 오는 아침과 청춘이 다하지 않아서라 했다. 청춘이 훨 지나버린 나는 가슴속의 별을 다 헤는가. 아침이 오기 전 내 안에 별을 하나 둘 헤어 본다.


새벽 여명에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이슬 머금은 들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대지에 아침 해는 장작을 넣어 불을 지피려 한다. 들풀이 몸을 휘저어 바람을 넣었다. 지펴진 열이 대지를 데워가자 세상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팬데믹으로 사라지고 깨져버린 시간을 보상하듯 자연은 생명을 피워 무지개를 띄운다. 이 빛나는 봄날 한철, 화양연화로 간직한 대지는 여름의 혹독함도 겨울의 매서움도 버틸 수 있으리라. 삶에 이런 봄날 한번쯤은 있어야 우리도 살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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