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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Apr 13. 2024

우울증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방식에 대하여

수많은 예시 중에 하나

 고통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 외부의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그 해결책은 명약관화한데, 정확히는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하다. 해결책은 없다. 그저 견딜 뿐이다.


 해결책이 없다고 해서 대응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중해야 하는 것은 견디는 방법이다. 으레 가장 쉽게 선택되는 약물이나 행위로 얻는 도파민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황을 속터지게 느리게나마 호전시킬 적어도 악화시키지 않을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그저 할 일을 하는 것 뿐이다. 맞춰둔 알람에 일어나서 플래너를 확인하고 전날 설정해준 오늘의 최우선 과제부터 체크한다. 내 경우엔 날마다 달라서 글쓰기이기도 하고 공모전 확인이기도 하고 이력서 돌리기이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에 대한 생일 축하이기도 하다. 며칠 전엔 투표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우선 실행한다. 자, 오늘의 할 일이 끝났다. 이제 설령 오늘 남은 모든 시간을 공허와 무위로 채운다 할 지라도, 적어도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최소한의 의미를 창출한 하루가 되었다.


 남은 시간은, 물론 의욕이 남는다면, 자유롭게 차선 과제 몇 개를 실행하면 될 것이다. 이 또한 날마다 달라지지만 늘 고정되는 것은 청소와 운동과 독서다. 이불을 개고 청소기를 돌린다. 날에 따라 빨래나 책장의 먼지청소, 화장실 타일의 곰팡이 제거를 하기도 한다. 이후엔 산책을 한다. 주로 나 사는 고시촌에 가까운 관악산에 간다. 스트레칭과 약간의 근력 운동을 겸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재미있는 것도 재미없는 것도 있고 별 영양가 없는 것도 있고 문장마다 의미가 충만해서 쉽게 다음 장을 넘길 수 없는 것도 있다.


 차선 과제마저 모두 달성하면 그 날의 남은 시간은 놀면 된다. 죄책감과 불안감은 생각치 않아도 된다. 이미 오늘 할 일은 모두 초과달성했으니까. 물론 모든 차선 과제를 해내지 못하고 하루가 끝나기도 하지만, 상관없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최우선 과제를 달성하지 않았는가.


 이런 날을 사흘, 일주일, 한달, 일년으로 늘일 수 있다면, 어느 순간 전보다 나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한창 직장을 다니던 2, 3년 전에 시작했다. '최소한의 의미를 창출한 날'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며칠째인지 체크했는데, 500일 정도 지나서는 체크하는 것을 그만뒀다. 아마 지금은 1000일 남짓 됐을 것이다. 물론 인생이 딱히 드라마틱하게 변하진 않았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손가락 끝조차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우울과 고통도 여전하다. 그저 이전의 삶의 행로에서 아주 미세한 각도차를 만들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미세한 각도는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에 까마득한 거리를 만들어줄 것이다. 물론 이미, 전보다는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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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한 '우울증 극복 수기' 같은 게 다 헛짓으로 느껴지는 건, 우울증은 고혈압처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안고가는 질병이라는 것은 차치할지언정, 정작 우울증에 시달릴 때는 그런 글을 읽고 싶지 않고 읽는다 한들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실천적이고 실용적으로 써보자하는 생각이었는데 다 쓰고 보니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오늘치의 의미는 창출했다고 마음대로 믿어버리기로 하자. 이제 남은 시간은 자유롭게 놀아재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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