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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Oct 04. 2024

천서 天瑞

습작 꽁트 3


 3년 전,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친구 河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도쿄 오차노미즈(お茶の水) 역 근처 고서점에서 구했다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鷄林野史(계림야사)』라는 제목의 형편없이 낡은 책이었다. 군데군데 책장이 찢어져 중간 내용이 생략되었고, 겉표지와 책 뒷부분은 아예 통째로 떨어져 나가 제목 외에 다른 정보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제목조차 나중에 덧붙인 듯 했다. 약 70여 년 전 신뢰할 수 없는 야사와 구술된 역사, 민담을 마구잡이로 옮겨 넣은 책으로, 보관상태도 나쁠뿐더러 내용도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 한국인 주인의 설명이었다.


 주인의 말을 흘려들으며 책을 뒤적이던 중, 河는 그 책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약 네 쪽 분량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생소한 이름의 국가와 왕이 등장하는 낯선 이야기로, 출처는 나와 있지도 않았다.


 호기심이 생긴 河는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그 이야기에 대해 물었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잡학자인 내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가난한 유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수준의 국제 통화료를 감수하고 연락했다는 것이었다.


 河는 내게 그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전해주었다. 나도 처음 접하는 내용이었다. 말이 많아질수록 통화료가 올라가는 것을 의식한 그의 설명이 지나치게 간략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나는 河에게 그 원문을 그대로 타이핑해서 이메일로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번거로움을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 후 며칠간 그가 잠들었을만한 시간에 시도한 여섯 차례의 국제 통화 끝에 河의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가 보내준 원고를 받아 보기위해 2주의 시간과 네 차례의 독촉 전화가 더 필요했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에 의한 것인지 河의 성의 없음 때문인지 몰라도— 아직도 그가 원문을 충실히 옮긴 것인지 의심이 간다—그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은 기대에 부풀어있던 나를 실망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전 보름간 원고를 보기 위해 애썼던 열정과, 내용까지 망각해버렸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최근 친구 殷과 술을 마시던 중,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했던 그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殷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서가 언급하지 않은 인물, 왕조, 심지어 국가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대부분 이북에 위치해 찾을 수 없고, 기록을 찾아보려 해도 일제 강점기에 수십만 권의 사서를 잃었기 때문에 실태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河와 그가 전해준 이야기가 떠올릴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河가 보내줬던 원고 파일은 언젠지도 모르게 잃어버렸고, 그와는 연락이 끊겼다.


 결국 기억에 의지하여 그 원고를 복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지금 그것을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비록 3년 전 봤던 원고와 똑같을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부적절한 표현이나 어색한 문장, 쓸데없이 어렵고 낯선 단어로 느껴졌던 것조차 최대한 그대로 복원하리라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 * *



 사달 무증왕 때, 사달 전역에서 흰 동물들이 나타났다. 흰 호랑이, 흰 사슴, 흰 거북이, 흰 까마귀 등의 동물들이 때로는 한 마리 씩, 때로는 수백 마리의 무리를 짓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두고 민심이 어지러워 그 혼란이 궐에 이르렀다.


 이에 임금은 수부에서 가장 성칭이 높은 복인을 불렀다. 며칠 후 폐의파립의 늙은 복인이 궐에 찾아왔다. 임금은 그를 시험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들에 대한 복인의 대답이 사실과 미소한 어긋남도 없었다.


 복인에게 통력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된 임금이 물어 가로되,


 <지금 사달의 형편은 극난하기 짝이 없소. 강린의 침입과 내분으로 투전이 끊이지 않고, 지방에는 혹리가 수두룩하며, 옥에는 패륜을 저지른 죄인들이 들어차 빈 곳이 없고, 각지에 적도의 무리가 들끓고 있소. 바다에는 폭풍이 일어 어수들은 고기잡이를 할 수 없을 지경이고, 땅에는 비 한 방울 없는 가뭄으로 벼의 수확 또한 기대할 수 없소. 이에 백성들은 강비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여 입을 줄이기 위해 자식을 버리니, 소년은 유걸이 되고 소녀는 가창이 된다고 하오. 조신들은 이러한 국난에는 관심 없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힘을 쏟으니, 짐은 이 나라와 어린 백성들이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 없소. 이럴 때 흔히 볼 수 없는 흰 동물들이 나타났다고 하니, 이는 장차의 국운을 암시하는 하늘의 징조로 의려되오. 짐이 직접 확인한바 그대는 하늘의 뜻을 읽을 만한 통력이 있으니, 이를 능히 해석할 수 있을 것이오>


 이에 복인이 대답해 가로되,


 <폐하, 하늘의 징조는 사람이 밝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연히 그 뜻을 드러내는 것이니, 소인이 감히 그 이치를 해석해 널리 알린다면 천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지만 복인은 임금의 거듭된 간원에 강종하여 점을 쳤다.


 <흰색은 화합과 평화를 뜻하니, 흰 동물들의 출현은 사달이 곧 감정되어 백성들의 민심이 평안히 가라앉고, 분란과 투쟁과 반목이 사라져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라는 대단히 상서로운 가조입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복인에게 상을 내렸다. 그러나 복인은 황금과 백은, 금사로 꽃을 새긴 비단과 귀한 향, 청동거울과 선금를 새긴 연죽을 모두 거절했다. 이유를 묻는 임금에게 복인 가로되,


 <소인은 이미 늙어 허리가 굽었으니 저 많은 금은을 들고 갈 수 없고, 옷은 지금 입고 있는 흰 옷 한 벌로 족하니 비단 또한 필요 없으며, 향은 그 내음이 익숙지 않아 머리를 혼란케 할 뿐이고, 늙어 주름진 얼굴을 비추는 거울은 차라리 벌이라 할 것이며, 연죽은 단죽에 익숙한 소인에게는 너무 길어 소용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곧 이 나라에 오게 될 태평성대는 소인의 점복이 아닌 폐하의 준덕과 어진 치세에서 오는 것이니, 소인은 저렇게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사옵니다. 차라리 소인에게 내리실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내리면, 백성들도 함께 나라의 기쁨을 누리고 그로써 하제의 덕을 더욱 널리 펼칠 수 있을 것이니 그 뜻이 제법 장하다 할 것입니다>


 복인의 말이 옳다고 여긴 임금은 감결을 내려 이제 곧 사달에 태평성대가 찾아올 것임을 널리 알리고, 또한 감고에게 명해 개창하여 백성들에게 재물과 양식을 내리니, 벽곡과 백악으로 연명하던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임금의 홍은을 높이 기렸다.


 임금은 복인을 곁에 두고 싶어 했지만, 그는 너무 큰일에 점을 보느라 통력을 모두 소삭했다 가탁하여 물러났다.


 복인이 떠나고 열흘이 지났다. 임금과 조정의 신하들은 태평성대를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났지만, 사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임금이 장태탄식하며 가로되,


 <가통할 노릇이로다. 내가 투미하여 그 패악한 늙은이의 간흉계독에 속았구나>


 임금은 복인을 찾았지만, 일 년 전 궐에서 나오는 그를 봤다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임금은 대한하여 일 년 전 백성들에게 내렸던 재물과 양식을 도로 거두라 명하니, 통국이 임금을 원대했다. 그 후 반란과 내분이 끊이지 않던 사달은 몇 년 후 슬하에 자식이 없는 무증왕이 붕하자 사분오열하여 멸망했다.


 사달 전역에 나타났던 흰 동물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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