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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r 01. 2024

면역과 피드백

작업 노트 2


24.03.01



스케치 #1


… 모든 역사는 면역체계의 투쟁이다. 이 역사는 보호주의와 외부화의 역사와 동일하다. 보호는 항상 지역적인 자기에 관련되고, 외부화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익명의 환경[주변 세계]에 관련된다. 이 역사는 자신의 것의 승리가 이질적인 것의 패배를 대가로 치러야만 했던 인간 진화의 시기들에 걸쳐 있다. 그 안에 국민들과 기업들의 신성 이기주의가 지배한다. 그러나 ‘세계사회’가 한계에 다다르고 지구를 그 깨지기 쉬운 대기권과 생물권의 체계들을 비롯해 최종적으로 인간 활동의 제한된 공동 무대로 구현해왔기 때문에 이 외부화의 실천은 어떤 절대 한계에 부딪힌다. 그때부터 전체의 보호주의가 면역 이성의 명령이 된다. 전 지구적 면역 이성은 철학적 이상주의(관념론)와 종교적 유일신론에서 이 이성의 선취들이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을 전부 합해도 완전히 한 단계 더 높이 있다. 이 이유에서 일반 면역학은 형이상학의 정당한 후계자이자 ‘종교들’의 실제이론이다. 이것은 자신의 것과 이질적인 것에 대해 지금껏 해온 구분들 전체를 넘어서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친구와 적에 대한 고전적인 구분들은 와해된다. 지금껏 자신의 것과 이질적인 것을 분리하던 노선을 계속 가는 자는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면역 상실을 내고 만다.

-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P. 708-709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의 책 제목은 익히 알려진대로 릴케의 시구에서 따왔다. 슬로터다이크 역시 도입부에서 '돌에서 나오는 명령: 릴케의 경험'이란 제목으로 해당 내용의 의미망을 보다 탄력적으로 확장시킨다. '예술가'가 되고자 몸부림치며 살았던 릴케의 삶 여정 중 강한 이끌림으로 만났던 '로댕'은, 해당 시구가 탄생할 수 있던 강력한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의 체험이란 파울 첼란의 문장 "시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내맡긴다"를 서브로 받아 슬로터다이크가 재서술하는 문장, '자기 자신을 내맡기고 시험에 들도록 유지하는 것은 감히 뛰어넘을 수 없는 권위를 얻는다'와 같은 체험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체험의 표현이 정말로 그러한가 물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실 호기심어린 눈으로 한 문장에 눈길을 한번 줄 수도 있다. 그건 바로 '돌에서 나오는 명령'이다. 여기서 말하는 돌은 우리가 흔히 아는 돌이자,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돌이다. 가타부타 하지 않고, 윅스킬의 문장을 빌려와 보자.


… 돌의 형태, 돌의 무게, 돌의 다른 물리적 특징들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것의 색, 단단함, 결정형의 형태 등등은 동일하게 남아 있다. 그럼에도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즉 그것의 의미가 변한 것이다.

-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야콥 폰 윅스킬, P. 140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대상 중 하나로 돌이 선별되는 건 여러 이유를 기술할 수 있겠지만, 윅스킬이 말하듯 그것이 '의미의 담지자'로서 제격이기 때문에 채택될 수 있는 거라고 여겨진다. 돌려 말해 무엇이 의미의 담지자가 될 수 있을까?라고 마치 대상의 속성에 따라 그것이 조건지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부터 표상주의의 함정, 유물론의 함정, 경험론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덫이 놓여 있다. 우리는 외부 세계에서 지각 가능한 여러 대상들을 향한 여러 정신 활동으로 말미암아 대상들을 구분하고, 받아들이고, 의미를 느끼고, 통제하고, 조작한다. 대상을 두고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지고, 경우의 수는 늘어나고, 따라서 관점의 확장을 통해 복잡도가 올라간다. 여기서 말하는 복잡도는 아직 연결이 활성화되지 않은 단순 나열, 그러니까 외연이 확장되는 양의 증가다. 이런 양의 증가를, 우리는 비의식적으로 한다. 비의식적으로 한다는 건 자신 스스로가 '연상'해내는 그 태도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의식을 다른 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 행동을 가능케하는 온갖 의식적 활동을 비의식이라 할 수 있다. 알려진 통념에 따르면 이 지점을 우리는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의 모험 덕분에 우리는 의식을 구분짓는 의식의 의식적 언어 도구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을 엄밀히 구분짓고 판단해 사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프로이트 또한 자신의 '가설'이 들어맞는지 실험적 태도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정이 이뤄지고, 때로는 폐기되기도 한다. 반대로 그런 실험을 하지 않고서 사회-문화에 제공된 어휘를 수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이 스케치는 '면역과 피드백'을 주제로 발산하는 흐름을 갖고 있다. 


 통념이란 우리가 별다른 노력과 실망 없이 채택해 사용할 수 있는 관념이다. 그것들은 대개 어휘로 모양난다. 예를 들어 불과 10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통념 상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난 '남성-여성'을 둘러싼 어휘들이 있다. 그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여지고,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행동 양식과 사고 방식, 가치 판단 체계와 맞물려 있는지를 문제시하지 않을 때 그것은 '블랙박스'로 있다고 할 수 있다. 블랙박스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지닌 은폐-기록-감시라는 코드로 피드백되기 때문이다. 블랙박스의 통념은 주로 자동차의 부차적 장치다. 하지만 가장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네트워크 연결망으로 묘사하면 '허브Hub'가 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역할을 지닌다. ANT 이론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결정적인 행위자-비인간'이다. 왜냐하면 블랙박스가 요청되고 호출되는 상황이 무수한 자원과 힘을 필요로 하는 '문제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문제 상황이 지닌 강도가 어떠냐에 따라 관여하는 장치 간 중요도가 선별된다. 좀 더 첨언하자면, 블랙박스는 '법, 제도(보험, 재산, 병원, 수리 등을 둘러싼 '항목-절차'의 집합체), 나아가 신체를 둘러싼 가치 충돌'의 판도를 휘두를 수 있을 만큼의 권위를 지녔다. 평소에 그것은 은폐되어 있다. 우리의 의식에서, 다른 차량과 보행자의 시선에서, 운전자의 '조작'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의 주 기능은 감시와 기록이다. 감시와 기록은 그것의 피대상자로 하여금 여러 행위들에 개입한다. 은폐된 블랙박스가 가시화될 때는 대개 사건 사고가 일어났을 때다. 만약 그런 사건 사고 없이, 충돌 없이, 갈등 없이 가시화될 때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쉽게 말해 '필요가 없다'.


 이 행위들이 은유로 종합되어 '성 역할'을 둘러싼 여러 가치 체계에서도 유사한 작용을 보인다. 돌아가 말하면, 통념이란 곧 블랙박스다. 그것이 문제시되지 않을 때는 최소한의 에너지로 다루고, 그때의 의식 상태를 '비의식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수정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혹은 왜 수정되어야 한다고, 난데없이 '균열'이 나타나는가? 그런 거시적인 현상의 연원을 하나하나 추적하고 찾기엔 인간 정신은 유한적이다. 다만 비의식적 흐름 속에서 분명 누적되던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마저 비의식적으로 처리되어 은폐되었고, 그것들이 활화산이 되어 난데없이 분출하게 된 것이라고, 들끓는 용암으로 터져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그 막대한 에너지의 이면으로 현재 '저출산'의 흐름에 진작에 들어섰다. 주가가 빠질 때 미친듯이 빠진다는 건, 그 기울기가 가파를수록 여파는 점진적으로 누적될 수밖에 없다. '집단의 흐름'은 개인이 결코 어떻게 조작하고 할 수 없는 일이다.


 반면에 이런 통념을 과격하지 않게, 폭력적이지 않게 수정하고 다루는 보다 안정적인 접근이 있다. 역사적으로 그 효용성을 인정받은 방법은 거의 유일하게 '언어를 통한' 접근이다. 세상의 변화는 그게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절대 아무런 '문제'없이 다뤄지지 않는다. 한 인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무언가의 정신을 내놓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둘러싼 효용, 가치, 의미 들을 판단하는 데 반드시 '비의식'이 수반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우리는 의식되는 것들만을 다루지만, 비의식은 의식이 다룰 수 있게 돕는 것과 동시에 의식이 다루지 못하는 것을 다루지 못하도록 돕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왜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매듭을 짓자면, '돌'이 왜 의미의 담지자인지, 그것이 왜 제격인지를 가시화시키기 위함이다.


 융은 가장 비천한 것이 가장 가치있다는 연금술의 정신을 우리 인간의 '정신'과 연결시켰다. 이는 게오르그 짐멜이 대도시와 '화폐'를 연구하며 서술한 문장과도 연결된다. '화폐는 가장 비천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가장 비천하다는 것은 의식의 입장에서 그 어떤 효용도, 의미도,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 흔하고 널린, 진부해진, 지루해진, 클리셰 범벅인, 자극적이지 않은, 도파민을 자극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비의식'의 표면이 더 선명하다. 적확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비유를 들고 싶다. 비의식은 꽝꽝 얼은 호수의 표면과 물이다. 의식은 그 위에서 미끄러질 수 있는 행위다. 우리 인간은 성찰과 반성 능력을 깨어 있는 내내 On시킬 수 없으므로 의식 행위만을 수행할 때가 잦다. 하지만 의식이 비천한 것을 향할 때, 여러 흥분과 자극이 사라질 때 바닥과 그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돌이 의미의 담지자로서 제격인 것은, 그것이 가장 비천한 것이기 때문이다. 돌은 인간으로 하여금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이 돌에게서 그에 상응하는 반대의 것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돌의 입장을 인간은 알 수가 없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식물도 그렇다. 인간이 아무리 '종'에 대한 관찰 및 연구, 각각의 물질 상태에 대한 메커니즘 등을 이성적으로 의식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구조를 벗어난 구조에 대해 지각할 수 없다. 그래서 돌이 인간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고 볼 수 있고, 돌이 스스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은 온갖 사물들을 자신의 구조에 맞춰 다루고, 판단하고, 구분짓고, 어휘와 연결시킨다.


 지금까지의 나는 바로 이런 태도가 몹시 불만스러웠다. 이런 태도를 싸잡아 '인간중심주의'로 묶었다. 인간은 대상과 사물들을 소외시키면서 자기 자신을 고양시킨다. 그것들을 마치 안다는 듯, 그것들이 마치 그렇게 한다는 듯 여기기를 아무렇지 않게 다룬다. 특히 '감정'에 대해서 더더욱 그렇다. 깃발을 보고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오만해도 이렇게 오만할 수가 없다. 인간들은 대상을 두고서 자신의 정서나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투사한다. 심지어 그걸 즐긴다. '미학적'이라는 2차 체계도 만든다. 내 눈에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죄다 '블랙박스'다. 의심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며, 심지어 터부로 둔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처럼, 건드려지는 순간 과도한 감정 반응 혹은 도덕적 반응을 일삼는다. '비인간'을 함부로 다루는 이들이 자신들을 향한 비판자들에게 '비인간적'이라고 되돌린다. 내가 느끼기론 21세기 현대 사회가 지금 딱 이렇다.


 이런 내용이 바로 슬로터다이크가 말한 '세상에 대한 면역 상실'이다. 인간의 정서-감정, 정동 반응은 여지껏 블랙박스였다. 그것이 구조적으로 문제시된 적은 역사상 전무했다. 간혹 몇몇 소수자들이 이런 구조를 건드리고, 문제시 삼기도 했다. 당연히 그들의 문제 상황은 타당했지만 세상이 받아들일 만한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중후반부터 이와 연결되는 각종 이론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건 시대 상황이라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마뚜라나 바렐라 선생들의 용어를 빌리면 구조접속의 변형이다. 그 구조적 가닥을 하나하나 밝히는 건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응을 해야 하는 개체의 입장에선, 필요하다면 결국 취해야 한다. 내가 느끼기로 여기에 수반된 여러 거시적 조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산업화 이후로 나타난 '사물'의 과잉, 인구의 과잉 집중으로 말미암은 '대도시화',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의 증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이미지의 출현, 해당 이미지를 가공할 만한 속도로 물리적 거리를 무시할 수 있는 '인터넷-미디어'의 등장. 이런 요인들이 어째서 인간으로 하여금 무수한 사물들의 관계를 인식해야 하는 요청이 되는지, 무수한 타자-집단들과의 상호작용을 인식해야 하는 요청이 되는지, 인간중심주의와 '지구'라는 거대한 인류의 '집'을 문제로 다뤄야 하는지 연결되어 있다. 블랙박스가 개봉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눈에는 그중 가장 '결정적인' 블랙박스가 바로 인간의 정서-감정, 정동을 담고 있는 블랙박스다. 


 돌에서 나오는 명령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향한 개체발생을 유발하는 '환경'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향상시키기 위해, 역량 강화를 위해 자기계발로 나아가는 유아론이 아니다. 더욱이 실제 돌이 결코 그럴 수 없다며 명령은 무슨 명령,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는 유물론이 아니다. 후자의 태도는 예수의 석고를 보고 기도를 하는 수많은 사람을 멍청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태도다. 인간 정신은 실로 놀라운 역량을 지닌 게 사실이다. 가장 비천한 것을 가장 숭고하고 신성한 것으로 다룰 수 있으며, 있지도 않은 대상을 있는 것처럼 다룰 수 있으며, 심지어 이 모든 일련의 활동을 '자체 피드백'으로 다룰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문장의 의미다. 릴케는 이 시구를 다음과 같은 시어로 구성했다.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안에서는 눈망울이 무르익어갔을,
그 들어보지 못한 머리를 우린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뒤틀려 박혀 가만히 빛을 발하고 있는
그의 몸뚱이는 커더란 촛대처럼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가슴의
만곡이 너의 눈을 부시게 할까. 또 살포시 뒤틀린
허리로부터 어찌 한 가닥 미소가
생식을 품은 가운데 그곳을 향해 갈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 돌덩이는 두 어깨가 투명하게
내려앉은, 짤막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으리라.
또 맹수의 가죽처럼 그렇게 반짝이지 못하리라.
또 별처럼 그렇게 제 모든 가장자리에서 빛을
내지도 못했으리라: 너를 바라보지 않는 곳이란
한 군데도 없으니까.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릴케의 이 시는 내 눈에 당대의 정서 구조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 구조를 통해 어디로 나아갔는지로 보인다. 만약 이 시가 21세기에 쓰였다면, 과거의 나는 진부하고 따분한 것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관점, 버전, 인지 구조, 성향 등등을 아울러 개별의 정신으로 본다. 중요한 건 마지막 시구다. '너를 바라보지 않는 곳이란 한 군데도 없으니까.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행갈이를 반영하면, '한 군데도 없으니까,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이것은 앞서 로댕의 토르소를 두고서 점진적으로 나아간 낭만적 스타일과는 외따로 솟구쳐 있다. 그는 토르소를 두고서 어떤 인간을 보고 있다. 혹은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있다. 그래서 그 시선이 보는 자신으로 반향되고 있다. 그 반향으로 자신은 '다른 자신'이 된다. 그 반향의 코드는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지 않다면'으로 표현된다. 이 시를 읽고서 풍부한 감동을 받으려면, 쉽게 말해 '존나 좋다...'를 느끼려면 그 사람은 여러 정서 코드들로 스스로를 두르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토르소를 다루는 '시선'에서 새로움을 느껴야 하고, 저런 반향 코드로부터도 신선함을 느껴야 하고,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 포착과 확장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지 그 섬세함을 느껴야 하고, 그러다가 킬링 포인트로 '너'가 나오는 순간 단번에 '뜨끔'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만반의 준비는 당연히 '비의식'이어야 한다. 인간이 무엇인가 '난데없는 감흥'을 느끼려면, 반드시 그것은 비의식적인 것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의식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블랙박스가 열리는 순간이고, 의식만을 다루는 사람의 입에서는 그 효과를 묘사하기에 이른다. 그는 어떠한 노력과 실망 없이도, 비의식을 열게 된 데에 대한 화답을 건넨다.


 이것이 내가 보는 '작가-작품-독자'와의 관계다. 작가는 자신의 창작에 있어 '작품'이 되기 위해 자신의 세상과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한다. 자기 자신-자신의 세계 간 피드백 고리를 형성해야 한다. 반대로 독자는 작품을 읽기 위해 마찬가지 자신의 삶 속에서 세계 간 피드백 고리를 형성해야 한다. 이 고리들이 작품을 매개로 서로 맞물리면, 풍부해지면, 그게 좋든 나쁘든 가치 판단을 괄호친 채 '의미 발생'의 효과를 지니면, 작가-작품-독자는 '구조접속'에 성공한 것이다. 이 성공은 당연히 일회성이다. 이것은 우연이다. 여기에는 내가 '시대정신'이라고 일컫는 복잡한 거시적 정신 체계가 수반되어 있다. 당대의 시대정신은 하나의 체계로, 각종다양한 복잡 관계를 가능케 해주면서도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아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연히 서로 잘 맞아떨어지는 것들이 재생산되고 지속되고 유지될 수는 있어도, 그것은 결정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코드들과의 우연한 접속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했을 때, 그 우연 또한 막무가내의 우연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다. '결정'되고 '선택'하는 것에서 일방성을 떼어낸다고 해서, 그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던 현상의 비의식 자체가 소실되는 건 아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위대한 시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한다. 이 무언가는 언어로 어떻게 드러나느냐의 차이와 구분이 있지만, 그 무언가는 마치 불변의 무엇인냥 계보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믿을 수도 있다. 인간 정신의 여러 자동화 메커니즘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것들을 경계하고 꾸짖고 지적하는 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인간 정신은 아직 비의식을 의식으로 다루는 데 적응한 게 아니다.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은폐를 아무렇지 않게 들추는 게 '진보'라고 믿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창작자 입장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늘 중재다. 나는 사람들이 비의식을 과격하게, 폭력적으로, 상처 받으면서 의식으로 다루게 되는 걸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런 충격 요법이 필요할 때는 분명 있다. 하지만, 추구할 만한 방식은 아니다. '인간중심주의'를 제대로 알아보려면 가장 먼저 인간의 정서, 감정, 정동 반응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은 외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네 정신 근간을 이루고 있다. 관점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건, 단순히 다른 관점을 바라보는 인식 도구인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이뤄지는 게 아니다. 관점 안에 비의식으로 흐르고 있는 정서 또한 다른 관점에서도 같이 흘러야 한다. 이런 것들이 블랙박스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식되는 것'들로만 말하고 따지고 요구하고 논하는 것이다. 덩달아 이런 것들이 블랙박스로 있기 때문에, '비의식이 작동되지 않는 것'들에 어떠한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런지를 파고들려면 어마무시한 노력과 실망을 감당해야 하는 걸, 정신은 알면서도 모른다. 애초에 적응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주어진 것들이 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지만, 당연하게 있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 시대정신에 입각한 타협 지점으로써, 나아가 우리가 스스로 나아가고 있는 거대한 집단 의식의 향방에 있어 나라는 개인은 아주 사소하고 비천한 한 숟갈을 더하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고 불만을 꺼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의심할 수도 있다. 감수성을 폄하할 수도 있다. 이런 부정적인, 유아적인, 유치한, 자폐적인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슬로터다이크 말마따나 면역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양성 반응이고, 융의 말마따나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지 못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면역 체계를 다시금 재구축해 적응에 성공하는 건 전적으로 나라는 생명체의 자연 반응이다. 당연히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정신이 절멸할 수도 있다. '적응 실패'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적응해 온 것만으로도 나의 구조는 잘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의 언어는 늘 '앞'을 향한다. 하지만 세계, 자연에게 '앞'이란 없다. 이 차이를 얼마나 잘 혼융시키느냐가 인간의 입장에서 '삶'이다. 자연의 입장에서 내 삶은 하나의 돌일 뿐이다. 의미의 담지자가 이런 것이다. 너를 바꿔야 한다는 명령이 이런 것이다. 여기서 이뤄지는 피드백을, 우리가 화답을 주고받으며 '의식'할 수 있다면, 아무리 낭만적이니 유토피아니 낙관적이니 기술해도 그런 공동체를 꿈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정신이 어째서 자연을 상대로 이지경이 되었는지의 결정적인 블랙박스 같다. 이건 통념으로 사회고, 윤리고, 도덕이고, 의미고, 공동체고, 가치다. 하지만 그것들을 둘러싼 개체발생이 어느 정도로 활성화돼 구조접속을 꾀하는지는 상이한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상태가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재귀성을 의식한다면, 이런 행동에 재귀성이 발현되리라는 걸 안다. '모든 역사는 면역체계의 투쟁이다.' 개인의 삶으로 비춘다면, '삶의 모든 가능성은 투쟁의 적응'이다. 이 가능성을 욕망의 충족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싶다. 그 가능성은 사실 돌의 다른 이름이다. 돌이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게 전부라는 걸, 잘 알아보며 사는 집단으로 세상이 나아갔으면 좋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비의식으로, 블랙박스로 두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아본다.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이런 거창한 사명감 따위는 없다, 돈을 벌고 싶다, 그저 나만 재밌으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관찰자이자 중재자인 나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그들이 정말 저런 블랙박스를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떤 '코드'로 살아갈지를 말이다. 세상엔 성선설도 없고 성악설도 없다. 타불라 라사도 없다. 우리는 그저 그때그때 적응하고 발생시키는 '변화의 순간' 속에서 온갖 시간 의식, 의미, 언어 체계, 보다 복잡한 체계 등을 접속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라우터다. 당연히 좋은 예시는 아니다. '생명체'와 '정신 활동'을 이해하는 게 가능할 리 없다. 은유를 빌려 은유의 의미를 표현하려는 이런 재귀적 문장이 읽힌다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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