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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Feb 29. 2024

관찰자

작업 노트 1 - [앎의 나무]


24.02.29



[앎의 나무]는 9년 전 읽었던 책이다. 당시에는 이 책을 베르그송의 연장선에서 읽었던 거 같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생성과 반복이라는 개념을 확장시키는 책이었다. 


 읽었던 책을 시간을 두고서 다시 읽는 건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어느새부터 한 책을 읽을 때 보통 2번 정도 읽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이후에 책 전체를 다시 읽기 보다는 발췌한 문장들을 외따로 다시 읽는 일이 빈번하다. 예를 들어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읽는 데 약 1주일, 다시 읽는 데 약 1주일 정도 걸린다. 분량이 약 750쪽이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대신 재독을 할 때 문장들을 건져올리기 때문에, 시를 쓰거나 발상을 할 때 검색 기능으로 해당 문장들을 갖고와 마찬가지 다른 책에서 같은 방식으로 추출한 문장들을 재조합 해 언어 연결망을 확장한다. 수백 권의 책을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과는 별개로 올해부터 책 읽기를 줄이기로 한 건, 책 읽는 태도를 바꾸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누적시킨 '독서', 곧 나의 서재는 직관의 관할에 있었다. 나는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의식을 발달시킬 때부터 본능적으로 기록과 저장보다는 직관에 할당시키려는 태도로 임했다. 그러다가 직관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아 이를 보완하고자 기록이라는 정신 막노동을 부과했다. 그렇게 탄생한 텍스트 분량이 약 300만 자에 다다른다. 수백 권의 책이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저장'에 있다.


 어딘가에 기록하고 저장하려고 하는 순간, 나의 뇌는 그것을 상기시킬 목적을 잃는다. 반대로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고 확장시키지 않으면 덩달아 목적을 잃고 의식에서 소실된다. 소실되는 건 '언어 연결망'이다. 니클라스 루만처럼 '제텔카스텐'을 만들어 운용하고 싶은 충동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내가 느끼기론, 언어 작업을 진심으로 임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제텔카스텐'을 만들게 되어 있다. 자신에게 그것이 없다면 그는 언어 작업을 하는 게 아니다. 즉, 언어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자발적으로 발달시키는 건 아니다. 언어를 다룰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제텔카스텐'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누군가가 창안한 언어를 모방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방도 그냥 되는 건 아니다.


 나의 '제텔카스텐'은 버전으로 따지면 아직 v1.0이다. 일단 지금까지 확장시킨 책과 의식 간 네트워크-연결망을 하나하나 살피고 정리하는 건,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런 작업은 살면서 딱 1번만 가능할 거 같다. 언젠가 한 번은 하겠지만, 그럴려면 결국 진정한 한계에 다다라야 한다. 나는 아직 한계를 현실로써 직면하지 못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독서의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이전에는 인식의 확장을 위한, 영감의 소재를 위한 읽기였다면 이제는 이를 아울러 정신과의 관계를 위한 읽기로의 수정이다.


 독서가 대중화된 이후로 사람들에게 어떤 독서가 옳고, 어떤 독서가 안좋은지 왈가왈부가 많긴 하다. 자신에게 유의미하다고 느껴지는 독서 방법으로 명예와 돈을 교환하는 작자가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이건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적 가치와도 무관하지 않다. '책 읽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국민적 정신-정서 교육을 부양시킨 사례는 수두룩하다. 이런 표현은 어리숙한 표현이지만, '진짜'들은 진짜를 내놓지 그러지 못해 진짜가 되고 싶은 호소인 행세를 하지는 않는다. 책을 통해 본연의 정신 발달을 위한다면, 이런 진짜들을 선별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냉소적인 시선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건, 진짜호소인들이 교묘한 기만과 위선으로 의미와 가치를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호소인들도 필요하다. 나는 호소인 쪽으로 들어갈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과 대항하는 개체로서 판단하고 인식한다.


 이런 대중적인 현상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는 건, '책 읽기'에 투영된 우리의 기대다. 우리는 책을 통해 무언가를 더 알길 원하고, 언어를 통한 체험을 하길 원하고, 정보와 지식이라는 이름 하에 우위를 점하길 원한다. 나는 책을 정신과의 만남으로만 대한다. 그러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는 저자의 책은 애초에 읽지 않는다. 읽기를 정신과의 관계를 위한 읽기로 수정한다는 건, 이전까지는 한 단계 정도만 수행했던 만남을 좀 더 발달시키고자 하는 목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앎의 나무]는 9년의 시간을 끈으로 봤을 때 시작과 끝이 연결되는 한 채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이 책을 만났을 땐 아직 여물지 않은 추상화 수준에서만 '자기생성'을 다뤘다. 9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에게 누적된 온갖 '정신'들이 있다. 관점의 다각도도 꽤나 다채로워졌다. 그런 관점을 넘나드는 데 걸림돌이 될 '정동' 또한 괄목할 만한 분화를 일궈냈다(이건 융을 읽고서야 다시금 느끼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특히 '재귀성'은 거진 내 의식의 역사 안에서 줄곧 추적하는 키워드라 해도 무방하다. 이 재귀성을 다루는 정신은 실로 방대하게 포착되었다. 지금까지 추린 저자만 해도 10명은 족히 넘는다. 그들의 전문 분야는 상이하다. 내가 보고 싶은 '다른 현실'은 바로 이 재귀성이 일상 체험 속에서 포착될 때다. 그 포착의 순간이 나에겐 '시적 순간'이다.


 마뚜라나-바렐라 선생들의 말마따나 '나의 개체발생'으로 보면 아주 뾰족하게, 하지만 방향성 만큼은 잘 가고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세상 인간들이 [앎의 나무]에서 친절히 보여주는 관점들로 보고 느끼고 대하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안정적이고 다채롭고 풍부해질까? 하는 낭만성이 건드려지기도 한다. 이런 인식 차원의 정도 문제로 괴로웠던 순간들이 너무 많고, 사실 나는 거의 반쯤은 포기한 채 살아간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방식으로 말하고 보여줘야 한다. '다른 관점'을 배우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가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나 자신이 과도했다고, 21세기 현실 집단은 보여준다. 적응이 목적인 이상 당연히 이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타협의 수준에서 자신의 개체발생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지가 '진짜'들이다. [앎의 나무]도 그런 진짜 중 하나다.


 이제 내밀한 인격-자아의 시선으로 다루는 걸 멈추고 본격적으로 작업 노트를 작성해 본다. [앎의 나무]는 관찰자를 위한 책이다. 관찰자는 세계를 관찰하고, 언어 작용을 발달시키고, 나아가 기술한다. 이를 일상의 차원에서 풀어 쓰면, 하루가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는 걸 이야기로, 감상으로, 일기로 쓰는 일이다. 그 안에서 겪었던 일을 다룰 수 있다. 인간관계, 어떤 체험, 멍 때리며 했던 공상, 이전에 있었던 일 등등. 관찰자는 단순히 보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관찰자는 하나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 상태란 [앎의 나무]에서 보여주는 대로 개체발생의 구조접속으로 인한 표류를 관찰하는 상태다. 이들의 용어는 과학자의 용어다. 하지만 이들의 정신은 온갖 곳에서 (쉽진 않지만)발견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중재자의 정신'이라고, 일단은 붙들어둔다.





 

인지과학의 현대적 고전 중 하나



 [앎의 나무]라는 책의 구조는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는 우로보로스의 형상을 띤다. 이 형상은 에셔의 그림,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에서 나타나는 핵심 주제, 융의 '개성화 작업'에서 자주 다뤄지는 연금술 상징, 무한을 가리키는 부호, 재귀성, 에리히 피셔-리히테의 [수행성의 미학]에서 다루는 '자동 형성적 피드백', 자기 동일성, 에른스트 카프의 [기술철학 개요]에서 다뤄진 '자기 인식' 등등을 가리킨다. 이런 나열은 각각의 사람들이 정신 안에서 어떤 추상적인 '상'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그것들과의 동형성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재귀성을 가능케 하는 조직이 '자기생성' 개념으로, '오토포이에시스'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와 곁다리로 빌렘 플루서의 경우는 결이 좀 다르다. 이 결이 위에 나열한 '재귀성'과 어떤 맥락 차이를 나타내느냐 하는 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있질 않고, 메시지를 다루는 미디어에 있다. 익히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맥루헌의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라는 명제는 사실 이 재귀성을 관찰한 표현이다. 다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언어'를 갖고 하는 행동, 즉 글 쓰기라는 미디어에 대해서다.


 '글'은 기본적으로 문법에 따라 직선형 구조를 띤다. 순차적이고, 그래서 역사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절대 닫힌 구조는 아니지만, 자연수의 등차배열을 집합으로 다루는 구조와 유사하게 느낄 수도 있다. 즉, 0에서 시작해 1, 2, 3, 4...로 나아가는 기본 직선 방식으로 문장이라는 집합 간 나열을 꾀해 전체적인 배열 간 맥락 혹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쓰는 방식 자체가 직선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수정할 수 없는 일종의 규칙이다. 현재의 컴퓨터는 이 구조의 '화신'이기도 하다. 양자컴퓨터의 시대가 오면 또 달라질 것이다.


 [앎의 나무]도 그렇게 쓰였다. 하나씩, 하나씩 쌓아간다. 하지만 도식으로 보면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 이 구조 자체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재귀성'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표현되는지를 풍부하게 보여준다. 아마 성리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성학십도'를 연상하는 것도 좋은 사례다. 문자 언어를 활용한 '연결망'보다 도식을 활용한 '연결망'이 좀 더 재귀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이런 차이를 유발하는 건 아마도 재귀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 정신 안에서 다뤄지는 방식이, 소위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인 거 같다. 단순한 통념으로 배포된 지식에 따르면 '무한'은 최소 4차원을 전제한다. 3차원으로는 서로의 물질성을 훼손시키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건이 이럴진데, 문자보다 도식이 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건 재귀성이 가진 여러 인식 조건의 복잡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빌렘 플루서는 이런 선형적인 '글 쓰기'가 21세기의 '추상화 능력'에는 더 이상 걸맞지 않다고 말한다. [앎의 나무]가 재귀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선형적인 글 쓰기를 채택해 시작과 끝을 연결시켰다면, 플루서는 추상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선형적인 글 쓰기로 시작과 끝을 없애버렸다. 전자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방식으로 작업에 임했기 때문에 분명하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나아가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만, 후자는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위한 작업이기에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신적 활동을 어떻게 '언어'로 매개할 수 있을까가 관건이 된다. 그 내용이 0차원에 다다르는 것이기에 시작과 끝은 소실되고 '점'만 남는다. 이런 정신과의 만남 속에서 내가 추출할 수 있는 건 차원의 복잡도가 달라진다는 게 실상 일상 차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다. 그게 일단은 관찰과 중재다.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확실성에 기반한 인지 활동'만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절대 다수, 대중, 일반인, 결코 정량화될 수 없겠지만 통계상 99%에 다다르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무수한 인간들로 보인다. 바꿔 말하면 그게 우리 인간의 자연스러운 인식 활동인데, 그게 틀렸다고? 도발하는 꼴이다. 하지만 정신 작업을 건강하게 하는 이들에겐 알려야 할 소명이다. 이런 사례는 역사적으로 수도없이 발견된다.


 마뚜라나-바렐라 선생들이 활용하는 비유인 '표상론-유아론'도 그 사례 중 하나다. 철학에 있어 서로 대립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보이는 두 개의 '이론'이 횡행하던 시기가 늘 있었다. 정신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정신 활동에 즐거움을 느끼고,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고, 또 삶으로써 여러 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 이런 한 개체발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마뚜라나-바렐라(이하 마-바) 선생들의 관점대로라면 구조접속의 '적응'일 뿐이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시대적으로 특징적인 것처럼 나타나면 그런 체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이런 현상 속에서 마-바 선생들이 말하는 것처럼 '확실성에 기반한 인지 활동'을 포기할 수 없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게 쉬웠다면, 인류가 지금 이 지경은 아닐 것이다.


 나는 철학이든, 사회학이든, 문학이든, 어떤 분류된 학문이든 간에 자기 정신을 발달시켜 그걸 언어로 표현한 모든 정신에 한해 기본적으로 존중심을 갖는다. 다만, 인격이 수반되어야 '존경심'이 붙는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로 인격이 수반된 정신의 발달이 나타나는 면모는 열에 아홉은 모두 중재자의 정신이다. 나는 그런 책들에서만 진정성을 느꼈고, 배울 점이 있다고 느낀다. 이런 고백은 내가 아직 발달 과정에 있기 때문에 새어나오는 푸념의 일종이다. 


 중재자는 아무나 될 수 없다. 사실 당대에 유행하는 '양립 불가능'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열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표상론-유아론'의 구도로 나타난 것처럼 철학사는 거진 양립 불가능한 두 이론의 대립의 연속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에게도 유명한 '갈릴레이' 사례를 보면 오늘날 사람들은 당대의 비합리적인 '종교'를 욕할 것이다. 지구가 돌고 있다는 '합리적인' 생각을 21세기 인간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당대의 종교를 욕할 수 있는 대중, 받아들일 수 없는 대중이 만약 당대 사람이라면 갈릴레이를 무시하고 비난하고 돌을 던질 것이다. 만약 이런 현실을 못 본 척한 채 '언어'를 다룰려고 하는 건 관찰하기를 포기한 유아론자에 다름 아니다. 반대로 이런 현실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대다수 인간의 인지 활동을 우월 의식으로 다룰려고 하는 건 관찰되는 현상에 사로잡힌 유아론자에 다름 아니다. '확실성에 기반한 인지 활동'이란 거의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뿌리 깊고,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관점'을 넘나들 수 있게 되기 위해선 성찰과 언어 능력이 요구된다. 중재자가 된 이들은 서로의 관점에서 세계를 기술하는 방식이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하게 표현된다는 걸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충돌 지점이 왜 발생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중재한다. 쉽게 말해 '니네 이렇게 싸울 필요 없잖아'라고, 그 분쟁 원인을 되돌린다. 즉, 재귀성을 발생시킨다. 실제 역사에서 무수한 양립 불가능의 문제가 대부분 이런 재귀성으로 풀렸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순간, 문제가 해결됐다. 마-바 선생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본인 스스로가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관찰자가 된다는 건, 자신이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를 볼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 정신은 이에 대해 무척 불리한 '구조적 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재귀성에 익숙하지 않다. 내가 재귀성의 관계를 일상 속에서 재발견하려는 '다른 현실'을 그토록 찾았음에도 여전히 찾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이절 스리프트의 '비의식' 개념으로 말미암아 재귀성은 사실 마-바 선생들의 책처럼 순차적인 글 쓰기를 통한 재귀성 표현이 가능하다. 실제로 하나씩 따라가면 어느새 연결된다. 하지만 거기에 수반되는 여러 절차를, 나는 블랙박스로 만들고 싶다. 그게 언어로써 구축되면, 나에게 시가 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앎의 나무]에서 다뤄지는 개체발생 간 구조접속의 표류를 알아보는 관점을 보다 면밀히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걸 요약해서 쉽게 풀어쓰려면 정신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므로 차라리 책을 읽기를 권장하고 싶다. 9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다시 읽은 [앎의 나무] 속 '자기생성'은 나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소화되고 있다. 


 먼저, 블랙박스의 개폐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사람들은 언제 당연함을 의심하게 될까? '문제 발생'은 어떤 조건 하에 이뤄질까? '다름과 낯섦'은 어떤 상황일 때 유발될까? 이런 의문점에 보다 분명한 인식이 생겼다. 이것들은 특정 코드를 따라 정서와 감정을 건드리는 주요한 채널이다. 평상시에는 닫혀 있고, 확실하고, 안전하며, 비의식적으로 수행된다. 즉, 인간은 관찰자가 아니어도 일반 동물 수준의 정신으로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정서 반응'은 보다 복잡한 등급 체계에서 나타난다. 이것들이 서로 연결되기 위해선 여러 부수적인 맥락들이 덧붙여져야 한다. 


 동시에 재귀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인간 인식에 있어 우선 '결정된 것-확실한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 나는 이전까지 재귀성이 어떤 표상이 아닐까 하는 접근으로 임했다. 하지만 이번에 책을 읽으며 알아차린 건, 재귀성 자체가 하나의 효과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이 만들어내는 개체발생의 행동 중 하나처럼 보인다. 인간이 언어를 구분지음으로써 언어 구분의 언어 구분으로 인한 '언어'를 창안하고 확장하고 다룰 수 있게 되는 건 점진적인 재귀성의 창발에 가깝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놀랍게도 플루서의 '추상화'와 연결되는 접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인간 정신 안에서 벌어지는 고차원적인 복잡한 연결망은, 인간의 기본 관점에 비추어 봤을 때 '마치 있는 것처럼', '실물인 것처럼', '실제인 것처럼' 다루는 효과를 지녔다. 특히 뇌량이 끊긴 사람의 정신 실험도 무척 흥미로운 인상을 준다. 실험자들은 그저 좌뇌와 우뇌 간 능력, 연결 등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궁금했을 수도 있지만, 실로 그건 놀라운 관찰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우리 인간이 왜 '자기 합리화' 능력을 가졌는지, '자기 기만'을 부릴 수 있는지, 그게 왜 보편타당한 것처럼 거진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게 한다. 마-바 선생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기 합리화는 좌뇌의 구조발생에 따른 섭동작용이다. 그 능력은 실로 어마무시해서 진위를 가리고 말 것도 아니고 애초에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그 상태를 지배한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교묘한 냄새를 맡는다. 거기서 풍겨오는 냄새는 바로 조현병 사람들이 자주 겪는 망상 장애의 코드 중 하나인 '편집증적-피해 의식'이다. 거기에는 특정 코드가 있다. 그 코드는 수동성, 위협적인 적의 기정사실화, 명령, 떠넘기기 등등이 있다. 이 능력이 어째서 소위 '탑재'되어 있는지 분명 희미하지만 실마리가 있다.


 자기생성에서 내가 새로 배운 건 '조직'과 '구조'의 차이다. 이 두 개념의 용법은 한동안 마-바 선생들의 방식을 따를 거 같다. 무엇이 조직이고, 무엇이 구조인가? 나는 자기생성조직으로 현재 적응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개체발생 구조는 어제 적은 것과 같은 일상과 '삶'으로 접속되어 있다. 그때그때, 변화 속 조화와 적응이 이뤄지는 것이다. 베르그송 철학의 해상도 높은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관찰자' 상태로 일상을 살아간다면 어떨까?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부분부분 유지되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귀엽게도 마-바 선생들도 검토를 그렇게 많이 하셨을 텐데, 헛점이 나타난다. 그들의 이론과 관점, 주장과 상반되는 걸 본인들이 직접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의식이란, '비의식' 처리되는 어떤 자동화 컨베이어 벨트의 흐름 위에선 결코 의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바 선생들이 인간 정신에 있어 '언어'가 지닌 중차대한 의미를 점점 고조시키고, 나아가 사회와 윤리와 공동체에 대한 의미의 '꽃'을 피우고 있는 맥락이니, 당연히 그 의미를 따라가지 그 의미를 풀어내는 서술 방식에 있어 본인들의 주장과 상반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면모로 말미암아 또다시 알 수 있는 건, 재귀성이든 자기생성이든 '관찰자'든 특정 조건, 특정 상태, 돌려 말하면 이런 상태조차 섭동작용이 유발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건 내가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하루의 상태 변화' - '의식의 상태 변화'에 무척 핵심적인 의미망을 제공한다. 오히려 내가 거꾸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상태가 지속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했는지 말이다.


 아마 이 관찰자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히사오 선생의 개념을 빌려 '분열친화적 미분회로'를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차원의 복잡도가 달라진다는 걸 인지 구조로 가져갈 때, 그것의 지속성은 그것을 향한 '다른 그림 찾기' 게임이다. 즉, 차이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것을 중단 없이 누적시켜야 비로소 '관찰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속 과정은 당연히 개체발생의 구조에 따라 변화한다. '본다'는 건 뉴런 집합체 구조의 발생이다. 이걸 의식은 '기술'할 수 있다. 이걸 언어 인식으로 재귀적 구조로 만들 수 있다. 기술하는 언어를 다시 구조발생으로 되돌려 '차이'와 '구분', 그러니까 언어적 영역에서의 언어적 구분의 언어적 구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정신과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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