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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Dec 04. 2023

2023년 회고


아직 한 달 정도 기간이 남았지만, 2023년을 정리하려 한다.


 2023년은 잘 그려지지 않는 해다. 작년의 다짐에 맞춰 노력을 했는가? 나는 나의 노력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이렇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려 할 때마다 늘 하지 못했던 것, 더 해야 했던 것들만이 빚처럼 남아 있다. '이걸 더 했어야 했다', '이걸 더 물고 늘어져야 했어야 했나' 이런 식의 점검뿐이다.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걸 할 줄 모른다는 게 새삼스럽다. 이런 특징이 스스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나와의 관계가 얼마나 빈약하고 편협한지를.


 읽고 쓰는 삶이 주축이므로 먼저 무얼 읽고 고민했는지부터 요약해 본다. 맥락을 조금 그려본다면, 연초에는 '쓰기에의 다짐'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으로 읽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쓰고 싶어 하는지를 붙들기 위해 책을 읽었고, 중간중간 관심가는 책을 읽었다. 삶이란 게 참 어렵다. 나는 굵직한 줄기처럼 무언가 일관성 있는 맥락을 가져가고 싶으나, 일상을 살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다 어느새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희미한 자각만을 지닌 채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이게 내 한계다. 그러다가 하반기가 시작될 여름 쯤, 융을 만났다. 고작 1~2달간의 융 읽기였지만 올해는 확실히 융의 해라고 할 수 있겠다. 나 자신과의 관계를 거듭 가져가려는 의식이 형성되었고, 이후 시도를 하려고 했으나 또 다시 현실에 치여 맥락을 놓친 채 관심가는 책들을 읽었다. 추리면 다음과 같다.


나는 태어났다 - 조르주 페렉

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 미셸 세르

공간의 종류들 - 조르주 페렉

도시의 시학 - 다나카 준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 빌렘 플루서

별무리 - 닉 페인

문체 연습 - 레몽 크노(살펴봄)

미시시란 무엇인가 - 곽차섭(긴즈부르그 [징후들] 읽음)

비장소 - 마르코 오제(다시 읽음)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게오르그 짐멜(대도시와 정신생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 - 마쓰모토 도시히코

놀이와 인간 - 로제 카이와

정신분열증 소녀의 수기 - M. A. Sechehaye

상징의 실현화 - M. A. Sechehaye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 야콥 폰 윅스킬

아주 조용한 치료 - 사이쇼 하즈키

카를 융, 인간의 이해 - 가와이 하야오

딥 타임 - 크리스티앙 클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카를로 로벨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사물과 마음 - 살만 악타르

아르카와 이라 - 미켈 로차 비바스(중도 하차)

기술철학 개요 - 에른스트 카프

사물의 분류 - 제프리 C. 보커, 수전 리 스타

분해의 철학 - 후지하라 다쓰시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 조르조 아감벤

중동태의 세계 - 고쿠분 고이치로

정신사적 고찰 - 후지타 쇼조 (신품 문화)

성격 유형 - 칼 구스타프 융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C. G. 융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 C. G. 융

원형과 무의식 - C. G. 융

인격과 전이 - C. G. 융 (전반)

심리학과 연금술 - C. G. 융 (중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이나다 도요시

틈새시간 - 사라 샤르마

GEN Z: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 - 로버타 카츠 외 3인

소진된 인간 - 질 들뢰즈

당신이 ADHD라고 해서, ADHD가 당신은 아니다 - 김강우

막판 - 사무엘 베케트

동일성과 차이 - 마르틴 하이데거

튜링스 맨 - 제이 데이비드 볼터

액체현대 - 지그문트 바우만

단독성들의 사회 - 안드레아스 레크비츠

인공과학 - 허버트 A. 사이먼

비물질노동과 다중 - 질 들뢰즈, 안또니오 네그리 외 (랏자라또 비물질노동)

괴델, 에셔, 바흐 - 더글러스 호프스테터(전반)


 



 월별 순서대로 나열한 목록이다. 부채감으로 읽은 책, 대중을 의식하며 읽은 책, 탐색용으로 읽은 책들이 조금 섞여 있다. 올해도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벌써 몇 년째 미루는지 모를 책이 많아서 마음이 쫓기고 있기도 하다.


 읽기 전과 후가 다른 책들을 꼽자면,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 융, [사물의 분류], 레크비츠의 [단독성들의 사회] 등이다. 올해는 확실히 융의 해, 그러니까 '자기 작업의 해'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달라진 바 없지만, 의식화 만큼은 꽤 유의미한 진전이 있었다. 특히 [단독성들의 사회]는 그간 추적하는 '21세기 사회'를 인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책을 읽는 동안 인용된 책, 참고 문헌 등을 수집하느라 독서 목록에 약 2~30권 정도가 늘어났다. 아직 소화 중에 있는 책이고, 다 소화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은 읽기였다.


 여전히 시나 소설에는 손이 가질 않는다. 이 불감증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억지로 읽으라면 읽을 수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그저 노동 외의 의미가 없다. 문학은 노동으로써의 읽기로만 읽을 수 있다. 감흥도 안생기고 의미도 안느껴지고 인위적인 억지스러움이 짙어서 그렇다. 그렇지 않은 문학 책을 이잡듯이 찾을 바에야 의식화에 도움이 되는 인문서를 찾는 게 훨씬 쉬운 실정도 한몫한다. 정신의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재미가 없어 억지로 재미를 구하는 수고와 피로 대비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 당장 보이면 그것에 먼저 손이 갈 뿐이다. 문학은 애초에 읽지 않으면 그 안에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매번 늘 뻔하고 재미없으니 서서히 마음이 닫히고 말았다. 이건 독자로서의 심리 문제로 치부되겠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일단은 어쩔 줄 몰라하며 있다.


 그래도 몇몇 책 간 네트워크를 통해 한번은 읽어야지 하는 책이 몇 권 있다. 14년인가 15년도부터 마음에 담고 있는 로베르트 무질이나 이번에 다시 읽기로 마음 먹었던 사무엘 베케트, 마찬가지 오래 묵혀둔 토머스 핀천 등이다. 한국 작가들의 책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평소 읽는 책에서는 결코, 단 한 번도 언급될 수 없는 실정이거니와 그런 읽기의 환경이 더욱 강화되다 보니 더욱더 아는 바가 없다. 딱히 편식이라고 할 마음은 없다. 환경이 조금씩 변하다 보면 나도 거기에 호응하며 적응할 일이지, 지금까지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처음부터 편협한 낭만성으로 독서를 서구화했다면 모를까, 읽고자 하는 지평이 드러나는 쪽으로 움직이는 '나의 독서'로서 이런 맥락은 그저 주어진 책에 맞춰 순응할 뿐이다. 단지 그 지평 위에서 한국 작가들의 책이 안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읽고 싶어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게 맞다. 만날 수도 없고, 무엇보다 같은 모국어도 아닌 작가들의 책보다는 한국 작가를 사랑하고 싶다. 독자로서의 마음은 그렇다.


 작가로서는 아주 형편없는 해였다. 시는 거의 쓰지 않았다. 올해도. 도대체 나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걸까 싶다. 쓰고 싶은 걸 써내지 못하니 더욱 무얼 써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고착화되어 있다. 나아가 '나'라는 인간이 도대체 어떤 쓸모와 효용이 있는지도 희미해진다.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으로서의 나는 무척 왜소해지고, 드러나지 않는 인격으로서의 나도 이에 영향을 받아 처참해진다. 아는 바는 이런 것들이다. 처음 학교를 벗어나 홀로 투쟁하기를 선택한 16년도부터 지금까지, 결국 알게 된 건 내가 얼마나 무능력하고 무용한지다. 21세기 사회에서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를, 작가로서의 쓸모, 시민으로서의 쓸모, 성인으로서의 쓸모에 대해 그 무엇도 성취해낸 게 없다. 내가 고군분투한 건 고작 '자기 자신'에 대한 것뿐이다. 그 누구도 관심 없고, 쓸모있게 여기지 않으며, 가치있다고 여기지 않는 그런 것뿐이다. 즉,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것들에 대해서만 아는 게 많고 할 수 있는 게 많다. 시간이 흘러 이제 30대 중반에 이르니, 이런 상태가 얼마나 불가피하게 사람 정신 구조를 모양내는지에 대해서도.


 2023년은 마음 아프게도 누군가를 위해서만 뭔가를 하는 해였던 거 같다. 나에 대해서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뭔가를 누리지 못했다. 시간을 돌이키고 싶은 생각도 자주 든다. 16년도가 시작될 때로 돌아가 그 선택을 하지 말 걸. 17년도로 돌아가 그런 선택을 하지 말 걸. 18년도, 19년도, 20년도, 21년도, 22년도... 내가 나의 선택에 불신을 갖는 건 잘못된 선택을 했다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걸 알았으면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겪어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을 다시 회급시키려는 것, 망상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는 임계치에 도달하려고 한다.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스스로를 포기하고 양보해야만 하나. 나를 지우기만 해야 하나. 노력과 책임으로만 나를 구축해야 하나. 이기심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통념에 기반해 쉽게 풀어써서 오해가 있을 수는 있겠다. 지금 내 안에서 싹트고 있는 건 다시금 자기 자신으로의 변양 확장이다. 방황을 끝내고 재건을 위한 물밑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삶을 바쳐가며 배운 이러한 체험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가 있다. 과연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 더욱이 그런 걸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에 견주어 나에게 그러한 사명감이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의 인식은 분화되고, 구체화되고, 확장될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에서의 내 자리를 찾지 못하겠다. 남들처럼 몰라야 하는 건 몰라야 하고, 믿어야 하는 건 믿어야 하고, 환상을 현실로 바꾸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때로는 막무가내로 의미와 가치로 덮어버릴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정동에 맡겨 살아갈 줄도 알아야 하는데. 유연하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경직될 수 없는 걸까. '알면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게 가장 큰 단점이자 문제다. 이게 정직함의 문제일지, 기만의 문제일지, 비겁함의 문제일지 제대로 해소해내지도 못하는 게 내 처지다. 2024년에는 이걸 치열하게 다루고 싶다. 아는 건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아무 실천을 하지 못하는 건 도덕적 실패를 겪게 한다. 이 실패의 경험이 사람을 좌절시키고, 좌절된 사람은 끝내 살아남으려는 정신의 몸부림에 의해 '망가진 인간'으로 완성된다. 망가진 인간으로 완성되면 더욱더 극복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현재 그런 징후들을 2~3년 전부터 계속 맡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미 예정된 수순이다.


 



 여러 고민을 좀 했다. 아무래도 융을 마저 다 읽는 게 지금 가장 필요한 순서인 거 같다. 2024년이 어떤 해가 되었으면 좋겠는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동안 쌓인 '빚'을 갚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 남들처럼 '알 게 뭐야'라는 식으로 모른 척하며 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벌이가 누군가의 대출이고, 누군가의 삶이고, 유혹이고, 기만이고, 거품이라는 걸 포장하지 않고 직면하면서도 '나의 빚'을 갚을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없어서 여러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감당해낼 수 있을까. 자신 없다. 마음 한 켠에서는, 이미 이런 것들을 알아보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은 알지 않냐며 넌지시 알려주는 직관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그리고 다른 한 켠에서는 부정하고 거부하기 위해 비열함으로 무장한다. 역시, 융을 읽어야 할 차례인 거 같다. 이미 알아버린 이상, 모르는 것처럼 말할 수가 없다. 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근래 나온 신간 소식도 참 마음의 빚을 건드린다. 현재 나는 기술철학 텍스트를 읽지 못해 부채감을 갖고 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탐구하고 싶은 비겁한 마음이 이리도 큰 거 보니, 정말 얼마나 망가졌는지 새삼스럽다. 오늘날 같이 인간 정신을 이렇게 분열시키는 시대가 없었음에도, 현실과 그 바깥을 넘나드는 인격에 대한 정보와 해석이 이토록 빈약한 걸 역설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다.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이 명령만 한다. 시 쓰는 인간은 '일단 써라'고 다그치고 돈 버는 인간은 '변명하지 말라'고 다그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자기 자신이 된 것으로 믿는 인간은 '할 수 있다'고 사기를 친다. 철학자들은 도움을 주지만 그들은 너무 머리를 많이 쓴다. 삶의 문제로부터 너무 안전하다. '현실'과 '인격'과의 관계에 대한 삶의 지혜를 혼자 깨우쳐야 한다는 게 버겁고 괴롭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융은 분석 심리학을 시작으로 남은 텍스트들을 끝까지 읽을 예정이다. 이후 내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삶을 설계할 수는 없다. 옳게 된 자본 논리로 보면 '아는 건 죄'다. 선택하지 못하고,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사람들에게 조언을 듣고 도움을 받고 싶다. 하지만 조언과 도움은 결국 자기중심적인 조건에서야 충족되지 않는가. 여태 받아본 적도 없어서 나오는 푸념이지만, 나도 사람에게 의지할 수만 있다면 좀 더 삶이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기 자신에 대해 수행을 한다는 건 이런 단점들을 낳게 된다. 사람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조건이 무수해져 '사람'에 대한 인정이 까다로워진다. 이를 투사로부터 벗겨내려 해도 참 쉽지 않다. 소외되고 외로워지는 건, 인간으로 갖는 아주 기본적인 감정조차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인간들, 수행하는 인간들은 이런 '장애'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임해야 하는지 왜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 걸까? 오히려 이런 걸 드러내면 미숙하거나 어린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마땅히 담론이 되어야 할 내용인데 말이다. 21세기에는 더더욱.


 착잡한 마음으로 2024년을 기다려 본다. 힘은 나질 않는다. 각오도 다짐도 선뜻 하기 힘들다. 몹시 취약해진 상태다. 변태 직전이 가장 위태로운 상태인 여러 곤충들처럼, 지금의 나도 그런 상태인지. 소진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죽어가는 생물의 상태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만을 위안으로 삼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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