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자
23.11.22
의도된 것 혹은 피상적인 것을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때로 조악한 것, 뻔한 것, 유치한 것, 어줍잖게 따라한 것으로 포착되기도 한다. 이 경멸감, 혐오감, 거부감은 부정적인 가치를 느끼게 해 대상으로부터 거리두게 만든다. 사람은 그 대상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하거나 모욕하거나 무용한 것으로 다루려고 한다. 이것이 레크비츠가 말하는 '가치 박탈'이자 융이 말하는 '부정적 투사'의 일부다.
우리는 학습을 통해서 이러한 부정성을 확장한다. 신체적 고통, 정신적 스트레스, 인식 불가 등 인간으로 하여금 저항과 한계를 느끼게 하는 모든 자극이 부정성을 개발시킨다. 개발된 부정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예상-예감하는 능력에 적합하다. 즉, 안 좋은 일에의 '선취 능력'이 발달된다. 어떤 일의 결과가 안좋게 예상되면 시작부터 하지 않으려는 '미리 산출하는' 예상은 곧 앞서 취해 마치 겪은 것처럼 다가올 미래를 현재화하는 능력이다. 삼천포지만, 근대를 구축하는 데 있어 '철학적 인간의 조건'에는 '선험성'이 발굴되어야 했다면 오늘날에는 '선취성'이 주류가 되고 있다.
이 선취성은 여러 갈래에서 속속들이 포착되고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팅에 익숙해진 튜링스 맨이 현실 세계를 언제나 시뮬레이션하는 습관의 선취성, 익명성을 권고하는 대도시의 과잉-밀집으로 말미암아 더욱 거세지는 신경과민의 부하를 차단하려는 선취성, 각종 분야에서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응답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조정해야 하는 선취성 등등. 선취성은 우리네 두뇌의 기본 능력이라 여길 수 있지만, 이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떤 정신적 활동들을 펼쳐가는지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다. 가령 과거 인류 조상의 문화 중 샤먼이나 주술사, 채집-수렵민 중 월등히 뛰어난 채집꾼과 사냥꾼, 점술가와 예언가, 사제, 예술가 등 나름 직업적 명명이 이뤄진 정신적 활동의 특징 속에는 늘 선취성이 함께 했었다. 선취성은 단순히 과거 경험을 토대로 현재 비슷한 체험을 앞두고 있을 때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됐었지'라는 예상부터 남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육감을 근거로 현실을 벗어난 (마치 초월적인) 계시로 선고를 내리는 듯한 예언까지만 포착되는 건 아니다. 선취성은 근본적으로 '시간 의식'과 결부된 능력으로, 현재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앞서서 미리 관찰하고 있는 자기 자신과의 괴리를 경험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선취성의 발현은 곧 '자기 소외'를 필요로 한다.
자기 소외를 필요로 한다는 건 융이 빌헬름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을 해설하면서 언급한 내용과 결을 같이 한다. 인간의 실존적 특질에 '자기 소외'를 기본 사항으로 둘 수밖에 없음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그것도 가장 근본적인 조건으로? 플루서 말마따나 고대 인류가 '소름끼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추상화 시도로써 안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 자기 소외를 극복한 것이든, 오에 겐자부로 말마따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감동할 수 있는 마술적 능력으로 언어를 통해 자기 소외를 극복한 것이든 일찌감치 인간이라는 종 그 자체에는 있는 그대로 존립할 수 없는 결함 있는 존재로 포착되는 것이 사실이다. 마이너한 작가로 분류되어 사람들에게 이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심리학자인 기시다 슈가 언급한 네덜란드의 해부학자 루이스 볼크 또한 이 결함 있는 인간을 견해로 제출했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도 이에 대한 견해를 언급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루이스 볼크Louis Bolk와 아돌프 포르트만의 생물학적 고인류학의 진술들에 있는 현존재의 목발할 의무에 대한 고백에 다다른다. 이 진술들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구조적으로 조산 불구자이자 영원히 미숙으로 정해진 피조물이다. 이 피조물은 생물학자들이 유형성숙(유아 특질과 태아 특질의 유지)이라고 부르는 이 특징으로 인해 문화라는 인큐베이터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 P. 103
'현존재의 목발할 의무'. 그것은 태어남에 저항하는 존재(에밀 시오랑)가 맞닥뜨린 경악할 만한 진실인 '불구자' 혹은 '영원한 미숙으로 살아가는' 조건이 곧 삶에의 의무로 자리잡아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만 했던 여러 정신적 활동의 충족 이유율이 된다. 동시대인에게 있어 이러한 의견 혹은 주장은 꽤나 무관하게 들릴지 모른다. 또는 당돌하게, 모욕적으로, 독단적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진 인류 모두가 겪는 '환경에의 적응' 앞에서 내적으로 갈구하는 목발로 은유되는 보완, 효율로 이해되는 꾀, 자신의 처지를 부풀리고자 날마다 자기 전에 부풀리는 망상 등으로 변환되어 있다. 시대적 상황으로 이를 알아본다면, 오늘날 한국인들이 그토록 돈에 사로잡혀 살고 있음은 곧 '돈'이면 삶에의 무수한 결핍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학습했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무엇으로든 대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른 것이 아닌 이것이어야 한다고 강도를 높이는 건 당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결함을 지닌 채 극복될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불구자라는 것. 그것이 신체적 장애가 되었든 정신적 장애가 되었든 '불구'라는 조건이 인류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보려고 할 때 이는 '보편성' '타당성' '본질' 따위의 개념으로 다뤄질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이것 또한 추상화의 일환이다. 융의 말마따나 '추상화'란 외부 대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생생한 그 영향력을 축출하는 행위다. 여기서 외부는 자신의 신체를 기준으로 '바깥'을 의미하는 게 통념이지만, 내적 감각을 대상화하여 관찰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대상화되는 모든 것이 '외부화'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의 결함 또한 대상화가 된다면, 그것은 추상화의 조건이 된다. 어쩌면 이것은 플루서가 죽기 전 남긴 수필에서 말한 '무의미의 의미 설계'가 가리키는 21세기 당대의 버전이 아닐까. 나는 아직도 어떻게 해서 '설계 혹은 프로젝트'화가 될 수 있는지 그 감각을 붙들지 못하고 있다. 베케트를 읽어도 '어떻게 무의미에 소진되지 않을 수가 있어?'가 현주소지, 소진된 상태로부터의 자기 소외가 가능하진 않다. 머리로는 이러한 자기 소외의 궁극적 버전이 해탈에 버금가는 '평온함'인 것을 안다. 하지만 이런 궁극적 버전들은 앎과 삶의 괴리를 담보로 삼기에 인식은 가능해도 감당할 수 있는지의 문제로는 너무나 먼 이야기인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모르겠다. 더욱이 내가 그것에 제대로된 응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들어진, 의도된, 설계된, 조작된, 휘발된, 피상적인, 녹아 흐르는... 수년 전 봤던 다큐 '가자 서핑 클럽'이 문득 떠오른다. 지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가자 지구는 더욱더 폐허가 되었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큐 내용은 가자 지구에서 거주하는 한 인물이 서핑에 푹 빠져 날마다 파도를 타러 나가는 이야기다. 영상 말미에는 다큐 촬영진의 도움으로 서퍼들의 꿈인 하와이로 여행을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폭력적인 평온함이 주인공의 심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21세기라고 하는 건 이런 것이다. 오늘도 지구 어디선가는 피가 터져 나오고 있고, 폭탄이 터지고 있지만 어디선가는 자기 자신의 매력을 몸으로 돈으로 재능으로 뽐내며 자극적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디선가는 일생일대의 목숨을 건 상황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어디선가는 당장의 쾌감을 위한 도파민 도박판이 펼쳐지고 있다. 이 둘이 '양립 가능한' 시대가 바로 21세기다. 우리 정신은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진화한 게 맞을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의미를 찾는다는 건 곧 의미를 구축한다는 말이다. 나는 오랜 시간 의미 구축에 실패했고, 부정성의 무리한 개발 확장으로 말미암아 악순환에 들어서고 말았다. 지금 나의 정신은 낭만이란 모든 낭만을 적출하지 못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불안이요, 그렇다고 선취적 능력을 압도적으로 일축해 도파민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살아가지도 못하는 비겁함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굳어져 점차 독이 되고 있는 무늬만 고독이다.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은 희망일 수 없다. 그런 마술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의미를 구축하기 위해 내가 몰라보고 있는 건 무엇일까. 하지 않고 있는 건 무엇일까. 자폐의 개폐는 어떻게 하는 걸까, 혹은 이 모델 자체가 적합한 게 아닌 걸까. 나에게 필요한 건 의심하지 않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일종의 철학이다. 보는 방식, 느끼는 방식, 말하는 방식, 쓰는 방식, 이러한 방식들이 조직된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세상이 더 이상 책과 같은 '무겁고 차가운' 미디어-메세지를 의미있게 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깊이 따위는 필요없고 오직 표면-피상만이 전부라 할지라도 수정되어야 할 건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형식에 따라 내용 또한 변이되는 바,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그 행위는 오늘날 이 시대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나는 그 목소리에 감당할 수 있는 정직함을 담으려 노력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박탈하지 않는 낭만의 마지막 보루이리라. 몇몇 학자들이 말하는 21세기에 맞춰 극복되어야 하는 낭만주의란 무엇일까 가끔 고민해 본다. 반대로, 인간에게 '낭만'이라는 감동을, 정서적 체험을, 감정을, 의미를, 희망을 빼앗을 수 있을까? 적어도 몇 년 전의 나와는 다르게 이제는 상상할 수 있다. 이런 고민,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뿌리 깊은 고민을 돌파하며 유전된 것이 바로 '오늘날'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나와는 무관할 수 있는(피라는 혈연과는 무관한) 과거 인류들의 각종다양한 분투들 또한 당대의 환경 속에서 벌어졌단 사실을. 그때의 오늘날과 지금의 오늘날의 '동형성', 그러니까 '의미'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결국 우리는 살기 위해 산다는 '영원한 노끈' 말이다. 나의 힘으로 나의 노끈을 매듭지을 수 있다면 좋겠다. 여지껏 읽은 인자한 고인들이 말해준 건 이런 거였다. 아무리 남들이 자신의 삶을 부정하려 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정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인간 정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했을 때, 그들의 저서에서 이런 교훈을 이끌어내지 않을 수 없다. 개폐의 비밀은 어쩌면... 소외의 자립에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