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일지 3
23.06.02
일기
시를 써내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몸에 있는 기력을 죄 소진시켰다. 어느새부터 이런 수순이 아니면 '쓰는' 기분이 안 들었다. 어릴 적 로빈슨 크루소를 읽으며 생생히 몰입했던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크루소는 쏟아지는 악천우 속에서 몸에 있는 모든 기력을 다 쏟아부어 무리한 나머지 며칠을 기절해 있었다. 어떤 생명체든 사활을 걸 정도로 '있는 힘껏' 스스로를 소진시키면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 행동을 한다. 행동 같지 않은 행동. 1913년도까지는 인간의 사망진단표 항목 중 '소진되어 죽음'이 진단 가능했다. 인간이 죽을 줄도 모르고 스스로 죽음을 감행할 수 있는 행동 중 하나가 바로 소진이다. 회복을 위한 체력, 잠을 자기 위한 체력, 다시 재생하기 위한 체력조차 다 써버리는 바로 그 상태다. 정신을 몰아붙이는 세계에서 쉽게 간과하는 상태다.
지금도 아직 충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다. 그럼에도 일지를 남기기 위해 앉았다. 나는 지금 궤도에 들어섰다. 내가 어떤 정신 상태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 나아가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 상태 감각에 예리함이 벼려졌다. 지난한 방황 끝에 내적 지남력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남력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감각이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인간으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멀쩡해보인다는 말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의미하는 말도 많지 않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알려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하지만 권리와 의무 이전에 그것은 자유였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기에 내킬 때만 꺼낼 수 있는 비밀이었다. 이번 작업에 돌입하면서 여러 변화를 느꼈는데,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는 느낌이지만 왜인지 차원이 달라지는 기분에 가까웠다.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표현 가능해지리라 믿지만, 지금은 '변했다'는 표현이 최선이다. 얼추 윤곽을 잡아 보면, '쓰고 싶은 걸 고민하기' '쓰고 싶은 걸 고민하는 방식을 고민하기' '고민하는 방식을 달리하며 쓸 수 있는 걸 알아보기' '알아보는 방식을 달리하기' '보이는 걸 쓰고 싶게 만들기' 등이다. 내적 감각이라는 희미한 느낌에 기반한 표현이라 전혀 적확하지도, 그래서 누군가에게 공감이나 이해를 이끌어낼 수도 없지만 나에게는 꽤 분명한 변화였다. 비유하면 CPU 코어가 늘어난 기분이다. 하나씩 고민하는 게 아니라 다각도로, 복합적으로 머리를 굴리는데, 버거운 느낌이 아니라 즐거운 느낌이다.
작업에 돌입하며 꽤 많은 변화를 감지했던 건 자기 관찰의 결과다. 스스로를 관찰하는 데 투자한 노력이 있었기에, 노련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렇게 정신력을 다 소진시켜서 말 그대로 뇌가 샷따 내려버렸지만. 소진시키는 방식에도 지금까지 학습한 자기 상태에의 균형을 신경써서 그런지, 회복 기간에도 '쓰는 상태'의 불씨를 살리고 있다. 다시 말해 궤도에 안착한 것이다. 최근 (재)유행하는 도파민 관점으로 보면 과정 자체의 즐거움이 자리잡은 것이다. 인간의 자기 학습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사실 20대 때부터 깨우친 바가 있었다. 문제는 15~16년도를 기점으로 기존의 메커니즘을 부정하고 새로운 메커니즘을 장착시키는 데 이토록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다. 확실히 쉽지 않다. 스타일을 바꾼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동일한 사건이다.
좀 더 냉정히 말하면 지금 들어선 궤도는 '이제 시작'이다. 갈 길이 멀다. 제대로 뽕 뽑으려면 아직 굴려야 할 게 많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인간의 변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인간은 어째서 망가지는가?'는 '인간은 변할 수 있는가?'의 현실 버전이었다. 스스로 변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고, 또 자기 자신을 볼모로 실험까지 주구장창 해왔으니 사실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꽤 있다. 비유하면 존나 정확한 나침반은 갖고 있는데 닻과 노가 없었던 것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자기 작업을 통해 구축한 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닻과 노를 만들어 쓸 것인가에의 학습 시간이었다. 이 모든 설명이 죄 추상적이라는 건 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언젠가 정돈된, 안정된 언어로 남들 볼 수 있게 표현 가능해지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정리할 마음이 있다. 신자유주의니 네오 인간학적 관점이니 시대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자기 변화'에 비해 인간이 당사자로서 스스로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게 너무나 빈약하다.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압박에 비해, 내부로부터 발생시킬 수 있는 힘의 수지타산이 안맞는다.
나중을 위한 사변은 이쯤으로 하고, 이번 쓰기 작업 기록을 남긴다.
읽으며 쓰기
우연히 읽는다. '인터넷을 멈추면 우리는 다시 현실 세계로 복귀했다. 인터넷은 시뮬레이션 기계였다'. 우선, 언어를 본다. 인터넷을 멈춘다는 것. '다시', '복귀'. 이것들이 다른 걸로 조합될 때의 재미 더듬이가 세워진다. 다양한 버전들의 문장이 떠오른다. '의심을 멈추면 다시 사실로 복귀했다' '눈물을 멈추자 비가 다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다리가 움직였다' '집으로 들어가자 자아가 환영했다' 이런 메모들은 언젠가 쓰기를 할 때 거름이 된다. 그대로 갖고 올 것인가. 의미를 갖고 올 것인가. 맥락을 갖고 올 것인가. 술어만 갖고 올 것인가. 명사만 갖고 올 것인가. 따위의 기준은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부지런히 읽고, 메모를 남기고, 기록을 한다.
기록을 부지런히 했을 때, 특정 키워드로 서로 간 내용을 한 지면에 나열해 볼 수도 있다. '예컨대, 갑자기 컴퓨터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라는 문장을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낭만적 기계의 일부이다'라는 문장과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의 내면의 타자를 통해 알게 되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는 날마다 자기시험의 부담을 진다'는 문장. 이렇게 각기 다른 책에서 발췌된 문장을 하나로 이어서 보면, 인간이 컴퓨터를 사용할 때의 장면에 재미난 상상이 펼쳐진다. 이런 단상은 시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읽으며 쓴다는 건, 읽으며 뻗어난 문장들을 수집해 나열해고 배치하고 종합하는 쓰기다. 이 문장을 다르게 읽었을 때, 이 문장과 이런 의미 발생을 일으킨다. 이 문장이 다른 문장과 만났을 때 은유가 겹친다. 따위의 발견으로 쓰는 일이다. 나는 읽으며 쓰기를 꽤 믿을 만한 방식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이는 수행의 일종이다. 근 10여 년간 쌓은 기록 분량은 에버노트와 스크리브너의 통계 덕분에 추정 가능하다. 에버노트는 약 8년을 썼고, 스크리브너는 이제 2년 남짓이다. 기록을 위한 메모 및 작업 등 입력된 글자 수는 천만 자에 다다라있다. 읽은 책을 발췌하고 정리한 건 약 200권 남짓이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이 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재미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책에는 마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상엔 읽을 책, 재밌어 보이는 책, 누군가의 삶이 녹아들어가 가치가 느껴지는 책이 수두룩하다. 그렇기 때문에 읽으며 쓰기만으로도 평생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읽으며 쓰는 건 자칫 함정에 빠지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 바로 뚫고 나가는, 막막함을 굴착하는 쓰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분명히 판단하기 위한 시행착오가 수 년에 걸쳐 체험으로 있다. 해보니까, 확실히 다른 쓰기다. 이게 혼동될 수밖에 없는 느낌도 있어서 분간하기가 꾀까다로운데, 읽으며 쓰는 건 기본적으로 창작에 편입될 수는 있어도 창작 그 자체의 방식은 아니다. 다시 말해, 창작은 아무것도 읽지 않아도 쓸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아무것도 읽지 않아도 쓰는 능력과 읽으며 쓰는 능력이 결합될 때 분명 '좋은 책'이 나온다. 읽지도 않고 대충 쓰는 책들에게서 읽을 가치를 못 느끼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하다. 피땀이 서린 듯 진정성이 느껴지는 책을 읽고 나면, 쓴다는 행위를, 읽는 행위를 얕잡는 것들에 긍정할 수 없어지는 것이다. 가벼운 재미와 유희, 피상적인 언어, 휘발적인 언어도 나름 매력이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책 자체가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 만큼, 읽는 사람도 별 기대를 갖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읽으며 쓰기'가 결국은 자기 반성에 귀결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자기가 어떻게 읽는지에 따라, 쓰기가 모양난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읽는지에 따라, 쓰는 태도가 모양난다. 읽으며 쓴다는 건 '읽은 것'에 기반하는 게 아니라 '읽는 나'에 기반한다. 그래야지 읽지 않아도 쓰는 능력, 즉 모르게 쓰기와 섞인다.
모르게 쓰기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느낌으로부터 시작한다. 지면에 적는다. 그 다음에 어떤 게 써져야 할까? 쓴 걸 읽는다. 떠오르는 걸 분간하는 건 퇴고의 일부다. 옮겨 적기 전에 판단하는 것이다. 이럴 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억지로 적는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무시한다. 이 짓을 할 수 있는 끝까지 한다.
떠오르는 걸 계속 붙들다 보면 어느새 '이만하면 됐다'는 느낌이 든다. 멈추고 싶다. 바로 여기서, 한 번 더 쓴다. 다음을 쓴다.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모른다. 이미 뭘 쓰려고 했는지도 놓쳤다. 바로 여기다. 여기서 한 번 더 쓴다. 이미 맥락은 중구난방이 되어 있고, 누가 읽어도 개판인 글이 되어 있다.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믿는 인간들이 조현병 환자의 글을 보고 '현대 시 같다'고 소감을 꺼내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순간이다. 당신의 인식이 협소해서 이런 현상 해석이 불가능해도 상관없다. 다음의 다음으로 넘어갈 때 스스로 '미쳤다', '이게 뭐야', '뭔 개소리를 쓰는 건지'라고 스스로를 힐난하는 태도에 얼마나 자유로운지에 따라 당신은 미지에의 글쓰기를 감행할 능력이 결정난다. 당신은 미친다는 걸 얼마나 알고 있는가. 말도 안 되는 글에의 감수성이 얼마나 유연한가. 언어에게 과도한 '정상성'을 부여하는 건 눈치챌 수 있는가. 언어에게 이래야 한다는 걸 부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가. 바로 그 싸움이다.
이번에는 딱 한 번 '거부하며' 쓴다. 억지로라도 막 써내려 간 글을 보고,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에서 딱 한 번씩만 한다. 처음은 역시 당장 떠오르는 걸로 한다. 해가 떴다(쓰는 지금 오전 6시다). 배가 고프다. 창문이 열려 있다. 밝았다. 텅 빈 과자 껍데기가 있다. 따위든 뭐든 상관없다. 졸리다. 앉아 있다. 손가락이 움직인다. 귀에 멜로디가 들어온다. 다 상관없다. 적어두고, 그 다음 뭐가 떠오르는지 검열하지 않은 상태에서 붙드는 걸 적는다. 여기서 딱 한 번, 우회해 본다. 이거 말고 뭐가 떠오르지? 그 다음을 적는다. 어줍잖아도 상관없다. 이 짓을 다시 끝이 느껴질 만큼 한다. 쓰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여기서, 딱 한 문장만 더 쓴다.
어쩌면 이 짓을 반복할수록 혐오감이 솟구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언어 능력에 가해지든 표현 능력에 가해지든 어디서 본 건 있어 갖고 훌륭해 보이는 문구에 자기가 쓴 걸 빗대서든 움츠러들 수 있다. 무시한다. 엿먹으라고 한다. 이 짓을 하는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다. '내가 하겠다는데'에 무한한 믿음을 보낸다. 그래도 된다. 쓴 걸 누군가한테 보여주면 와르르 무너질 오만함이어도 상관없다. 당신은 자기 자신과 합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르시시즘이든 오만함이든 허영심이든 삐딱한 망상이든 뭐든 다 이용한다. 좋고 건강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합체하는 방법은 분명 있다. 그게 아무 노력 없이 자기한테 있을 거란 기대는 버린다. 일단은, 좆같을 때까지 쓰는 것이다. 좆같을 때 마지막으로 더 좆같을 때까지.
이 짓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써지는 언어가 나타난다. 아주 순간적이다. 단어 하나일 수도, 짧은 문장일 수도, 너무 단순해서 별로 힘도 없어 보이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느낄 것이다. 뭔가가 태어났다는 것을. 아무리 누가 뭐라해도 당신은 남몰래 그 태어난 걸 소중히 여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 소중함에 취해 과도해질 것이다. 좋다. 이번엔 그 작고 소중한 걸로 쓰기 시작한다. 당신은 어느새 당신이 쓴 것들로 비교하며 퇴고하기 시작할 것이다. 온갖 부작용을 피하고 싶다면, 아무리 소중해도, 쓰는 순간 만큼은 무시하고 밀고 나가기를 연습해야 한다. 당신이 길러야 할 건 쓰기 전까지는 쓸 마음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고, 사로잡힌 무엇도 없었는데 '쓰고 말았다'는 그 감각이다. 자기도 '모르게 쓰기'다.
모르게 쓰기를 즐겁게 한다면, 당신은 이미 궤도에 오른 것이다. 전혀 즐겁지 않아도 상관없다. 남들이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도 괜찮다. 자기에의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당신은 어차피 끊임없이 비교하고, 확인하고, 남들 걸 훔치려 들 것이다. 그런 자기를 감추거나 싫어하거나 위장하려고 애써도 좋다. 이 모든 짓이 언어를 사랑하기 때문에 벌어진다는 걸 인정하라. 당신이 언어에게 '이래야 한다'고 부가하는 것만큼이나, 사랑한다면 '이래야 해'라고 부가할 것이다. 반사적으로 씌우는 일종의 족쇄를 어떤 몸부림으로 풀어낼 것인가가 모르게 쓰기다. 결국은 족쇄를 단 채로 저 멀리 가 있을 수도 있다. 족쇄를 편안하게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뭐든지 빌미로 삼아도 좋다. 모르게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당신이 이 짓을 얼마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점점 능숙해질 거라는 건 당연하다. 절대, 그 누구도 같은 도착지에 도착할 수 없는 게 바로 모르게 쓰기다. 글쓰기가 세상에 유일하다는 건 에고를 과잉시키는 마케팅에 불과한 게 아니라 진실이다. 오히려 그걸 알기 때문에 마케팅으로 써먹는 것이다. 물론 모르게 쓰기는 오늘날 유행하는 너도나도 글쓰기와는 다르다. 이건 엄밀히 말해, 옵션이다. 반드시 할 필요도 없고, 꼭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한테는 다르다. 이건 옵션이 아니라 목숨이라고.
이번에 돌입한 쓰기 작업은, 나에게 있어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모르게 쓰기였다. 그래도 기본 원리는 똑같다. 다만, 스스로 가하는 언어에의 '정상성'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 오히려 조금 변질되어 있는데, 이 미묘한 균형을 의식하는 데에 한 걸음 나아갔다. 다음은, 계속 쫄보처럼 미루고 있는 꽤 험난한 작업이다. 무섭다. 겁난다. 못 쓸 거 같아. 자꾸 미루고 싶어. 유약함이, 나약함이, 비겁함이 솟구치게 만드는 그런 '시'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좆까, 밀고 나가는 방식은 20대 초중반에 이미 끝냈다. 나는 어떻게 원만하게, 나 자신과 같이 밀고 나갈 것인가를 배우고 있다. 내 삶에 있어서는 이게 30대 초중반의 방식이다. 지금 앞두고 있는 돌입은 실패 확률이 매우 높다. 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존나 자괴감 들 거 같다. 그래도, 간다. 바로 여기서 알게 뭐야 쓰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77WQdNbq9n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