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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4. 2023

단숨에 읽기

작업 일지 2


23.05.24



단숨에 읽기


일단 읽는다.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이 매일매일, 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환경에서 어떻게 범주화를 행하는가 하는 것은, 오히려 덜 알려져 있다'. 


나로 읽는다. '산업사회에서 나는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어떻게 주변을 구별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잘못 읽는다.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의 습관 속에는 부자연스럽고 특별한 조건들의 제약이 있다'.


잘못된 나로 읽는다. '도시에서 산다는 건 불편함과 버거움을 애써 잊으려는 온갖 몸부림에 지나지 않다'.


다시 읽는다.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이 매일매일, 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환경에서 어떻게 범주화를 행하는가 하는 것은, 오히려 덜 알려져 있다'.


강조하며 읽는다. '사람들이 매일매일 어떻게 행하는가'.


다르게 읽는다. '자연스럽고 평범한 환경이란 날마다 실행 가능한 범주화로 지탱된다'.


실제로 읽는다. '산업사회에서 산다는 건 각종 신호와 안내, 표준과 설명에 자신의 행동을 걸맞게 맞추는 걸 배우게 한다'.


이야기로 읽는다. '잠에서 깨어나면 시간을 찾는다. 몇 시인지 확인하는 순간 잠을 얼마나 잤는지 측정한다. 저울에 올라간 오늘의 수면은 8시간이다. 전문가들의 권고에 따르면 합격, 통과다. 부족했다면 잠이 충분하지 않음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잠을 얼마나 잤는지 측정하기 위해 동반되는 장치는 한손에 들어오는 스마트폰에 압축되어 있다. 이 스마트폰은 구동되기 위해 알아볼 수 없는 무수한 회로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저 적당한 불편감을 유발하는 충전 타입에만 유념하면 된다. 기종에 따라 usb, C, 8pin 등의 호환은 내가 정할 수 없다. 220v를 쓰는 대한민국의 콘센트 구멍이 110v를 쓰는 외국의 콘센트 구멍과 다르다는 것처럼. 전기가 이 집에 들어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누전차단기, 변압기, 송수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한 달 전기사용료를 얼마 내야 하는지가, 전기에 대해 아는 전부다. 사용자일 뿐이다. 잠에서 일어나는 순간 얼마나 잤지? 생각하며 스마트폰을 터치해 시간을 확인하는 그 찰나가 가능해지기 위한 무수한 기반은 보이지 않는다. 안 보여도, 찰나에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아는 척하며 읽는다. '도시는 범주에 포위되어 있다'.


시로 읽는다. '마음이 줄어들면 / 밑줄이 그어진다'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게 읽는다.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이 매일 하는 뭔가가 덜 알려져 있다'.


바보처럼 읽는다. '어떻게 할 수 있지?'


비인간으로 읽는다. '산업사회는 매일매일, 인공적으로 보이지 않는 거울 뒷면에서 어떻게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지 따라하는 데 지연되고 있다'.


단숨에 읽는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읽기 작업은 단숨에 읽기로 시작한다. 수면 불규칙, 생활비를 위한 노동은 신체-정신 체력의 재분배를 요청하고, 이에 스스로를 맞추다 보면 어느새 작업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럴 땐 다시 언어 작업에 스스로를 길들이기 위해 무작정 달려든다. 이해가 안 되도, 언어가 붕 떠도, 망상이 침입해도 스스로를 다스리며 신체-정신을 적응시킨다. 그 전에 정신 상태에 유의하라. 불규칙적인 패턴은 곧 마구 휘저은 대야 속 액체와 같다. 진정되기 위해서는 혼란스러운 힘이 소진되기를, 알아서 사라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토막난 물리 지식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힘을 전환시키기 위해 다른 물질로 이동시켜야 한다. 나는 이 이동기의 과도기 의식 상태를 방전 상태, 감전 상태로 부른다.


 도시에 사는 현대인은 전기에 주로 감전된다. 이 감전 감각을 시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아는 것만 쓸 수 있다는 쓰기의 제1원칙에 따르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감전 상태를 계속 관찰하고 있다. 감전된 사람은 전도체로부터 자신의 접촉 부위를 떼어내지 못한다. 무기력한 인간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처럼. 퇴근한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쇼파에서 불편한 잠을 청하는 것처럼. 밥을 먹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든 버스나 전철을 기다리든 유튜브를 눈에서 떼어내지 못하는 인간들처럼. 도시 속 거리를 활보할 때 귀에서 이어폰을 떼어내지 못하는 인간들처럼. 눈과 귀를 자극으로부터 이탈시키지 못하는 불안들처럼. 도시에 사는 현대인은 사실보다 더한 사실에 주로 감전된다. 아무리 써도 닳을 리 없다는 전기 숭배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식도 치르지 않는다.


 나는 이 의식이 도처에 널려 있을 것이라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의식은 정신의 의식, 제의의 의식, 옷과 음식의 의식을 넘나든다. 물론, 시를 쓴다는 건 이 넘나듦에 어떠한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과도해진 신경을 진정시켜야 한다. 읽기는, 반드시 단숨에 읽는다. 나에게 있어 다른 물질이란, 어김없이 언어가 박힌 종이다.


 단숨에 읽는다. 눈에 잘 안들어온다. 언어를 핥는다. 다음 문장이 나온다. 바로 전에 무슨 문장이 나왔는지 모른다. 왜 이 문장이 나왔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눈이 문장을 훑는다. '이럴 거면 왜 읽어?' 그제서야 이 문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다음 문장과 무슨 맥락을 구성하는지 연결한다. 그 다음 문장. 그 다음 문장. '재미없다'. 망상이 침입한다. 쓸데없는 문자 확인(요즘 주식 로또 관련 스팸이 존나 온다 시발새끼들 어디서 자꾸 대포폰을 구해서 날마다 다른 번호로 보내는지. 동의없이 내 폰번호 팔아버린 새끼를 몰라 혐오감 샘솟는다). 메일함 들락거리기. 냉장고 열기. 담배 피기. 다시 읽는다. 이번엔 그 다음 문장, 그 다음 문장, 그 다음 문장. 그렇게 안절부절 읽기가 점차 진정된다. 혐오도 진정된다.


 읽기를 하다 보면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영감에 휘둘린다. 이 영감은 위장한 망상이다. '잘못된 나로 읽기', '잘못 읽기', '엉뚱하게 읽기', '비꼬면서 읽기' 별별 이상 행동이 나타난다. 삼천포로 빠진다. 처음에는 한 번 빠진 삼천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면 불필요한 강박 습관을 한 바퀴 돌린다. 다시 읽는다. 다시 삼천포로 빠진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빨리 헤어나온다. 점점, 줄어든다. 나는 기꺼이 망상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의 표상을 부여한다.


 단숨에 읽기가 어느덧 궤도에 오른다. 메모와 밑줄에 점차 힘이 빠진다. 이전에 발생했던 영감, 아이디어들이 하나둘 참여한다. 서로 어울린다. 나는 같이 어울려 놀면서 즐거워 하기도, 나 빼고 지들끼리 노는 걸 보면서 당황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렇다. 나는 나를 데리고 작업하는 일에 여전히 능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기존에 작업하던 방식을 포기하게 된 맥락에는 분명 그럴 만한 환경이 영향을 끼쳤다. 잃은 건 잃은 것. 어떤 상태일지라도 작업으로 돌입하는 제로백을 배우기에 적합하다. 어제 오늘 통틀어서 약 24시간 걸렸다. 오늘 가속을 부가했기 때문에 잠을 자고 일어나도 유지되는 속력이 있을 것이다. 


 작업 환경에 변화를 줬다. 키보드를 쪼갰고, 모니터를 한층 더 올렸다. 인체공학? 말이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도구가 나를 길들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피드백을 적용했다. 정형화된 패턴을 구축하려는 마음은 지웠다. 언제나, 늘 새롭게 달라지는 미묘한 의식 상태에 그때그때 맞출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나에게 알맞는 방향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의존에 대한 민감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스트레스를 수용하는 정신의 하부구조에 대한 표상 감각도. 확실히 2023년은 실전의 해다. 다시, 직접 하기에 맞춰지고 있다. 다음은 쓰기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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