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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18. 2023

아무것도 쓰지 않기

작업 일지 1


23.05.18



쓰지 않음을 관찰하기


일단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쓰기 위해, 써야만 하기 위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걸 그만둔다. 무언가를 '위한'다는 목적 자체를 지운다. 목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는 자세를 유지하는 연습을 필요로 한다. 이 자세는 꽤 불안정하다. 미묘한 기술이 필요하다. 마치 '가만히 있기'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 나가는 몸 자체는 의식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지만 목적에 도착하는 경유지처럼 순식간에 몸을 지나친다. 그러나 도착지가 몸 그 자체, 그러니까 가만히 있기가 되면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심장의 박동, 말초신경의 연쇄 작용, 호흡은 몸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멈추지 못한다는 걸 증명한다. 가만히 있기는 몸이 의식과 얼마나 다른지, 의식에 비해 이질적인지를 보여준다. 목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는 의식 안에서도 이질적인, 저항하는,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의 움직임이 있다는 걸 느끼는 상태다.


 쓰기 위해 쓰지 않는 건 터득하기 어려운 기술이다. 이에 비해 그냥 쓰지 않는 건 쉽다. 쓰지 않는 상태를 의식하지 않고 다른 걸 하면 되니까. 딴짓을 하는 것도 쓰지 않는 것이다. 쓰지 않는 상태는, 쓰지 않음을 의식하는 상태다. 도대체 뭘 의식하는 걸까. 쓰지 않음을 의식한다고 '나는 지금 쓰지 않고 있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건 상태의 겉면일 뿐이다. 겉면을 훑는 건 주의해야 한다. 목적을 지웠을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의식이 바로 겉면 훑기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 하지 않음에 대해 말한다거나 무언가를 한다고 끊임없이 표현하는 게 이에 해당된다. 바깥으로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그걸 하고 있음을 확인하려는 시도다. 이는 대체로 직접 자기 상태를 감각할 수 없을 때 활용된다. 


 쓰지 않음이 쓰지 못함으로 다가오면 겁이 난다. 쓰기가 무서워진다. 쓰기 앞에서 느끼는 이 공포는 무슨 공포일까. 막연함, 불안, 침묵 앞에서의 좌절. 나는 이 감각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 익숙한 감각인지를 떠올린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억지로 하게 될 때 마음이 떠 버리는 상태, 즉 괴로움이다. 하기 싫어서 괴롭다. 죽겠다는 말이 나온다. 누구는 지옥 같다고 말한다. 고작 쓰기가, 공부가, 무언가를 새롭게 해 나가는 바로 그 고작에? 이 두려움은 뇌가 보상을 보장받지 못할 때 닫아버린 어떤 장막처럼 보인다. 그곳에 어떠한 보상도 없어. 어떤 성과도, 보람도, 노력을 해 봤자 남는 게 없어라는 실패로 애초부터 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같다. 분명히 이전에 해봤던 것이다. 해봤는데 남는 게 없었던 것이다. 결과가 안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괴롭다. 해야 하는 노력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성과는 점점 멀어져 간다. 뇌는 저항한다.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 니코틴도, 당도, 탄수화물도 먹히지 않는다. 임시방편이다. 괴로움에 짓눌리다 보면 극단적인 선택도 가능해진다. 약물에 의존하기, 손쉽고 편리한 방법으로 '새로운 세상에 눈 뜨기' 같은. 알콜 중독이나 마약, 향정신성 물질들은 이 인식의 괴로움으로부터 한순간 구원해준다. 이걸 보상으로 여기도록 반복하면 뇌는 이것 말고는 다른 보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굴레는 완성된다. 괴로운 사람은 해로워진다.


 괴로움을 억지로 견뎌내는 건 팔팔 끓는 냄비 뚜껑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과 같다. 이음새가 없고, 압력을 계속 줄 수 있다면 성공적으로 내용물을 가둬둘 수 있다. 그러나 방심하는 순간, 바로 터진다. 견디는 걸 하지 않기 위해 보상을 대체해야 한다. 담배를 피고, 달달한 걸 먹고, 손쉬운 자극에 이끌린다. 어차피 괴로움은 어디 가지 않는다. 괴로움은 늘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내가 제 발로 다시 돌아올 거기 때문에, 정당하게 도망친다.


 도망치는 건 쉽다. 시간이 잘 간다. 어떠한 노력도, 저항도, 불안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을 죽인다. 시험 볼 시간에 바깥에서 놀고 있다. 정신 안에는 분명 다른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각기 다른 방으로 나뉘어 있다. 겉면 훑기는 그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입으로 떠드는 것과 같다. 문턱 넘기는 고작 한 걸음이지만 다시는 뗄 수 없을 것처럼 무겁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처럼 달라붙어 있다. 이전에는 쉽게 넘나들었을지 몰라도 그 방에 들어가기가 점점 버거워지면 이제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방이 된다. 한 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방이 된다. 호기심 가득한 미지의 세계가 아닌 엄습하는 공포의 베일에 둘러싸인 숲이 된다. 언제 요동칠지 모를 망망대해가 된다. 아무런 중력도 느껴지지 않는 우주 공간이 된다.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깊은 동굴이 된다.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다채롭게 만들던 그 곳이, 하나둘 앗아가다 이내 적출하려는 끔찍한 고문 공간으로 변한다. 


 이 공포는 감각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공포다. 불안. 좌절. 두려움. 무기력. 빼앗기지 않으려고 숨을 죽인다. 움직이지 않는다. 죽음의 형상인 시체를 패러디한다. 그러면 무사히 나를 지나칠 것만 같다. 더 이상 내가 표적이 아니게 될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죽기 위해 시간을 죽인다. 시간을 죽인다는 건 곧 견딜 수 없는 시간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것은 반복된다. 들썩거리는 뚜껑을 대신 눌러줄 것들을 찾는다. 돌을 올려 놓기도, 줄로 묶어 붙들기도,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접착제를 붙이기도 한다. 첫 번째는 지금이 아닌 나중에 하자는 마음이다. 두 번째는 대충 하면서 잘 하고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세 번째는 허투루 하면서 제대로 하고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불을 조절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그렇게 괴로움도 줄이지 못하고, 맞서지도 못하고, 항상 늘 그자리에서 기다리는 걸 어쩌지 못한 상태로 시간이 흐른다. 쓰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쓰지 않음에 말 걸기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그 상태를 즐기자. 한 글자도 씌어 있지 않은 순간을 누리자. 충분히, 마음껏. 들여다 보는 거야. 쓰고 싶었던 것들, 쓰기 싫었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쓰지 않은 것들. 어제 있었던 일, 언젠가 있었던 일, 일어날 일. 어땠는지, 몰랐는지. 떠오르는 게 없는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건지, 느껴 봐.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어. 햇빛에 그을리다 그만 구멍이 뚫린 거야. 그 구멍 테두리에 열기가 남아 있어 뜨거워. 손을 갖다 대면 데일 거 같아. 고드름. 화상은 뜨거워도, 차가워도 입는다고 하던데. 구멍에서 무언가 자란다면 뾰족할까 딱딱할까 부드러울까. 왠지 노랑일 거 같은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즐거워지는 건 쉽지 않아. 속이기 같지. 애써 그런다고 정말 그럴까. 즐거움은 괴로움과 같은 방을 쓸 거 같지 않아. 같은 방을 각자 드나들 수는 있어도, 같이 살 수는 없을 거 같아. 계약 기간이 다른 입주민이랄까. 화장실에 변기를 하나 두는 일. 부엌에 싱크대를 하나 두는 일. 현관이 하나인 일. 어떤 감정은 쪼개지고, 분열 증식하고, 다른 것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어떤 감정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굳건하지. 괴로움에는 아주 오래된 냄새가 나. 끊임없이 타는 냄새도 나. 편안할 새도 없이 불안하지. 즐거우려면 무엇보다 겁이 없어야 해. 겁이 나는 순간 이미 글렀어.


 그럴 땐 딴짓을 해야 해. 겁난 적 없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전혀 상관없는 일들. 바보처럼. 바보라는 말을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걸 주의해. 낮잡는 모든 말들은 맥락을 바꿨을 때 충분히 쓸모가 있으니까. 스스로 바보가 되려는 건 바보라는 태도로 세상을 관찰하기야. 알고 있는 것. 안다고 닫아버린 것. 더 이상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묻어버린 것. 의식하지 않는 것.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거기에서 한 걸음 물러나 모르는 상태가 되는 거야. 속이기 같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모른다는 건 숨쉬기와 같아. 숨을 쉬듯, 몰라.


 몰라서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려 봐. 얼마나 낡았으면 이렇게나 희미한지. 그동안 누려본 적이 있는지. 더듬거리다 보면 만져지는 내가 있어. 모르는 나. 어? 나 이거 몰라. 이게 뭐지? 방 안에 물건이 왜 이렇게 많지? 어디서 만들어졌지? 어째서 여기에 다 있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각각 만든 물건이 이렇게 한데 모여 있네? 잘 작동하네? 사람으로 치면 축제 같은 건가? 이 물건들에도 무슨 분위기랄게 있나? 뭘까? 


 막막했어. 이 막막함은 어째서 느낄까? 사람들은 막막할 때 뭘 할까? 어떤 절망은 노래를 부르게 한다. 난 노래를 부르지 않아. 흥얼거리기는 하지. 멜로디는 정신 작용일까 소리 진동일까. 동물의 노래가 궁금하지만 동물은 노래를 불러주지 않아. 왜냐하면 내가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지. 나 빼고 모두가 듣는 노래를 혼자 듣지 못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인간 손에 붙들린 다른 종들은 이 감정을 느낄까? 개, 고양이, 새, 사육된 다른 종. 인간 손에 붙들린 동물은 인간을 배우고, 인간은 양육이라는 이름으로 동물의 습성을 배운다. 나더러 배우라고 하면 막막하겠지. 이 막막함은, 같은 막막함일까.


 혼자 남겨진 기분은 혼자가 아니라는 흔적을 만나야 가벼워진다. 무거움과 가벼움. 막막함으로부터 벗어나기는 무게를 덜어내기를 닮았어. 힘을 빼는 일과 닮았어. 무슨 힘을 빼는 걸까.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을까.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가장 작은 알맹이를 보려고 충혈된 눈이 있어. 눈을 감는 것. 쓰지 않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조준을 거두는 것. 무언가를 하기 위해 청소부터 하는 마음이다. 정리정돈은 정신을 가다듬기다. 보듬기, 가다듬기, 쓰다듬기. 손으로 하는 다듬기. 고르게 하고, 바르게 하기. 정해진 건 없어. 그저 한 번 손을 대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손을 따라가면 돼. 내맡기기. 바보가 되기.


 말을 건다는 건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야. 계속 무언가를 붙드는 일이야. 바로 앞에 있는 것. 떠오르는 것. 가벼운 것. 사라지는 것. 없어지기 전에 부르는 일이야. 잠깐. 잠깐만. 그렇게 순간을 불러 세우는 것. 잠깐이면 돼. 뭣좀 물어볼게. 이게 뭐야? 하고.






일기


몇 달 동안 쓰지 못하다 이제서야 뚫었다. 돌입에 한 번 성공했다. 이 기술을 배우는 건 주저앉을 만큼 어려우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손쉽다. 어처구니가 없다.


 쓰기는 하나다. 하나부터 하나까지. 처음이 다음이 되고 다음이 처음이 된다. A=A, 그렇게 만드는 굴레다. 다른 걸 같다고 우기는 억지다. 묘한 통쾌함이다. 복수다. 양심에 찔리기다. 사기다. 호기심이다. 재미다. 무서움이다. 하지만, 그런 게 쓰기다.


 하나는 무엇이든지 하나, 이유불문 하나, 어쨌든 하나, 알게 뭐야다.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무모함이다. 나는 이 짓거리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기본을 자꾸 잊는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길을 잃는다. 자꾸 잃으면 다시 배울 줄도 몰라 한다. 그래도 결국은 처음이다. 다음의 처음, 처음의 다음, 언제나 늘 그렇듯 처음이다. 부채감에 시달리는 사람일수록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심리를 새삼스럽게 배운다. 잠을 자는 한, 사람은 깨어난다. 어제와 오늘이 더해지고 있다고 믿는 것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세계라고 당황하는 게 자연스럽다.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속력은 시간 분의 거리. 작업에 있어서 지침을 감각하지 못했고, 바로 세우지도 못했다. 이제는 하나씩 한다. 이해하는 것들이 늘어났고, 알아볼 수 있는 게 늘어났다. 그래서 이제야다. 적당하고, 적절하다. 거리 조절, 시간 조절, 스스로도 속이는 '방향', 그래야 속력이 나타난다. 이 속력은 지금이다. 지금은 호리병처럼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입이라는 말을 쓴다. 빠져든다는 말을 쓴다. 다른 상태에 당황해 한다. 이 당황은 중력 같다. 언어를 빌미로 대응되는 상반된 지시 대상을 감각으로 연결하는 건 정신의 특권이다. 이 차원이, 바로 쓰기의 방이다.


 이 방은 아무때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절차를 따라야 한다. 이 절차는 언어와 내가 맺은 표준 계약이다. 평소에 내가 언어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에 따라 간소할 수도, 복잡할 수도, 그래서 거부될 수도 있다. 언어는 꽤 다양한 방을 두고 있다. 한 번에 한 방씩 들어가는 건 엄격한 규칙이다. 방과 방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벽을 허물고 문을 만들어 열어야 한다.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먼저 방을 이해해야 한다. 벽을 이해하고, 벽을 어떻게 허물지 이해해야 하고, 도구를 이해해야 한다. 이 모든 걸 흉내내기로 하는 건 복불복이다. 스스로 하려면 인식력을 길러야 한다.


 돌입을 하지 못할 때는 아무거나 쓸 것. 그러나, 절대, 아무거나 쓰지 말 것. 도망치지 말고 정면돌파를 할 것. 피하지 말고 우회할 것. 이 기술은 아 다르고 어 다르게 느껴질 만큼 감각적이다. 그래서 계속 해보고, 자세를 교정해야 한다. 신체는 거울을 통해 홀로 교정 가능하다. 정신은 언어를 통해 홀로 교정 가능하다. 반영되는 상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볼 것. 언어는, 절대 구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구멍에 있어야 언어가 나타난다. 


 다음 작업은 '돌입'이다. 돌입 전에 가장 주요한 상태는 공포였다. 이 공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함을 붙들 때 더욱 거세졌다. 쓰기가 무섭다. 그러나 나는 이제 불안을 마주한다. 괴로움을 받아내는 연습을 시작한다. 뇌에게 보상을 주지 않는 그 상태 속에서 대화를 한다. 회로의 신호처럼 자동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걸 끊는다. 그제서야 나는 신호를 알아본다. 현재 내가 어떤 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감각들이 하나씩 찾아온다. 나는 이제 방심하려는 의식의 조리개를 조인다. 하나씩이다. 돌입했을 때 벌어지는 상태는 너무나 익숙하고 뻔하다. 하지만 이제는 놓아준다. 처음 배우는 돌입에 내가 놓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모른다. 바둑처럼. 정신이 돌 하나를 놓으면 다음 차례는 나다. 돌입. 돌의 입장. 


 유보시켜둔 책들도 마찬가지다. 읽기에도 돌입을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살아나는 이 흥미는 꽤 선선한 바람 같다. 순간 스치는 상쾌함 같다. 바람을 뒤쫓을 게 아니라면 건네받은 기분에 감사하고 갈 길을 가는 것. 소진의 굴레를 다르게 작동시키기 위해 하나씩 비틀고, 다시 끼워 맞추는 느낌. 나는 다르게, 또 다르게 존재하는 기예를 다르게, 또 다르게 소진하는 기예로 오독한다. 결핍의 자극을 다른 구조로 돌아가게 수정한다. 구조는 운동과 힘, 흐름을 통해서만 유추 가능한 추상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나와 함께 하나씩, 돌을 둔다. 이제 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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