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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r 14. 2024

외갓집

내면 작업 17


24.03.14



시골에 다녀왔다. 예기치 않은 부고가 겹쳐 예정보다 며칠 더 머물다 엊그제 집에 도착했다. 정말 많은 친인척을 만나고 왔는데, 특히 친가 사람들은 나에게 있어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사람을 포용하라'고 주문하고 요청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지에 골몰하며 살았었다. 20대 후반에는 광화문 거리에 나타나는 586 태극기 부대 사람들이, 나에게 있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들의 저열한 언어상의 폭력, 자폐적인 공동체 의식, 타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치졸함 따위가 나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인간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가 사람들은 그 다음 후보였다. 나의 아비는 장남으로 집안의 기둥을 담당했었다. 솔직히 이번에 시골에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려지지 않던 '아비의 삶'이 있었다. 이건 세대 차이로도 느껴졌다. 내 또래 인간들에게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삶의 가치가 나의 아비에겐 있었다. 시골에 가 여러 할아버지들, 소위 옛 사람들을 만나면 21세기 20~30 인간들과 얼마나 큰 정신의 차이가 있는지를 매번 느낀다. 이건 어떤 공동체에서 유년을 보내느냐에 따라 형성될 수밖에 없는 어떤 도덕관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특히 비뚤어진(그럴 만한 이유는 다 있다, 현재의 시선으로 이런 관습을 안좋게 보는 건 이성 사용자로서 좋진 않다) 유교 문화 안에서도 몇 째 자녀인지, 어떤 집안인지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는 도덕관과도 관련되어 있다. 나의 아비는 내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능숙하게 잘 하던 그런 관계에의 책임감을 나에게 학습시키려고 했지만, 나는 늘 귀찮아 하고 내키지 않다는 이유로 절대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아비가 죽기 전부터도 그랬지만, 죽고 난 이후부터는 확연히 친가 사람들과의 인연이 희미해졌었다. 친가 쪽 남자들은 모두 단명했고, 현재 남아 있는 '아들'은 나뿐이다. 고모는 모두 5명인데, 그녀들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파란만장하다. 내 기억으로 1명 빼고는 모두 고모부가 2번째다. 내 기억이 맞다면 범죄자 고모부는 2명이다. 작은 아빠를 포함해 가정 폭력을 하는 '아빠'들은 3~4명이다. 큰 며느리인 우리 엄마를 못살게 굴고, '돈'에 눈독들이며 이기적으로 구는 사람은 고모 5명을 포함해 7~8명이다. 나는 작은 아빠가 죽었을 때 시골 집에 가서 아빠와 관련된 모든 물건과 집안 족보를 서둘러 챙겨 왔었다. 매일 말로는 '종가집 장손'이라며 나에게 알 수 없는 의무감을 부여했기에, 이제는 대가리가 커진 나로서 그 연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내가 과연 짊어질 수 있는 '책임감'인가에 대해서 두루뭉술한 게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인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족보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종가집'이라는 단어는 거짓, 그런데 거짓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가계도였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 위로 7대인가 8대 째 한 할아버지의 첫째 자식 분에게서 '대물림'이 끊겼다면, 꼼짝없이 내가 짊어지게 되는 가계도다. 하지만 분명한 건 '종가집'은 각 씨 안에서도 오직 한 가문이다. 그러니까 각종 종파를 달리하고, 어느 세대부터 한 지역에 터를 잡아 '큰집' 노릇을 해온 역사가 1~200년이 쌓이는 등 여러 사라진 실마리가 작금의 '장손'을 만든 게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나는 명실공히 '종가집 장손'은 절대, 결코 아니지만 이미 얽히고설킨 여러 가계도 안에서 내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무수한 할아버지들이 나에게 자신의 부모님 묘를 잘 부탁한다며 인사하는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 한다.


 이 얘기를 적는 이유는, 이번에 외갓집에 가 외할머니와 엄마, 작은 이모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온 뒤 집으로 돌아오려는 그때 친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날로 곧장 장례식장에 가 나는 상주 역할을 해야만 했다.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친가 친인척을 빠짐없이 만나야 했다. 이 자리에 누나는 빼주고 싶었다. 엄마도 빼주고 싶었다. 내가 있으면 내 가족에게 함부로 굴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편치도 않은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게 내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 작은 아빠가 죽었을 때도 느꼈던 '나의 변화'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장례식장에 가기 전에는 케케묵은 거부감이 일렁였지만, 상주 역할을 하는 3일간 나는 친가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체험하게 되었다. 몇 년 전의 나라면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태다.


 외할머니도, 작은 이모도, 큰 삼촌도, 그리고 내가 흐린 눈으로 잘 보지 않으려 했던 엄마의 '그림자'도. 그러니까 외갓집의 여러 면모와 더불어 친가의 여러 면모를, 1주일의 여행 동안 포용하고 있는 내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포용의 균형이 잘 맞춰지고 있다는 걸 확신할 때는, 특히 엄마의 그림자를 투사 없이 바라볼 때 느꼈다. 나는 엄마의 정신 보조자로서 배려와 세심함을 깔아주는 데 특화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엄마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옹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어른들의 '투사'들을 관찰하며 거기에 휩쓸리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게 이제는 기본기로 되는 걸 자주 확인했다. 외할머니의 투사, 작은 이모의 투사, 큰 삼촌의 투사들. 친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성격에서 비롯되는 온갖 투사들. 상주 역할을 하기 전 하루에 12시간씩 매일 운전을 했던 날에도 충분히 잠을 못 잤는데, 상주를 보느라 토막잠을 자 피로가 누적되었던 마지막 날 큰 삼촌의 투사가 나에게 세게 들어왔던 게 그나마 유효한 타격이었다. 그래도 이 투사도 노련하게 대처해 내 정신을 향한 메타 리딩도 잘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피로가 쌓이면 스트레스 내성이 약화된다는 걸, 약화된 상태에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게 변화의 핵심적인 유효점이었다. 내 삶의 이력으로 반추해 봐도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체감하는 1주일이었다.


 친가 사람들은 더 이상 나에게 악마들이 아니다. 그들의 양면성, 이기적인 면모, 사리사욕에 눈이 돌아가는 속물 근성 따위도 이제는 나에게 거부감을 주는 사로잡힘의 영역이 아니다. 아마 융도 이에 대해 삶의 체험을 통해 깨달은 걸 알려주겠지만, 내가 포용하게 된 각종 면모들은 결국 내 안에서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제 포용한 걸 갖고서 '나의 그림자'로 다시금 다뤄야 하는 과정에 돌입한다. 어릴 때 무척이나 거부감이 들었던 작은 이모도 지금의 나에겐 그저 한 사람이 되었다. 작은 이모는 아니무스 투사가 꽤 심한 편인데, 이를 발달시키거나 분화시키지 않은 상태다. 작은 이모는 여행하는 동안 나에게서 편안함과 좋음을 느꼈는지 자기 있는 동안 호주에 꼭 오라고 초대를 했다. 큰 삼촌에게서 느낀 투사는 관계성에 대한 투사였고, 나에게는 이 투사가 왜 여즉 발달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인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내가 먼저 받아들여줄 수 있었다. 


 친가 사람들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정말이지 성찰이라는 건 애초에 필요없다는 게 기본인 거 같다. 사람은 성찰을 하는 게 기본이고 당연한 거고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그 반대가 맞다. 그래도 잘 산다. 투닥투닥하고 상대를 서운하게 만들고, 본인의 정신 세계에 대한 차폐막을 고수해도 잘 사는 건 잘 사는 것이다. 마뚜라나 바렐라 선생들이 말하고자 하는 인지 모델도 적합하게 적용된다. 자신의 인지 구조와 타인의 인지 구조가 만나 어떤 구조접속이 일어난다는 것. 성찰이라는 건 자신의 인지 구조를 타인의 인지 구조라는 어떤 모델링으로 재귀적 피드백을 거쳐 변형(스피노자 용어라면 변양)시키는 행위이지 않을까. 이에 대한 이점은 별로 크진 않은 거 같다. 그저 상대를 보다 덜 불편하게, 덜 불쾌하게, 나아가서는 편안하게 해주는 것. 거칠게 말하면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장례식장에서 다시 한 번 느꼈지만, 나의 아비는 여전히 무수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아빠는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 있다. 나는 아빠의 그림자를 보며 자랐지만, 아빠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늘 아빠를 한 집안의 기둥으로 기억했다. 정신적 지주라는 게 뭘까? 이번 시골 여행을 통해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친할머니의 화장터에까지 자리를 지켜준 아빠 친구 한 분은 '장남'과 '장손'에 대한 순수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손은 하늘이 내려줘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이 말이 왜 생겼는지, 나는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장손이 장손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의 그 정신 세계를 조금이나마 공감한다. 돈에 눈이 멀어 선산을 모두 탐하고 빼돌리는 고모부는 내 눈치를 보며 다른 고모부를 통해 내가 아빠 묘를 치웠으면 하는 소위 '정치질'을 하고 있다. 여러 할아버지들은 큰 집에서 벌어지는 이 탐욕의 현장을 알고 치를 떨고 계신다. 자신들의 부모님을 모욕하고, 자신의 '역사'를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케묵은 유교 문화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장손인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나는 이 무게를 점점 더 크게 느끼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아빠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장남 노릇'에 대한 비난이나 서운함, 힐난 등을 나에게 꺼내시더라도 변함 없을 것이다. 나는 자신의 속물욕, 인정욕, 권위욕으로 선산을 빼돌려 팔아먹는 고모부조차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 아빠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고모부들의 등을 토닥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전에 친가에 가면 늘 소외감을 느꼈었다. 이번에도 나는 거의 은따 당하듯 상주 역할을 도맡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혼자인 건 숨쉬듯 자연스러운 일이고, 사람들과 다르다는 소외감은 더 이상 나에게 그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먼저 악수를 권하고 안부를 전하고 따듯하게 웃어줄 수 있다. 


 꿈에서 왜 그렇게 외갓집이 나왔을까, 다녀오니 조금 알겠다.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이전과는 달리 정말 많이 변했다는 것. 근데 이 변화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타났다는 것. 그런 것들만 알겠다. 장례식장에서 쪽잠을 자다가 한 꿈을 꿨었다. 내가 한 트렁크를 몰래 훔치려고 했는데, 한 남자가 그걸 금화 1~2개로 마술처럼 바꿨다. 나는 그 남자에게서 그걸 배우고 싶어 따라간 장면. 차로 건너편으로 가는데 물에 듬뿍 잠겼으나 끝내 건너갔던 장면. 사교장에 갔던 장면 등만 희미하게 기억난다. 솔직히 꿈 기록을 성실하게 안 하고 있다. 하지만 꿈을 대하는 태도, 의식을 대하는 태도는 융을 통해 배운 그대로로 임하고 있다. 지금의 인격 상태로라면, 나는 1인분의 생애에서 달성할 수 있는 웬만한 장애는 거진 극복한 게 아닐까 싶다. 17~18년도나 21~22년도와는 다르게 매서운 속도로 정신이 안정화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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