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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r 22. 2024

우리는 결코 자신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작업 노트 4


24.03.22



스케치 #3


109(190) - *

... 나는 생각할 힘이 없기 때문에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멈출 용기가 없기 때문에 끝을 낸다. 이 책은 나의 비겁함을 말하고 있다.
...
 글을 더 잘 쓰지 못하는데, 나는 왜 글을 쓸까? 글을 쓰는 동안 내가 나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해서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쓰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창작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열망하는 동안 평민이 된다. ...
 내게 글쓰기는 나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글쓰기를 그만둘 수가 없다. 글쓰기는 증오하지만 계속 취하는 마약과 같고, 경멸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악덕이나 마찬가지이다. 글쓰기에는 필요한 독이 있고, 영혼의 성분을 구성하는 아주 미묘한 것이 있다. 폐허가 된 꿈의 잔해에서 모은 약초와 무덤 근처에서 찾은 검은 양귀비[…]. 영혼의 시끄러운 강둑 위로 가지를 흔드는 역겨운 나무의 기다란 잎사귀가 있다.

 그렇다. 글쓰기는 길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것은 상실이므로, 모두가 길을 잃는다. 허나 자신이 태어난 곳인 줄 모르고 강어귀로 흘러가는 강물과 달리 나는 만조때 해변에 고인 물웅덩이처럼— 이 물은 모래에 흡수되어 결코 바다에 돌아가지 않는다—길을 잃을 때 기쁘지 않다.

-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까치


 ‘버릇인데, 글을 쓰려고 하면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나는 공포에 질리곤 한다. 한 가지 생각만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아주 분석적이고 통찰력이 가득찬 문장으로 쓸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내 정신은 너무 얇고 힘이 없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허겁지겁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다. — 성실함이란 얼마나 통속적인 미덕인가.’ -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여러 책을 비교-대조하며 병렬 읽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이상(김해경)-페소아는 구미가 당기는 매력적인 재료였다. 이상의 분열과 페소아의 분열은 자의식을 향한 응시의 다른 태도를 제공하는데, 전자는 '추상 공간'으로의 발산에 능했고 후자는 '불구로 인한 결여 공간'으로의 유영에 능했다. 당대 사람들이든 오늘날 사람들이든 이 작가들이 어쩌다 유행했는지, 혹은 '읽혔는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이런 작가들은 대체로 사람들로 하여금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전에는 결코 읽힐 수 없는 작가 진영에 포함된다는 걸 분명히 해둔다. 거칠게 말해 이런 작가들이 읽힐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의 이름은 (이상이 산문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자의식 과잉'이다.


 자의식 과잉은 크게 두 방향으로 포착된다. 하나는 '나르시시즘'으로 다뤄지는 과시와 허영, 이기적-자폐적 과도함이고 다른 하나는 '니힐리즘'으로 다뤄지는 혐오와 경멸, 냉소와 자기부정의 과도함이다. 개인성이 지배적인 근대 이후의 시대에서 각개의 사람들은 그에 따른 언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호환 가능한 기기가 된다. 몇몇 작가들은 이런 호환성을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로 일종의 혜택과 특권을 누리기도 했는데, 한때 문청들에게 일종의 화폐처럼 자리했던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2010년대 중반 쯤 마찬가지 잠시나마 컬트적 반향을 일으킨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통해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이란 자의식 과잉으로 말미암은 '자기부정'이 어떤 감수성으로 세계를 향해 확장되는지에 대한 스케치로, 어쩌면 자기부정의 전문가라 칭할 수 있는 에밀 시오랑과 페르난두 페소아의 한국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대개 이런 작가들은 독자가 자기 자신을 향한 부정적 응시에의 '문제'를 겪지 않고서는 소위 '거래'되지 않는다. 또한 독자가 사춘기의 정체성 위기를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문제'를 마치 한때 그랬지라는 식으로 지나가게 되면, 이런 작가들은 잊혀지기 일쑤다. 반대로 이런 작가들은 이런 문제를 어쩌면 영원히 극복하지 않음으로써 해당 지평을 언어로 담아낼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바람일 수 있는 삶의 혼란이, 작가 당사자에게는 디딜 곳 없는 지평의 갈라짐으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난듯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아마 공개적으로 발화하지 않은 작가가 더 많겠지만, 이런 자기부정을 언어로 다루는 무수한 작가들은 이런 자의식이 누군가에게 드러나는 걸 무척 끔찍하게 여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이 노출되는 데 무척이나 방어적이며, 일반 사람들이 그런 내용을 통해 공감과 용기와 위로와 찬사와 사랑을 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럽고 하찮고 기만적이고 같잖은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율배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면 줄리언 제인스의 [의식의 기원]이나 스티브 테일러의 [자아폭발]은 조금 도발적이긴 해도(그래서 읽는 맛이 있기는 해도) 이런 '자의식 문제'가 '뇌'의 구조와 같이 봐야한다며 거시적 발생의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자아폭발]은 절판된 채 중고가 몸값을 높게 세우고 있었는데, 최근 재간되었다. (되팔롬들 잘됐다..) 자기응시의 과도함으로 말미암은 삶의 문제를 겪는 사람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갖은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벤야민이 엄청나게 집요한 성실함으로 수집한 [아케이드 프로젝트] 속 '산책자'는 이상에게서도 발견된다. 특히 그의 산문 '권태'는 명실공히 벤야민의 산책자인데, 그는 주변 세계를 관찰하며 모종의 주체성에 기반한 감수성을 발산하고 있다. 따분함, 건조한듯 간절한 아해들에의 관찰, 무기력한 갈망 등은 범람하는 피상성에 휘말려 기반 잃은 어떤 '낭만성-진정성'에의 갈구 실패라기보다 새롭게 창안되어야 할 주체성의 적응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 주체성은 김해경이 자신의 필명을 5개나 두는 것과 더불어, 페소아가 자신의 이명을 달리 하며 무려 75개...로 언어로서의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표현함으로써 구축될 주체성이다. 여러 네임드 학자-작가들이 페소아를 찬양하고 또 높게 보고 있지만, 고평가는 자제해야 할 것이 사실 페소아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 뿐아니라 그를 향한 '환상' 없이는 결코 그의 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읽기'가 존재할 리는 없고, 무엇이 더 개연성 있게, 설득력 있게 느껴지느냐의 실용적 어휘 비교를 의미한다. 내가 느끼기론 정신병리-정신분열증(조현병)에의 상상력이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페소아 읽기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인지, 너무 유명해진 들뢰즈-가타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분열'은 사실 너무 남용되어 다뤄지는 측면이 없잖아 있었다. 정신-분열을 겪어볼 리도 없고, 겪을 필요도 없는 멀쩡한 인간들이 분열을 운운하는 건 진정성 입장에서 무척 가소롭고 같잖은, 기만적인 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건 마치 가난한 적 없는 인간이 가난을 코스프레하고 있을 때 느끼는 감수성과 동일한데, 이런 복잡한 정동 반응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핵심 중 하나는, 언어를 매개로 자신이 교호하고 있는 세계와 어긋남을 유발하는 데 따른 일종의 수동적 공격성이다. 더불어 여기에는 '척 하기'라는 참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마치 의식의 막장과도 같은, 여전히 개발된 적 없는 비의식이 잔존해 있다.


 더불어 21세기에서 이런 작가들은 '프로필'로 다뤄지기 유용한 수단이다. 나도 아직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초중반 유명세를 탔던 한병철이, 나에겐 여전히 다루기 힘든 유형이다. 사실 진정성을 발달시키려는 무수한 '언어 사용자'들에게 있어 가볍고, 휘발적이고, 진부하고, 뻔뻔한 인간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무엇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들을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최선의 발달로 그들의 장점을 말하지만 꼭 뒤에다 한 마디로 '이 가벼움'을 덧붙이게 된다. 한병철이 철학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건 진정성 학자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사실이다. 그의 책은 독창성이라고는 전무하지만, 본인은 마치 예술가와 같다며 동료 철학자들에게 소외되는 게 은근한 질투(?)라는 은폐 화법으로 말미암아 정신승리를 한다. 여기에 작동하고 있는 구조를 알아보지 못하면 레크비츠 말마따나 가치를 느끼든, 가치를 존나 박탈하든 사로잡히게 된다.


 쇼펜하우어, 니체, 페소아 같은 작가들이 하나의 악세사리처럼 문화상품이 되는 건 그들이 살아 있지 않아서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참으로 재밌는 건, 이들의 추종자들은 결코 이들이 가볍게 다뤄지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역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그들의 삶과 책의 내용에 있질 않다. 사실 이건 지극히 '정체성' 문제이며, 세상 만사 어디에서든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 정체성 이슈다. 특히 '자의식'을 강하게 노출시키는 작가일수록 물기 좋은 정체성 미끼이며, 한번 무는 순간 자신의 입을 꿰어 한몸이 되고마는 아주 강력한 '어휘'인 셈이다.


 이건 제인스나 테일러 같은 작가들의 조언-암시대로 우리 뇌의 일반적인 작동 효과이기도 하다. 특히 이걸 담당하는 아주 강력한 부위는 좌뇌라고 할 수 있고, 킬링타임으로 떠돌아다니는 '뇌과학' 이야기에 늘상 빠지지 않는 뇌량이 절단된, 뇌 일부가 절단된 당사자에의 실험 썰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 갈증을 느끼는 21세기 현대인들에게 구실 좋은 흥미거리가 된다. 루만 말마따나 2차 질서 관찰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 '뇌'라고 하는 건 인간 자신이 스스로를 관찰하는 데 있어 막강한 블랙박스로 여겨진다. 이제는 유튜브에서도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어 사람들에게 익숙한 실험 중 하나로 발견할 수 있는 '좌뇌의 합리화'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자의식 과잉이 실은 어떤 구조에서 벌어지는 현상인지를 추론할 수 있게 돕는다. 좌뇌는 자신에게 벌어진-들어온 신호를 언어로 구축하는 데 있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데, 단순히 '문장'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피동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이 주요한 특징이다. 이 기능으로 말미암아 정신분열을 앓을 때 나타나는 '망상 장애'-편집증적 사고 망상의 '코드'가 전면 드러난다. 내가 보기에 이 현상은 정체성 이슈를 겪을 때도 작동하는 구조다. 다만 그 강도는 무척 약한 편(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당사자에게 그 강도란 절대 약하지 않으므로)이지만, 자기부정의 전문가들이 왜 그렇게 늘상 '부정적'인지를 추적하면 그들이 특정 코드를 중심으로 언어 구축에 갖은 노력을 일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은 쉽게 말해 '자기를 실현할 수 없음'을 구심점 삼아 공전을 하고 있다.


 뇌의 기능이란 게 도대체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이 하나의 기계 장치처럼 명명백백한 것인지, 고정된 것인지는 가정할 수도 없고 유추할 수도 없지만, 인간에게 있어 '자기 실현'은 아주 오래된 문제로 여겨졌다. 과거에는 '역할 실현'이기도 했고, 언어가 없던 시절에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인간은 늘 실현의 문제를 겪었다. 이 문제는 정신 기능이 점점 고도화된 오늘날 달리 서술할 수도 있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뤄질 수가 없었다. 패러다임으로 이해하기 유용한 사례를 들어 이를 인식할 수도 있다. 인간은 '실현'의 문제를 늘 '실현되어야 할 대상'의 문제로, 먼저 다루지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거꾸로 '왜 실현되어야 하는가'로 전복해야만 풀 수 있었다. 이 현상은 뇌의 기능이 점점 밝혀지면서 더 이상 뜨거운 감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네 모습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모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페소아도 산문에서 고백하는 바, 자기 실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불가능을 확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올가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자기 응시의 우물'을 들여다보기를 멈출 수 없다. 차라리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게 좀 더 쉬울 것이다. 그것을 범박하게 우리는 '개성'이라고도 부른다. 21세기에는 '캐릭터'를 위해 그런 개성을 연출하고 큐레이팅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도 괜찮다. 과거에는 이런 방식이 애초에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상상될 수 있다 해도 제 조건이 부족해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양상은 불가능했다. 몇몇 학자들은 이 '정체성 문제'에 물고 늘어지기를 그만두기를 제안한다. 이건 문자 그대로 '늪'과 같아서, 발버둥 쳐봤자 더 깊이 빨려들어가게 된다. 또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다. 이 그만두기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단순히 '이성'으로 될 수 없다. 오직 '자기 응시'만으로 될 수 없다. 내가 느끼기로 이 그만두기는 타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타자가 없을 경우, 본인 스스로가 '타자화'할 수 있는, 보다 복잡하고 고도화된 정신 기능의 발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때 인간의 자기부정은 영원한 동어반복에 빠진다. 젊은 시절의 최승자처럼.


 자기부정의 동어반복은 때로 미학을 유발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반복 행위'란 꽤나 친화적인 구조다. 오늘날 21세기 대도시에 사는 인간들에게는 맹목적인 반복 행위 속에서 어떤 편안함과 안락함,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 정동 구축은 본래 있던 게 아니라 다른 부분에의 신경 과민, 노이로제, 과도한 압박의 반대급부로 인한 완화, 조절, 후퇴된 '자율성'이다. 그것이 외부 사물을 향한 행위가 됐든, 언어 세계 속 자의식을 향하든, 무엇에의 집요하리만치 강박적인 반복성은 기본적으로 놀이와 유희의 구조이자, 좌절과 절망의 몸부림이자, 생물의 '자기 생산' 방식이다. 이 구조를 적용할 내용을 달리함으로써 여러 관찰-해석을 추출할 수 있지만, 반복의 구조에는 기본적으로 지속하려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이 힘이 소실된다는 건 곧 죽음이다. 그만두기가 타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그만두기는 반드시 모종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실존의 죽음이 되었든, 거진 한평생 붙들고 있던 주체의 죽음이 되었든 말이다.


 반대로 페소아처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발적 죽음을 독촉할 수도 있다. 그는 하나의 유령이 되어 사람들이 멋대로 굿하고, 치장하고, 멋드러지게 만들기 좋은 존재가 되고 말았지만, 그의 실존 지평은 바디우 말마따나 도래하지 않은 철학 지평에 있는 게 아니라 대도시에 거주하는 샤먼이라는, 근대와 고대의 중첩된 지평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천재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일반 사람들이 천재 천재거리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실제로 어떤 친구이자 이웃이자 가족이었는지를 상상해 보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한다면 그들이 도대체 세상에 왜 나타났고, 그들이 무얼 하려고 했는지 겸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란 걸 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불가피하게 막대한 무언가를 짊어진 고통받는 자들이다. 일반 사람들이 그러지 않을 수 있게, 마치 복불복으로 불운에 당첨된 자들이다. 그들이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경이로운 결과물을 생산하고 창작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그들 본인이 그런 걸 의도했다고 가정하는 건 오류다. 21세기에 만들어지고 있는 연출과 큐레이팅으로써의 '창작자'들과는 막연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정체성 이슈나 미학적 해석에 있는 게 아닌, 일반이 될 수 없는 소수자론에 있다. 하지만 이 소수자론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한해서만 적합한 이야기다.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연출되고 소비되는 문화 상품으로써의 소수자는 조금 별개의 이야기인 셈이다.


 지금까지의 스케치는 다음주부터 정리하고자 하는 21세기 사회에 대한 여러 책에 대한 몸풀기다. 오늘날은 고정된 시선, 관점, 주체성, 정체성으로 살아가기에 너무 버거운 시대다. 하나에도 너무 다양한 방식이 걸쳐져 있고, 또 무엇하나 고정되지 않는다. 정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전까지는 그래도 정주하며 기반하는 운용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추구될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면, 오늘날은 이동하고 변환되고 연결-접속이 다채로운 운용이 되어야 하는데 버겁고 불편하고 거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디지털 네이티브라 할 수 있는 한국의 다음 세대들 중에 이런 정신 운용을 맛깔나게 잘 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란 기대를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속한 시대는 딱 '과도기'다. 나는 21세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사용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습득하고 만 과거의 유산들에 발목잡히고 있는 신세다. 학계에서든, 문화산업에서든, 예술에서든, 대중 매체에서든, 소비 공간에서든, 그러니까 일상 어디에서든 유명해지고 관심을 많이 받고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들 속에서 보다 뛰어난 '사용자'로서 활동하는 이가 나타나기엔 아직 시기상조로 보인다. 나뿐 아니라 무수한 이들도 과도기를 겪고 있다. 학자들도 그렇다는 걸 고백하는 이들이 있고, 창작자들도 그렇다는 걸 작업으로 연출하는 이들이 있고, 일상을 살더라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심심찮게 툭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일반인들의 입으로는 대부분 징후로서만 드러나지만, 지금의 과도기라는 사건을 느끼기엔 매우 분명한 알리바이다. 


 이 알리바이를 일찍이 제공했던 이들이 이상, 페소아, 니체, 시오랑 같은 이들이다. 사실 그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다음 후배들은 일찍이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없다'고 배움으로써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우리 정신은 맹목적으로 패치되는 게 아니므로, 들쑥날쑥한 정신의 불확실성을 좌충우돌 겪는 게 자연스럽다. 내가 언제쯤 21세기 사회의 주류를 사용자로서 수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나도 그런 내가 도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존경하는 무수한 자기부정 전문가들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도 있다. 그들은 남들이 고통받기 전에 일찍이 비명을 내지름으로써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경고 장치'다. 그럼으로써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일찍이 종료시켜버리는 알림 장치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 이럴 때 제일 적합하다.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처럼 느끼게 만들어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일방적 다행. 이런 인류애적 구조가 인간 정신에 내재된 게 아니라면, 그들이 결코 절대 출간을 할 리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노출될 수 있게 '언어'로 남겼을 리 없다. 애매하지 않은 잔인함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런 정신이 어떤 행위 가능성을 그려낼지 상상할 수 있다면, 그런 인간이란 세상에서 찾기 무척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출현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그런 인간은,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그려낼 때 가정되지 않음으로써 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그려낼 조건이 된다. 그들은 쉽게 말해 우리 인간에게 읽힐 수 없는 존재다. 보는 방법을 배워야만 포착될 일이다. 21세기 사회를 '관찰의 시대'라고 일반화하는 건 타당해 보인다.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보는 방법'을 단련하고 주목하고 또 거기에 정동 반응을 일으키는 데 적응했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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